불교미래는 불교를 사랑하는 자에 의해서
나와 똑 같은 옷을 입은 자를 볼 때가 있습니다. 유니폼이라면 동질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옷을 입었는데 똑 같은 옷을 입은 상대방을 발견했을 때 미묘하고 약간은 불편한 마음이 들어 갈 것입니다. 이름도 마찬가지 일 것이라 봅니다.
동명의 교수님이 있는데
동명이인이 있습니다. 성과 이름이 같은 사람입니다. 흔한 성과 흔한 이름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동명이인을 경우 크고 작음으로 구분합니다. 키가 크다면 ‘큰 아무게’라 하고, 키가 작으면 ‘작은 아무게’라 합니다. 종종 동명이 있었습니다. 이름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습니다. 특히 단체생활에서는 햇갈리기 쉽습니다. 실제로 짧은 단체생활에서 경험이 있었습니다.
불교관련 밴드에 가입했습니다. 실명으로 가입했습니다. 인터넷의 경우 불특정다수를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인터넷필명으로 활동하지만 알고 지내는 밴드나 카톡에서는 실명으로 하는 것이 예의일 것입니다.
수 백명이 가입되어 있는 밴드에는 스님도 있습니다. 어느 비구니 스님이 책을 잘 받았다고 개인카톡을 보내 왔습니다. 순간적으로 잘못 보내 왔음을 알았습니다. 이에 스님에게 잘못 보낸 것 같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교수님에게 보낸다는 것이 잘못 갔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인연으로 하여 교수님의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동명의 교수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습니다.
동명의 교수님과 통화하게 되었습니다. 스님에게 연락처를 받고 문자를 보냈더니 곧바로 전화를 걸어 온 것입니다. 동명의 교수님은 나이가 거의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종종 블로그에 ‘교수님 아니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동명의 그 교수님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블로그를 처음으로 개설한 2005년도에도 어느 비구니스님으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동명의 교수로 착각을 일으킨지가 10년이 넘은 것 같습니다.
동명일 경우 구분하기 위하여 또 다른 명칭을 사용합니다. 대게 남들이 구분하는 것이지만 때로 스스로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인터넷필명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필명을 함부로 짓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필명 그거 하나만 보아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웁니다. 실명이 있지만 가정에서 불리는 명칭이 다르고 직장에서 부르는 호칭이 다릅니다. 때에 따라 ‘그 사람’이라 하여 대명사로 불리기도 합니다. 심하게 ‘그 놈’ 또는 ‘그 인간’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장소에 상황에 따라 달리 불리우는 것이 이름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름에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금강경에 자주 등장하는 정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A는 A가 아니라 그 이름이 A이다.”라는 말입니다. 여법수지분에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반야바라밀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 붙여진 것에 불과 하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이름이나 명칭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 금강경에서는 수 없이 나옵니다.
여기 컵이 있습니다. 금강경 정형구를 적용하면 “컵은 컵이 아니고 그 이름이 컵이다.”라 할 수 있습니다. 컵은 때에 따라 물컵도 될 수 있고 찻잔도 될 수 있고 술잔도 될 수 있습니다. 컵은 용도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집니다. 이렇게 본다면 컵이라는 말은 단지 명칭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이름과 명칭을 부여 하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인터넷에서는 인터넷 필명이 있습니다. 대게 가볍게 짓는 것이 특징입니다. 지나치게 가벼우면 실없는 사람으로 비추어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익명성을 보장하는 공간이라 하더라도 장난으로 지은 이름은 하찮은 존재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이름에도 운명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왕 지을 것이라면 숙고하여 그럴 듯 하게 지을 필요가 있습니다. 필명은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얼굴이고 그 사람의 인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필명을 함부로 지어서는 안됩니다. 필명 그거 하나만 보아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불교미래는 불교를 사랑하는 자에 의해서
동명의 교수님과 두 차례 장시간 통화 했습니다. 주로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글쓰기 한지 10년이 되는데 그 동안 스님들과 학자들의 불만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스님들이나 학자들은 불교를 업으로 사는 사람들인데 왜 인터넷에 글쓰기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입니다. 이에 게을러서,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불교에 대하여 가장 많이 아는 사람들이 스님들과 학자들입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스님들이나 학자들의 글을 보기 힘듭니다. 대체 스님들과 학자들은 그 많은 시간을 무엇하며 보내는 것일까요? 일주일에 한 두편이라도 블로그나 카페를 만들어 글을 올려 놓으면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자들에게는 한줄기 단비와 같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많은 스님들과 학자들의 글쓰기를 찾아 보기 힘듭니다. 아마 돈도 안되는 인터넷 글쓰기 보다는 단행권을 내는 것이 더 나을지 모릅니다.
학자들이라면 인터넷 글쓰기 할 시간에 논문을 쓸 것입니다. 논문은 실적으로 연결 되기 때문에 삶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책을 내고 논문내는 것에는 열심이지만 일반적으로 잡문으로 보는 인터넷 글쓰기에 인색한 것은 사실입니다. 동명의 교수는 이런 사실에 대하여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동안 백편 가량 논문을 썼지만 독자들이 없는 마치 생계를 위한 논문인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무런 대가 없이 인터넷 글쓰기 하는 것에 대하여 경의를 표한다고 했습니다.
인터넷에 매일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에 동명의 교수님은 불교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라 했습니다. 불교는 스님들의 것도 아니고 불교는 학자들의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불교는 불교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끌어져 갈 것이라 했습니다. 불교의 미래가 암울하지만 그래도 기대를 가져 보는 것은 불교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동명의 교수님은 인터넷필명으로 블로그 활동하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스님들이나 학자들이 마음 놓고 표현하지 못하는 인터넷글쓰기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었습니다. 언제 시간 되면 한번 만나자고 약속했습니다. 학술대회나 세미나 할 때 불러 주면 만남의 시간을 갖겠다고 했습니다.
2017-02-04
진흙속의연꽃
'한국불교백년대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코 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 바퀴를, 총무원장직선제 공청회를 보고 (0) | 2017.03.01 |
---|---|
“가만 있으면 다 죽는다, 우리에겐 내일이 없다” 총무원장직선제 소셜다이닝(Social dining) (0) | 2017.02.21 |
왜 3백만명이 빠졌나? 주인스님과 손님불자 (0) | 2017.02.03 |
염주를 굴리는 스님의 간절한 염원 (0) | 2017.01.17 |
배를 채우기 위해 출가했나? 반승반속은 귀의의 대상이 아니다 (0) | 2017.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