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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지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는? 빤냐와로(진용) 삼장법사의 유튜브법문

담마다사 이병욱 2017. 3. 3. 10:29

 

보여지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는? 빤냐와로(진용) 삼장법사의 유튜브법문

 

 

초기경전, 즉 빠알리니까야는 어디를 열어 보아도 상관 없습니다. 법구경의 아름다운 423개의 게송을 처음부터 읽어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책을 아무 곳이나 펼쳐도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합니다. 초기경전을 소설 읽듯이 첫 페이지 부터 읽을 필요가 없음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순서를 지켜야 할만한 경전이 있습니다.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는 상윳따니까야가 그렇습니다.

 

상윳따니까야의 경우 56개 주제, 7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연기에 대한 가르침이 니다나상윳따(S12)’입니다. 니다나상윳따부터 보기 시작해서 오온에 대한 가르침인 칸다상윳따(S22)’, 그리고 육처에 대한 가르침인 살라야따나상윳따(S35)’ 순으로 본다면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가르침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알려면 논장과 주석서를 보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마음의 메커니즘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아비담마와 계정혜삼학으로 설명되어 있는 청정도론이 대표적입니다. 이와 같은 논장과 주석서는 첫 페이지부터 순서대로 읽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점이 니까야 읽는 방식과 다릅니다.

 

빤냐와로(진용)삼장법사의 유튜브법문

 

니까야는 아무 곳이나 읽어도 감명을 줍니다. 법문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수 많은 법문이 있지만 특별히 순서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비록 주제별로 정리 되어 있다고 해도 어느 것을 들어도 상관 없습니다. 그 중에서 들을만한 것이 빤냐와로(진용)삼장법사의 유튜브법문일 것입니다.

 

한국테라와다불교의 빅쿠인 삼장법사의 법문은 들을만한 합니다. 빠알리 삼장에 대한 해박한 지식뿐만 아니라 수행까지 겸비한 가르침은 언제 들어도 들을만한 합니다. 더구나 부드럽고 편안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차분하게 진행하는 법문을 들으면 분명히 건질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법문에 비하여 조회수가 너무 낮습니다. 하지만 가치를 아는 자에게는 가르침에 대한 갈증을 풀어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일까 진주 도과선원 원담스님은 수행기라 볼 수 있는 섭세일기에서 빤야와로 진용스님의 법문을 경청해볼만 하다. 증광현문(增廣賢文)을 한 번 훑어 볼만하다.” (수행일기 2016 동안거-7)라 했습니다.

 

마음보는 수행, 심념처

 

새벽에 빤냐와로 삼장법사의 법문을 유튜브로 들었습니다. 아무곳이나 찍어서 들었는데 역시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법문은 대념처 심념처1(아짠 빤냐와로 진용)입니다. 사념처 중에 심념처에 대한 것입니다. 이른바 마음을 보는 수행입니다.

 

삼장법사는 마음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마음은 항상 나쁜 쪽으로 기울게 된다.”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법구경 마음의 품(Citta Vagga)’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법구경 35번 게송을 보면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 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이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에서 마음은 성악설로 보여집니다. 마음은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마음을 제어하고 다스리지 않으면 항상 악하고 불건전한 곳에 머물러 있음을 말합니다.

 

삼장법사는 마음에 대하여 마음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거나 마음은 종잡을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내버려 두면 항상 탐, , 치에 가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에 대하여 세 가지 기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투영인식기억이라 합니다.

 

마음 보는 수행에서 자신의 마음을 잘 관찰하는 것은 마음이 탐진치로 가 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마음은 항상 나쁜 쪽으로 기울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아 차리지 못하면 욕망과 분노의 어리석은 삶을 살아 갈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미쳐 날 뛰는 듯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제어할 수 있을까요?

 

미쳐 날 뛰는 듯한 마음

 

사람들은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봅니다. 거울을 보면 자신의 눈과 코, 귀 등을 확인합니다. 자신의 얼굴에 대하여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만족하지 않다면 화장을 하거나 심지어 성형을 할지 모릅니다.

 

얼굴을 비추어 보는 것이 거울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은 없을까요? 자신의 더러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볼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경악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잔뜩 화장하여 미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욕망과 분노로 가득 찬 마음을 마음의 거울로 비추어 본다면 마녀악마가 보일 것입니다.

 

마음은 투영, 인식, 기억이라는 세 가지 작용에 따릅니다. 대상을 거울을 보듯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투영입니다. 이것은 대상이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식과정에서 왜곡이 생겨납니다.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과거의 기억과 함께 보는 것입니다. 대상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보는 것입니다.

 

보여지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는?

 

대상을 본다는 것은 제대로 볼 수 없음을 말합니다. 보여지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본다는 것은 욕망이나 분노가 개입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히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히야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

 

바히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바히야여,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 바히야여, 그대가 그것과 함께 있지 않으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 속에 없다. 바히야여, 그대가 그 속에 없으므로 그대는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그 양자의 중간세상에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

 

(Bāhiyasutta-바히야의 경, 우다나 Ud1.10, 전재성님역)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반드시 주관이 개입합니다. 여기에 과거 기억까지 합하여 지면 왜곡이 일어납니다. 이런 과정이 맛지마니까야 1번 경에 잘 표현 되어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1번 경을 근본법문또는 뿌리에 대한 법문이라 합니다. 법문에서 부처님은 왜곡이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여 망상 또는 희론이 발생되는 과정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그는 땅을 땅으로 여기고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땅을 생각하고 땅 가운데 생각하고 땅으로부터 생각하며 ‘땅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땅에 대해 즐거워한다.”(M1) 라 했습니다.

 

땅을 땅이라고 있는대로 보지 못하고 덫칠 해서 보았을 때 왜곡이 일어날 것입니다. 투영된 대상에 대하여 인식을 할 때 과거의 기억이 개입되었을 때, 본래의 투영된 대상에 덫칠 된 것을 말합니다.

 

덫칠된 마음

 

사람들은 대상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덧칠해서 봅니다. 과거 그 사람에 대하여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의 과거 모습을 보고 있는 셈이 됩니다. 이는 스스로 생각의 감옥에 묶여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는 십년 전의 그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나는 십년 전 그의 안좋은 기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과거의 기억을 내려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거 좋지 않았던 기억에 매여 있다면 족쇄에 매여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대게 욕망이나 분노를 유발하여 어리석은 삶을 살아 갑니다. 이에 대한 좋은 일화가 있습니다.

 

경허스님과 만공스님과 처녀

 

허정스님이 천장사 주지로 있을 때 종종 천장사로 향했습니다. ‘해미인터체인지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고북면방면으로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천장사 가는 표지판이 보입니다. 연암산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 있듯이 위치한 천장사에 가려면 장요리라는 마을을 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을을 지날 때 마다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경허스님과 나이 어린 제자 만공스님과 관련된 일화입니다.

  

 

시냇가에서 아리따운 처녀가 장마 부러난 물 때문에 건너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처녀는 부끄러움을 참으며 젊은 만공스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만공은 처녀에게 정색을 하며 화를 냈다.

 

"불가에서는 여자를 가까이 하면 파계라 합니다. 어찌 젊은 처자가 스님에게 업어달라는 부탁을 하시오! “

 

그러자 경허선사가 처녀에게 등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도와드리지요. , 업히시오. "

 

경허는 처녀를 업어다가 건너편에 내려주었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가는데 뒤따르는 만공스님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따졌다.

 

"스님, 수도하는 스님이 어떻게 젊은 여자를 업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경허스님께서 말했다.

 

"내려 놓아라!"

 

"?"

 

"나는 처자를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너는 아직도 그 처자를 업고 있구나!”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처녀 일화)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처녀일화는 유명합니다. 최인호의 소설 길없는 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화와 벽화에서 알려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경허스님에 만공에게 나는 처자를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너는 아직도 그 처자를 업고 있구나!”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려 놓으라는 것입니다.

 

경허스님은 처녀를 내려 놓았습니다. 마음까지 내려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 어린 만공스님은 처녀를 마음속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경허스님은 처녀를 내려 놓음과 동시에 그 마음 마져 내려 놓았음에도 만공스님은 여전히 마음을 내려 놓고 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과거의 쓰라렸던 기억

 

과거의 기억을 없앨 수 없습니다. 과거의 쓰라렸던 기억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물론 좋았던 기억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기억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일로 분노가 일어난다면 과거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내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서못해!”라며 평생 분노로 사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임종순간에 그 분노로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났을 때 악처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이 있으면 풀어 버려야 합니다. 한 많은 인생이라도 타령이라도 해서 해소 하는 것이 낫습니다. 과거의 기억으로 인하여 나의 삶이 분노 또는 욕망에 지배 된다면 악하고 불건전한 삶을 살게 되고 동시에 악하고 불건전한 업을 짓게 되어 이생에서나 저 생에서나 괴롭고 불행하게 살아 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집중과 알아차림으로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로우려면 경허선사의 말대로 내려 놓아야합니다. 등에업은 처녀를 내려 놓았을 때 그 행위에 대한 마음 역시 내려 놓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만공스님처럼 처녀를 마음에서 내려 놓지 못했을 때 그것은 마음의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삼장법사는 집중과 알아차림을 말합니다.

 

과거의 안좋았던 기억에서 자유로우려면 다른 대상에 집중하라고 했습니다. 걸을 때 발바닥의 감촉에 집중하고 좌선할 때 배의 호흡에 집중하듯이, 좋지 않은 기억이나 덧칠된 기억이 일어 났을 때 대상을 달리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현재 호흡에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부부싸움을 하면 좋지 않은 감정이 꽤 오래 갑니다. 서로 풀어 버리고 해소하지 않으면 일년이 가고 십년이 가고 평생 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사과하고 용서하는 것이 최상일 것입니다. 굳이 마음에 응어리나 한으로 남겨 둘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분노를 야기하여 해롭게 작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노의 마음을 자비의 마음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싸움을 하면 분노하게 되어 있습니다. 분노가 분노를 일으켜 점차 상승됩니다.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분노하는 이에게 분노하면 서로가 파멸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하는 이에게 분노를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싸움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양자가 승리자 됩니다. 그렇다면 분노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자비의 마음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요?

 

분노와 자비는 상극입니다. 정 반대의 입장에 있는 것이 분노와 자비입니다. 지금 분노하는 이에게 자비의 마음을 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를 모욕하고 욕하고 때리는 자에게 자비의 마음을 낸다는 것은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아닌한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분노하는 이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분노가 일어나지만 분노를 여의어야 분노가 그칠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야 합니까? 그것은 그 사람의 장점을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장점은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원수처럼 사는 부부일지라도 좋았던 때는 있었을 것입니다. 상대방의 장점이나 좋았던 때를 떠 올린다면 마음이 누그러질 것입니다. 분노의 마음에서 자비의 마음으로 전환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하여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느낌에 목숨 걸 이유 없다

 

오온을 내 것으로 여겼을 때 모든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기뻐도 내가 기쁘고, 슬퍼도 내가 슬픈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느낌을 자아로 여기고, 느낌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느낌이 있고, 느낌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M109) 라 합니다.

 

오온이 내것이 아니라면 기뻐할 일도 슬퍼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조건발생에 따른 작용으로 보면 그뿐입니다. 이럴 때 하는 말이 그러려니입니다. 화가 나도 화가 날 만해서 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화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다하면 화는 사라집니다. 그러려니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하지 못합니다. 조건이 바뀌면 뒤의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화내는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립니다.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는 마음에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느낌에 목숨 걸 이유가 없음을 말합니다.

 

죽어도 좋아!”라며 쾌락을 즐기지만 일시적입니다. 조건이 다하면 이미 지난 마음이 되어 버립니다. 남는 것은 행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행위에 대한 과보는 언젠가는 익는다는 사실입니다. 행위가 익을 때, 즉 조건이 형성되었을 때 반드시 과보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이 선과보이면 문제 없으나 악과보이면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느낌에 목숨 걸 이유 없습니다.

 

무아의 가르침

 

부처님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습니다. 마치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듯이 있는 그대로 대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려 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덧칠 됩니다. 투영된 마음에 과거의 기억이 개입되어 욕망과 분노로 덧칠이 됩니다. 마치 거울에 얼룩이 져서 제대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습니다.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므로 (Ud1.10) 라 했습니다. 덫칠해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 바히야여,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 바히야여, 그대가 그것과 함께 있지 않으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 속에 없다.”라 했습니다. 이는 무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에서 “ ‘땅은 내것이다.’고 생각하면 땅에 대해 즐거워한다.”(M1)라 했습니다. 땅을 땅이라고 보지 않고 땅 이상으로 보았을 때 마음의 왜곡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는 자아의 개입을 말합니다.

 

오온이 내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좋은 느낌이 일어 났을 때 그 느낌이 내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덧칠된 것입니다. 그 결과 욕망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싫은 느낌이 일어났을 때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욕망과 분노로 살아갑니다. 이런 삶을 어리석은 삶이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아의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어떠한 느낌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저열하든 탁월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그 모든 느낌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S22.59, 전재성님역)

 

 

 

2017-03-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