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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의 조건은 무엇인가? 한국테라와다불교와 빤냐와로삼장법사

담마다사 이병욱 2017. 4. 19. 11:24

 

법사의 조건은 무엇인가? 한국테라와다불교와 빤냐와로삼장법사

 

 

노법사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빤냐와로(진용)삼장법사 법문에 참석요청했습니다. 이에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노법사님은 도이법사님입니다. 작년 석달 동안 종로3가 미붓아카데미에서 위빠사나 수행지도를 받은 바 있습니다.

 

4 15일 토요일 이른 아침 우리함께빌딩으로 향했습니다. 우리함께빌딩은 익숙합니다. 재가활동하면서 자주 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동국대부근 장충동에 위치해 있는 우리함께빌딩에는 참여불교재가연대, 행불선원, 불교포커스 등 여러 불교단체가 입주해 있습니다. 특히 6층에 큰 법당이 있어서 공동으로 활용하는 듯 합니다.

 

김진태교수님과 인연

 

법당으로 향하기 전에 지하철3호선 2번 출구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노법사를 만났습니다. 도착하니 낯익은 얼굴들이 보입니다. 노법사님을 비롯하여 김진태교수 등 4명이 있었습니다. 특히 김진태교수님이 반가웠습니다. 거의 십년만입니다.

 

김진태교수님과 인연이 있습니다. 2007년 김교수님으로부터 처음으로 테라와다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당시 김교수님은 능인선원 금강회 주체 강연을 약 1년간 진행했습니다.

 

매달 한번 있는 강연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불교에 입문한지 고작 3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김교수님의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특히 미얀마 수행체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이에 대하여 ‘불교는 위대한 종교 이자 위대한 가르침’ 김진태교수 특강(2007-06-15)’라는 제목으로 글과 동영상을 블로그에 올려 놓은 바 있습니다.

 

불자로서 자부심을 갖게 한 명강연

 

10년전 블로그에 올려 놓은 글을 보니 12연기에 대한 강연입니다. 그러나 그때 당시 김진태교수님은 한시간동안 불교전반에 대하여 쉼없이 강연 했습니다. 때로 짓굿은 표현을 써가며 걸쭉하게 입담하면 속된말로 뒤집어졌습니다. 특히 삼법인에 대하여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순으로 순서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달에 한번 특강이 있는 김진태교수 시간이다. 이번달 주제는 12연기이다. 그 전달에 4성제와 8정도에 대하여 강의 하였지만 이번 12연기도 그 전의 강의의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다. 강의내용은 중복 되는 내용은 많지만 언제나 들어도 새로 듣는 것 같은 재미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나름대로 강의를 재미있게 끌고 가는 것이 김교수님의 특징인데 재미있는 표현을 하여 한바탕 웃기기도 할때는 입이 벌어지도록 웃지만 진지하게 말할때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 않아 언제나 미소와 함께 듣는 재미를 톡톡히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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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기본적으로 고통을 자각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고통의 원인은 영원에 대한 욕탐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오욕락이다. 즉 식욕, 성욕, 명예욕, 재물욕, 수면욕을 성취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지구상의 대부분의 종교가 영원히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바탕에는 5욕락을 위한 기도를 한다. 무얼 해달고 하는 ‘구걸형 기도’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걸형기도로는 고통에서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다. 고통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가르침이 불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는 수행을 하여야 한다. 그 수행하는 방법중의 하나가 사념처 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여 깨닫는 것을 말한다. 또 불교는 매우 구체적으로 수행방법을 제시 한다. 중생의 대명사인 ‘탐진치’에 대하여 욕심이 강한 사람에게는 ‘부정관’수행을, 성냄이 강한 사람에게는 ‘자비관’수행을,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연기관’ 을 알려준다.

 

(진흙속의연꽃, ‘불교는 위대한 종교 이자 위대한 가르침’ 김진태교수 특강(2007-06-15))

 

 

 

(2007)

 

 

김진태교수님은 강연말미에 불교는 위대한 종교이자 위대한 가르침입니다.”라 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십년전 그때 당시 김진태교수님의 강연을 들었을 때 불자로서 자부심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불교는 미신행위나 하고 우상숭배나 하는 종교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어서 위축된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진태교수님의 부처님 원음에 대한 강연을 들었을 때 불자가 되기를 참 잘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명강연이었습니다.

 

김진태교수님을 오랜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십년전 금강회 강연도 들었지만 기별법회 모임에서 초청강사로 모셔 강연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때 당시 인사를 드렸기 때문에 곧바로 알아 본 것 같습니다. 김진태교수님의 강연을 듣고 초기불교와 인연맺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글에 베일 것 같은

 

빤냐와로삼장법사의 법회는 10시에 시작됩니다. 도착하니 약 40명 가량 되는 불자들이 모였습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서울법회모임입니다. 처음 참석하는 법회이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노법사에 따르면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한분이 필명 호잔님입니다.

 

호잔님은 블로그에서 댓글로 소통한 바 있습니다. 블로그에 글을 주실 뿐만 아니라 미디어붓다칼럼에도 좋은 글을 많이 올려 주십니다. 오로지 필명과 글로만 소통하다가 이날 처음으로 얼굴을 보았습니다. 이전에 도이법사님으로부터 대충 들었기 때문에 그분인 것을 알아 보았습니다.

 

호잔님과는 글인연이 오래 되었습니다. 때로 티격태격한 바도 있습니다. 글로 보아서는 젊은 사람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글로만 소통하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다릅니다. 전화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일의 특성상 대면없이 진행합니다. 주로 메일과 전화를 활용합니다. 대구, 울산, 부산, 창원 등 멀리 떨어진 고객과의 소통은 전화와 메일에 의존합니다. 대면없이도 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 만나기도 합니다.

 

고객이 가끔 사무실로 찾아옵니다. 어떤 고객은 처음 보았을 때 매우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목소리만 듣다가 얼굴을 보니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목소리와 얼굴이 매칭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소리로만 판단해서는 젊다고 생각했는데 머리가 반백이어서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호잔님 역시 글과 얼굴이 매칭되지 않았지만 금새 적응되었습니다. 그런 호잔님의 글은 매우 논리정연하고 날카롭습니다. 빈틈이 없어서 헛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날카로운 칼과 같습니다. 함부로 대들었다가는 날카로운 글에 베일 것입니다. 실제로 논쟁이 붙으면 호잔님의 글에 모두 베이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정법(正法)을 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누가 말하든 똑 같은 말을 합니다. 이 사람이 말하는 것 다르고 저 사람이 말하는 것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똑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경전을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빠알리삼장에 근거하여 법문하고 배우기 때문에 어느 누가 이야기해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십년전 김진태교수님의 강연에 대한 글을 다시 보니 역시 똑 같은 말입니다.

 

한국의 탁발현실

 

한국테라와다불교 빤냐와로(진용)삼장법사 법문은 오전 10시가 약간 지나서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보시물을 바치는 의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준비한 보시물을 바루위에 올려 놓고 예를 표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탁발의식이라 볼 수 있습니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탁발전통이 살아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입니다. 가사도 부처님당시 입던 것입니다. 나라마다 색깔이 다르긴 해도 편단우견을 특징으로 하는 가사를 입고 있습니다. 율장에 따르면 세 벌의 가사를 입습니다. 붉은색 또는 노랑색 남방가사를 보면 한국스님들과 확실히 구별됩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에서 탁발만큼은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에서는 공식적으로 탁발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한마디로 출가자의 위의를 손상시킨다.’는 것입니다. 마치 걸인처럼 얻어 먹는 행위가 출가자로서 체면을 떨어뜨린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60년대에 탁발이 금지 되었습니다.

 

거리에는 탁발하는 스님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 식당 저 식당 돌아 다니면서 불쑥들어가 목탁을 칩니다. 식당주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불청객입니다. 더구나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불쾌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마치 영업방해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 탁발승이 들어 오면 두 말 없이 천원짜리 한장 쥐어 주고 보냅니다. 이런 장면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한국식 간이탁발

 

한국테라와다빅쿠들은 남방에서 정식으로 계를 받았습니다. 가급적 남방방식대로 살고자 할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불교현실은 척박하기만 합니다.

 

한국에서 불교는 다수의 종교가 아니라 소수종교입니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친 것의 반정도 밖에 안되는 교세입니다. 불자비율은 전국민의 15%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구나 한국불교에서는 탁발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탁발하는 스님들에 대한 인식도 좋지 않아 속된 말로 땡중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한국테라와다 불교는 극소수이고 창립된지 십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한국테라와다불교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사에서 크게 기성불교와 차별화 됩니다. 부처님이 입었던 가사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만 해도 부처님 방식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잘 안되는 것이 아마 탁발일 것입니다.

 

4 15일 한국테라와다불교 서울법회에서는 간이 탁발을 했습니다. 신도들이 정성껏 준비해온 보시물을 빅쿠에게 공양올리는 것을 말합니다. 빅쿠는 바루를 앞에 두고 앉아 있습니다. 신도들은 줄을 서서 가져 온 보시물을 바루 위에 올려 놓습니다. 무릎을 꿇고 합장하며 보시물을 빅쿠에게 공양올립니다.

 

 

 

 

 

 

 

이날 씨디를 준비했습니다. 늘 준비하는 보시물입니다. 두 종류의 씨디 각각 20개를 보시했습니다. 옆에서 도이법사님이 나직하게 필명을 삼장법사님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삼장법사님은 알아 본 것 같습니다. 미디어붓다에 같은 필진으로 활동하는 인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동안 블로그에 쓴 글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승보개념에 대하여

 

탁발이 끝나고 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테라와다 예불의식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나모땃사 바가와또로 시작되는 예경문을 낭송했습니다. 이어서 오계를 낭송했습니다.

 

이제 빠알리 예경문은 익숙합니다. 니까야강독모임에서도 예경문과 삼귀의문, 그리고 오계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낭송하기 때문입니다. 불과 몇 년 만에 이런 분위기는 급격하게 확산되는 듯 합니다. 크고 작은 니까야강독모임에서 빠알리 예경의식은 이제 필수가 된 것 같습니다.

 

한국불교에서 빠알리예경은 아직까지 생소합니다. 그렇다면 빠일리예경은 한국불교의식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아마 가장 큰 차이 두 가지를 들라면 삼귀의문과 오계일 것입니다. 먼저 삼귀의문입니다.

 

한국불교에서 삼귀의문은 한글삼귀의문이라 하여 노래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크게 문제 되고 있는 것이 승보개념에 대한 것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승보에 대하여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 합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고쳐지지 않습니다. 아니 바로 잡을 의향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명백히 부처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임에도 틀린 것을 바로 잡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기득권문제라 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스님을 승보위치로 격상시켜 놓았습니다. 스님을 부처님과 동급으로 만들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뜻있는 재가자들, 학자들, 심지어 스님들까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로잡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리모델링재건축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국불교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문제가 너무 많아서 점차 쇠퇴해가고 있습니다. 한국불교의 모순과 위선과 거짓으로 인하여 불자수가 3백만명이 줄어들고 개신교에게 1위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가르침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율장정신을 유지하려 한다면 삼귀의에서 승보문제는 해결되리라 봅니다.

 

승보문제 해결없이는 불교개혁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한국불교개혁은 승보개념의 확립에서 시작됩니다. 승보개념을 고치지 않고 개혁하려 한다면 신장개업이나 리모델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승보개념을 바꾼다면 혁명적입니다.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는 재건축과 같은 혁명적 발상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한국불교에서 리모델링은 가능하지만 재건축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스님들의 기득권 때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출가한 스님들이 세속에서나 가능한 기득권을 쥐고 있을 때 스님들은 승보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한 한국테라와다불교에서는 승보개념은 당연히 승가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빠알리예불에서 상강사라낭갓차미라 합니다. 그것도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두띠얌삐 상강사라낭갓차미” “따띠얌삐 상강사라낭갓차미라 하여 삼세번합니다.

 

오계에 대하여

 

한국테라와다불교와 한국기성불교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오계입니다. 한국불교의 법회의식에서는 오계를 하지 않습니다. 수계할 때나 한번 할까 법회에서 오계낭송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 오계준수맹세는 필수입니다.

 

한국불교스님들은 계를 잘 지키지 않습니다. 아마 불교전통이 달라서일 것입니다. 특히 개차법이라 하여 상황에 따라 계를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계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스님들의 계행이 바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출가자로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하는 것도 계행에 인식부족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국불교 예불의식에서 오계를 볼 수 없습니다. 설령 오계를 낭송한다고 해도 하지말라는 식으로 되어 있어서 지키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음주계의 경우 술마시지말라가 됩니다. 술을 한방울이라도 마시면 불음주계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일까 수계식 이후로 오계를 낭송하지 않을뿐더러 개차법이라 하여 상황에 따라 어겨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테라와다불교 예불의식에서 오계는 필수입니다. 니까야강독모임 공부방에서도 오계를 낭송합니다. 이렇게 오계를 낭송하는 것은 오계가 학습계율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지녀야 하는 계율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지말라가 아니라 삼간다는 말이 들어갑니다. 불음주계를 예로 든다면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 veramaī sikkhāpada samādiyāmi.”라 합니다. 이를 해석하면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나이다.”가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삼간다(veramaī)는 말과 학습계율 (sikkhāpada)입니다.

 

학습계율은 평생지키려고 노력하는 계율입니다. 비록 어떤 사정으로 이번에 지키지 못했다면 참회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 하여 아예 지키지 않는다든가 상황에 따라 계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맞지 않습니다. 테라와다불교 예불의식에서의 오계는 초기경전 그대로,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입니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평생노력하며 살겠다는 부처님제자로서의 약속입니다

 

아름다운 법문의 조건은

 

삼장법사님의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특히 유튜브에 올려진 법문을 새벽에 들으면 좋습니다. 부드럽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법문입니다. 여러 번 들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이는 법사로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매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 법문은 진리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법사의 수행담을 곁들인다면 금상첨화입니다. 그렇다면 매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 목소리의 조건은 어떤 것일까요?

 

초기경전에 구관조비유가 있습니다. 방기사존자가 사리뿟따의 법문을 듣고 “그 때 존자 싸리뿟따는 수행승들을 우아하고 유창하고 명료하고 뜻을 전달하는 법문으로 교화하고 북돋우고 고무시키고 기쁘게 했다.(S8.6) 라 했습니다. 목소리가 아름다운 것도 훌륭한 법사의 조건중의 하나입니다. 경에서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습니다.

 

 

존자 고따마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여덟 가지 요소를 갖춥니다. 또렷하고, 명료하고, 감미롭고, 듣기 좋고, 청아하고, 음조 있고, 심오하고, 낭랑합니다. 그러나 존자 고따마의 목소리는 청중이 있는 곳까지 알려지지만, 그 목소리가 청중을 떠나서까지 퍼져가지는 않습니다.” (M91, 전재성님역)

 

 

좋은 목소리의 조건으로서 경에서는 여덟 가지를 말합니다. 마치 구관조소리 같은 목소리입니다. 목소리가 아름다우면 소리가 마치 빛과 같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설법할 때 목소리가 빛처럼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밝고 명료한 가르침입니다.

 

가르침을 듣고, 가르침을 기억하고

 

이번 법회에서 삼장법사는 택법각지에 대하여 설했습니다. 법문을 시작하기 전에 12페이지 분량의 프린트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프린트물에 근거하여 법문한 것입니다. 경전에 근거하고 수행체험에 근거한 법문입니다. 이런 법문은 한국불교 스님들과 비교됩니다.

 

법문을 들을 때 늘 필기구를 준비합니다. 받아 적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모임이나 행사에 가면 반드시 후기를 남깁니다. 법문이나 공부모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스님들이 법문했을 때 대부분 받아 적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전에 근거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신도들에게 들은 이야기, 신문이나 방송에서 본 것 등입니다. 또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신변잡담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받아 적을 것이 없습니다.

 

잘 준비된 법문은 들을만합니다. 무엇보다 받아 적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삼장법사는 나지막한 목소리라 택법각지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받아 적은 것을 보니 고를 모르면 열반에 이를 수 없다.”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이런 말은 전재성박사의 니까야 강독모임에서도 들었습니다. 전재성박사는 일체의 괴로움을 아는 자만이 열반을 본다.”라 했습니다. 초전법륜경에 나오는 말이라 합니다. 괴로움에 대하여 완전히 알았을 때 명지가 생겨나는 것을 두고 한말입니다.

 

삼장법사는 수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열심히 받아 적기 바빴습니다. 한번 듣는 것으로 그친다면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들은 것을 사유해야 합니다. 사유한 것을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뿐니야여, 수행승이 믿음을 갖추었고 , 찾아 와서, 가까이 앉아, 질문하고,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가르침을 기억하고, 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고, 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한다면, 여래가 기꺼이 설한다. 뿐니야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원리를 갖출 때, 오로지 여래가 가르침을 기꺼이 설한다.(A9.82, 전재성님역)

 

 

부처님당시에는 오로지 듣는 것에 의지했습니다. 한번 놓치면 다시는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잘 귀 기울여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필기구가 없기 때문에 들은 것을 잘 기억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한번 듣고 흘려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삼장법사

 

처음으로 삼장법사를 친견했습니다. 그러나 씨디공양할 때 잠시 눈 한번 마주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만나면 구면(舊面)’이 될 것입니다. 수행자로서 삼장법사는 얼굴이 맑고 온화했습니다. 나지막이 말을 건넸을 때 자비로워 보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빠알리 삼장법사입니다.

 

삼장법사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율장, 경장, 논장에 통달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현장스님을 삼장법사라 합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는 삼장법사라는 칭호를 부여 받은 빅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 , 론에 통달한 삼장법사는 어떤능력이 있을까요?

 

지난 2014년 특별한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법회에서 순다라빅쿠의 삼장법사의 암송능력을 확인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삼장법사 순다라빅쿠의 암송능력, 특별한 법회에 참가하고(2014-06-1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삼장법사가 있습니다. 빤냐와로 삼장법사입니다. 테라와다 빅쿠로서 태국에서 삼장법사의 지위를 부여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 아마 대한민국에서 가장 법문을 잘 하는 스님같습니다. 유튜브에 20170415am_택법각지 마무리라는 제목으로 올려져 있습니다.

 

담마를 말할 수 있는 빅쿠

 

상윳따니까야 청원의 경에 따르면 부처님법은 심오하여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S6.1)라 했습니다. 깨달은 자가 아니면 알 수 없음을 말합니다. 하물며 중생들은 더욱더 알아 듣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분이 부처님입니다. 말이나 문자로 설명하기 힘든 진리에 대하여 중생들이 이해하여 깨닫기 쉽도록 정리해서 설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벽지불이 있습니다. 벽지불도 부처님과 똑같이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벽지불은 설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심오한 진리를 말로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똑 같은 부처라도 석가모니 부처님은 법을 펼쳤습니다. 알기 어려운 심오한 진리의 깊은 뜻을 담마를 통해서 설법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담마를 설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벽지불과 삼마삼붓다로 구별됩니다.

 

부처님은 부처님이 깨달은 바르고 원만하고 위없는 진리를 담마로 설했습니다. 그런 가르침이 오늘날 빠알리삼장형태로 전승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법을 설할 수 있는 빅쿠는 드문 것 같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세상과 인연끊고 평생 도를 닦았지만 중생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설법할 수 있는 도인은 매우 적습니다. 마치 벽지불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담마를 말할 수 있는 빅쿠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삼장법사도 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2017-04-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