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경청할 줄 아는 자가 자비로운 자
스마트폰 세상 입니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세상을 손바닥처럼 알 수 있고 또한 세상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비록 한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사이버세상에서 언제든지 볼 수 있습니다. 유튜브로 보는 ‘현웅스님’ 법문도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돈암동으로
토요일 아침 돈암동으로 향했습니다. 현웅스님이 살고 있는 ‘육조사’입니다. 명학역에서 전철을 타고 동묘역에서 내렸습니다. 인터넷 지도 ‘길찾기’로 보니 마을버스 1014번을 타면 여섯 정거장 거리에 있습니다. 흥천사정거장에서 내렸습니다. 인터넷지도만 보고 찾아 갔습니다.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토요일 아침 일찍 찾아 갔습니다. 9시에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절에서는 모든 것이 세상사람들 보다 빠르게 시작 되므로 이른 시간에 찾아 간 것입니다. 그러나 10분 가량 늦게 도착했습니다. 초행길은 늘 변수가 있습니다.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약속을 어기게 됩니다.
약속지키는 것 그거 하나만 봐도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비즈니스의 출발점은 약속 지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기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출발 했음에도 약속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스님이야기
스님은 반갑게 맞이 해 주었습니다. 스님은 이미 두 차례 뵌 바 있습니다. 한번은 작년 ‘마지’에서, 또 한번은 최근 ‘시민청 공청회’에서 입니다. 이번이 세 번째 이므로 확실히 구면이라 볼 수 있습니다.
스님을 찾아 가게 된 동기는 그냥 한번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유튜브법문을 듣다 보니 친숙하게 된 것이 이유입니다. 선불교에 대한 법문이지만, 법문 도중에 세상 돌아 가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재미있습니다. 더구나 스님이 출가한 이야기, 승가이야기, 스님들 이야기 등을 들으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됩니다.
불자들은 스님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불자들이 스님을 만나면 늘 하는 이야기가 “스님은 왜 출가하셨어요?”라 합니다. 이런 불자들의 관심사를 반영해서일까 해인사 현진스님은 ‘스님이야기’라는 컬럼을 썼고 나중에 책으로도 출간한 바 있습니다.
불자들은 스님들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불자들이 접하는 스님들,특히 고승들에 대한 이야기는 신비화 내지 신화화 되어 있습니다. 불리한 이야기는 빼 버리고 좋은 이야기로만 포장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후대 제자들이 스님을 추모하는 법회를 개최하고 책을 내는 것도 신비화 내지 신화화 작업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알려거든
현웅스님의 유튜브법문을 들어 보면 소위 고승이라 불리우는 신화는 여지 없이 무너집니다. 스님이 직접 경험한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같이 살아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사람을 알 수 있는 네 가지 원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그들이 계행을 지키는지는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S3.11)라 했습니다.
그 사람이 계행이 있는지 알려면 같이 살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연애시절이 다르고 결혼시절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계행의 은폐성’에 따른 것입니다.
함께 살아 보면 장점뿐만 단점도 드러납니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착하게 생긴 도반이라도 6개월만 같이 생활하면 더 이상 살 수 없을 정도로 단점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유명 고승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불자들은 유명고승들에 대하여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은 화장실에도 가지 않은 사람처럼 여기듯이, 고승들은 이슬만 먹고 사는 것처럼 완벽한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웅스님의 유튜브법문을 들으면 무너집니다. 불자들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유명 고승은 불같이 화를 내고 심지어 폭력을 휘두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미지에 속아 넘어 간 것 같습니다.
스님의 방에서
현웅스님은 스님의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1층에 있는데 스님이 거주 하는 공간이자 다실이자 집필실입니다. 세 가지 용도를 가진 스님의 방은 은은합니다. 네 벽에는 황토가 칠해져 있어서 토굴에 들어 온 듯합니다. 너른 창에는 창호지가 발라져 있어서 자연채광입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는 주택형 절이지만 조용하고 은은한 분위기가 심산유곡에 와 있는 듯 고요합니다.
창호를 통한 자연채광만 비치는 다실에서 스님과 마주 했습니다. 창측을 등지고 앉은 스님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도심에 있지만 심산유곡의 토굴에 와 있는 듯한 은은한 분위기 입니다.
스님은 차를 따라 주면서 궁금한 것을 물어 봅니다. 학교는 어디 나왔는지, 고향은 어디인지, 가족관계는 어떤지 등에 물어 보았습니다. 누구나 갖는 관심사일 것입니다. 9시 10분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12시 20분이 될 때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반나절을 함께 보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만 잘 하면
스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글을 쓸 때 자신의 일상을 시간대별로 모두 기록한 다면 지루해서 읽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 그날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 하나만 쓰면 됩니다. 스님과 무려 3시간 동안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글쓰기의 대상일 것입니다.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주로 경청하려고 노력합니다. 말을 많이 하기 보다는 잘 들으려고 하는 자세를 취했을 때 대화는 진지해 집니다. 그런데 현웅스님과 대화하다 보니 말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글쓰기’입니다.
현웅스님은 글쓰기에 대하여 좋은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추켜 세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격려 해 주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질과 능력을 계발하면 근원적인 것과 상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신성과 불성으로 설명했습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살다 온 스님에 따르면 요즘 서경강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과 같은 혼탁한 시절에 정치인들이 서경과 같은 책을 접한다면 ‘성인정치’를 할 것이라 합니다. 정치를 잘 하려면 공부해야 함을 말합니다. 어느 한 분야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부를 말합니다. 동양사상 뿐만 아니라 서양사상도 알아야 함을 말합니다. 두루두루 알았을 때 중용 또는 중도의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라 합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만 잘 하면 나머지도 잘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마치 영어나 수학을 잘 하는 학생이 자연이나 지리 등을 잘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한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면 나머지도 자연스럽게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합니다. 돈벌기를 예로 든다면 돈을 벌고 싶다고 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는 분야에서 일인자가 되면 돈은 자연스럽게이 벌리는 것이라 합니다. 스님도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하다 보니 부수적으로 얻어진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육조사를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강렬한 이미지
스님은 처음 본 사람에게 마치 오래 본 사람처럼 스스럼 없이 대해 주었습니다. 그런 스님의 첫인상은 매우 강렬했습니다. 작년 마지에서 행사가 있을 때 마을버스를 탔는데 그때 당시 본 스님은 주위를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습니다. 목이 꼿꼿하고 눈매가 매우 날카로워서 영화에서 보는 보스를 연상케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대화해 보니 부드럽습니다.
스님은 젊었을 때 매우 강렬한 이미지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미지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노래를 배우고 악기를 다루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비보’라 볼 수 있습니다. 큰 바위산이 있는 사찰의 경우 바위에서 넘쳐 나는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탑을 세우는 것도 일종의 비보성격입니다. 스님의 강렬한 인상을 성악으로 누르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악을 전공했는데
스님과 3시간 동안 이야기하면서 많은 노래를 들었습니다. 출가하기 전부터 노래를 잘 했다고 하는 스님의 노래솜씨는 수준급입니다. 유튜브법문에서도 종종 노래를 부르는데 보통노래가 아닙니다. 성악입니다. 가수가 아니라 성악가라 볼 수 있습니다. 스님은 실제로 미국에 있을 때 성악을 전공했다고 합니다.
스님이 미국에 있을 때 선을 지도하면서 동시에 성악을 배웠다고 합니다. 영어도 배울 겸 성악학교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성악을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사카페에 들어가 보면 스님 소개란에는 ‘성악가’로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스님은 스님이자 동시에 성악가이기도 합니다. 성악가는 가수와 다릅니다. 악보를 볼 줄 알고 악보에 따라 노래를 부릅니다. 차담 하면서 여러 곡을 불렀는데 그 중에 하나가 프랑스어로 된 성악이 있습니다. 이 노래에 대하여 일종의 ‘오도송’과 같은 것이라 합니다. 서양에서는 깨달음에 대한 것을 음악으로 만든 것입니다. 표현만 다를 뿐이지 본질은 같은 것이라 합니다.
노래 하는 것에 대하여
선수행자이자 동시에 성악가이기도 한 현웅스님은 이야기 도중에 여러 곡을 불렀습니다. 노래를 들어 보니 수준급입니다. 직접들으니 유튜브에서 듣는 것과 맛이 다릅니다. 고요하고 은은한 방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는 듣기에도 편안하고 부담이 없습니다. 고음불가로서 노래방 가면 고역인 자에게 있어서 한없이 부럽기만 합니다. 그런데 노래를 제대로 배우기만 누구나 잘 부를 수 있다고 합니다.
초기불교에서는 노래 부르는 것에 대하여 악작(惡作)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율장소품에 따르면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길게 끄는 가락에 맞추어 가르침을 노래해서는 안된다.”(Vin.II.108) 라 했습니다. 이는 수행승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암송하는데 있어서 길게 끄는 가락에 맞추어, 즉 노래로 만들어 외웠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고서 사람들이 비난하자 부처님은 새로운 계율을 만든 것입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것에 대하여 경계했습니다. 율장소품에 따르면 “1) 자기가 그 음성에 집착하고, 2) 다른 사람이 그 음성에 집착하고, 3) 재가자들이 비난하고, 4) 음조를 추구하여 삼매를 방해하고, 5) 후인들이 사견의 길에 떨어지는 것이다.” (Vin.II.108) 라 하여 다섯 가지 위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노래하는 스님들이 종종 있습니다. 가수스님이라 합니다. 음반을 내고 초청 받은 곳에서는 노래를 합니다. 본업 보다는 부업에 더 열중한 듯합니다. 노래로 더 알려진 스님이어서 가수스님이라 볼 수 있습니다.
노래 하는 가수스님들의 노래를 들어 보면 유행가나 대중음악이 대부분입니다. 노래하는 것이 수행하기 위한 방편이고 또한 대중교화를 위한 방편이라 하지만 본업 보다는 부업에 더 열중하는 모습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율장소품에 따르면 부처님은 가르침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것에 대하여 악작, 즉 나쁜행위라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스님들이 노래하는 것은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수범수제(隨犯隨制)
율장을 보면 매우 소소한 것도 계율로서 정해 놓았습니다. 너무 세세해서일까 전재성박사가 번역해 놓은 빠알리율장인 율장대품, 율장소품, 율장비구계, 율장비구니계를 보면 매우 방대합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소소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아마 이런 계율을 현재를 살고 있는 스님들에게 적용한다면 비난 받지 않을 스님은 아마 단 한명도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 때 소소한 계율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계율이라는 것이 ‘수범수제(隨犯隨制)’라 하여 누군가 비난했을 때 그때 그때 ‘케이스 바이 케이스’ 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방대해졌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에 들 때 “아난다여, 내가 간 뒤에 승단은 원한다면 사소한 학습계율은 폐기해도 좋다.”(D16.123) 라 했습니다. 이 말은 주석에 따르면 “세존께서 폐기하라고 말씀하시더라도 결집시에 장로(마하 깟싸빠)는 폐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이기 때문이다.”(Smv.592) 라고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래서일까 방대한 빠일리 율장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왔는지 모릅니다.
자기계발 수단이라면
방대한 빠알리 율장에 실려 있는 소소한 계율은 오늘날 시대 상황과 맞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조계종에서는 새로운 청규를 만들어 배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이 “승단은 원한다면 사소한 학습계율은 폐기해도 좋다.”라 한 것을 수용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장정신만큼은 지켜야 할 것입니다. 율장에 쓰여 있는 내용이 시대와 맞지 않더라도 그 정신만은 계승해야 함을 말합니다.
스님들이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할 수 있습니다. 삼매에만 방해 되지 않는다면, 수행에 방해 되지 않는다면, 또 한편으로 중생을 교화 하는 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유불급이라 해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탈이 납니다. 스님들이 노래와 악기를 본업으로 삼아 버리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디 까지나 본업인 수행과 중생교화에 충실하면서 자기계발을 수단으로서 음악을 한다면 문제 없을 것입니다. 현웅스님의 경우 후자에 해당 될 것입니다.
탄생의 기쁨과 환희를
당대의 선지식 현웅스님을 만났습니다. 국내 보다는 외국에서 오래 활동 했기 때문에 외국에서 널리 알려진 선사는 음악의 대가입니다. 그렇다고 가수스님과는 다른 성악가스님입니다. 성악학교에서 정식으로 오페라 등 성악을 배웠기 때문에 ‘테너스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님은 틈만 노래를 부릅니다. 주로 오페라중에 아리아입니다. 불어, 이태리어 등으로 부르는 아리아를 들으면 마음이 맑아 지는 것 같습니다. 가수들이 사랑타령, 이별타령 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마치 조수미의 성악을 들으면 마음이 순화 되는 것처럼 스님이 부르는 음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님은 부처님 탄생과 관련한 음악을 만들 것이라 합니다. 일종의 오페라 형식이라 합니다. 탄생의 기쁨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맛지마니까야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M123)’에 따르면 보살이 입태할 때와 보살이 탄생할 때 “일만 세계가 흔들리고 동요하고 격동하면서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M123)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초전법륜경(S56.11)에서 꼰단냐에게 지혜의 눈이 생겨났을 때도 똑같이 묘사 되어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탄생이 실로 엄청난 우주적 사건임을 말합니다. 스님은 보살의 탄생의 기쁨과 환희를 웅장한 오케스트라로 구현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연채광으로 인하여
스님과 3시간에 걸쳐서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자리를 일어 서려 할 때 스님은 육조사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마치 순례법회 가면 절 소개를 하듯이 이곳저곳 보여 줍니다.
육조사는 돈암동 산비탈에 있습니다. 그래서 전망이 좋습니다. 3층으로 되어 있는 일반주택을 도량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1층에는 스님의 거주공간 겸 다실 겸 집필실이 있습니다. 황토방과 창호로 되어 있어서 자연채광으로 인하여 은은한 느낌입니다.
2층 법당에는
2층에는 법당이 있습니다. 유튜브동영상에서 본 법당입니다. 법당은 넓직합니다. 최대 칠팔십명은 들어 갈 것 같습니다. 중앙에 불상만 있을 뿐 탱화나 연등 등 절에서 볼수 있는 것들이 일체 보이지 않습니다. 한쪽 벽면에는 육조 혜능스님의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통유리 저 너머에
3층으로 올라 가 보았습니다. 아마 육조사에서 가장 멋진 장소라 보여집니다. 둥그런 방은 다실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방에는 화목보일러가 있어서 운치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압권은 서울의 도심풍경을 보는 것입니다. 온통 통유리로 되어 있는 창 저 너머에 도시의 실루엣이 펼쳐져 있습니다. 밤에 본다면 야경이 볼만할 것 같습니다.
스님은 원형의 다실을 소개하면서 시간 되면 하루 밤 이곳에 묵어 가라고 합니다.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심산유곡의 산사도 좋지만 도심의 사찰에서 도시의 야경을 보면서 하루 밤 보내는 것도 운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웅스님은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오전 한나절을 스님과 함께 이야기하며 보냈습니다. 일어설 때 되자 스님은 책을 하나 선물했습니다. 스님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쓴 것입니다. 책의 제목은 ‘묻지 않는 질문’이고 부제는 ‘자네는 나를 속였네’입니다. 책을 열면 안쪽 표지에 스님의 이력이 간단히 소개 되어 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석현웅스님은 나이 20에 송광사 구산스님 문하로 출가했다. 수행의 기초를 은사이신 구산선사로부터 익히고 여러 해를 제방 선원에서 정진했다. 인천 용화사 선원을 거쳐 대중선방생활을 뒤로 하고 산중 토굴에 들어가 6년 간을 지낸 뒤 84년 스위스 제네바 불승사로부터 초청을 받고 서양인에게 한국 선불교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86년에 북미로 건너가 시애틀에 돈오선원과 버클리에 육조사를 창건하고 지금은 육조사 선원에서 정진하며 외국인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스님은 유튜브동영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매주 일요법문을 유튜브에 올려 놓아서 전세계인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지 시청할 수 있습니다. 법문 뿐만 아니라 세상 돌아 가는 이야기, 한국불교이야기 등을 들으면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됩니다.
만남을 요청했을 때
글을 쓰다 보면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나서 차나 한잔 하자는 사람사람부터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본인 공부가 덜 되었습니다.”라며 거절합니다.
사실 사람 만나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습니다. 회사에서 개발자로 일할 때 부품 업체들이 만나자고 할 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부품 승인을 목적으로 만나자고 합니다. 거절 할 수도 없어서 만나지만 건성건성 답하면서 커피 한잔 내주고 빨리 가 주기만을 바랐던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많은 시간이 빼앗깁니다. 그래서 가급적 만나지 않으려 합니다. 어찌 보면 대단히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이기적으로 살아 갑니다. 이익이 되면 적극적으로 덤벼 들고 손해 되는 일을 절대 하려 하지 않습니다. 움직이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 돈 낭비, 정력 낭비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만남을 요청했을 때 만나 주는 것은 ‘자비의 마음’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사람들은 할 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들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특히 노인이 그렇습니다. 어느 봉사자에 따르면 노인과 전화 통화 했는데 들어 주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합니다. 한번 말을 하면 한 두 시간은 보통이라 합니다. 빨리 끝내고 싶지만 계속 되는 말에 차마 그만하자고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노인이 얼마나 외로웠으면, 얼마나 말할 상대가 없었으면 그랬을까라며 안타까워 합니다.
노인들은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하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어 몸이 기능이 약화 됨에 따라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분노하고, 자식이 무시해서 분노하고, 가진 것이 없이 가난하게 사는 것에 분노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참지 못하는 것은 외로움이라 합니다. 그래서 아무나 붙잡고 말을 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이럴 때 잘 들어 주면 매우 고마워한다고 합니다.
남의 말을 잘 경청한다는 것은 대단히 자비로운 행위입니다. 만일 자비가 없다면 만나 주지도 않고 말을 들어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잘 경청할 줄 아는 자는 자비로운 자입니다. 관세음보살과 같은 사람입니다.
스님의 자비에 감사를
연꽃은 진흙탕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꽃은 진흙탕에 물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보살은 사바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바세계에 물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 라 했습니다.
보살은 중생들의 비명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중생이 부르면 어디든지 달려 가고, 중생이 만나고자 하면 언제든지 만나 줍니다. 보살은 중생의 말을 잘 들어 줍니다. 잘 경청할 줄 아는 자가 보살입니다. 말을 잘 들어 준다는 것은 자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 곳에서 온 보통불자의 말을 현웅스님은 잘 들어 주었습니다. 스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2017-03-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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