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수행은 원한 맺힌 자부터
돈 떼 먹고 달아난 자들
일을 하고서도 돈을 못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제까지 못 받은 돈이 상당한 금액에 달합니다. 그렇다고 수 억원이 아닙니다. 사업을 시작한지 12년 동안 떼인 돈이 천만원이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돈을 떼어 먹은 자들을 거의 대부분 다 기억 합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따르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잊어 버릴 수 있어도 자신의 돈을 떼어 먹고 달아난 자를 평생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적은 금액의 돈이라도 내 돈을 갚지 않은 자를 평생동안 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업체가 조짐이 좋지 않습니다. 자재까지 사서 일을 해 주었음에도 결재 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느낌은 거의 적중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물릴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갑니다. 사실 사업을 하다 보면 돈 떼이는 것은 늘 있는 일입니다. 세상에 사람의 얼굴 다르고, 사람의 성향 다르듯이 사업을 하는 자들의 성향 또한 갖가지입니다. 양심적 사업가가 있는가 하면 불량한 마음을 가진 자도 있습니다. 한번 떼어 먹기로 마음 먹은 자에게 걸리면 어찌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빨리 떨쳐 버리냐는 것입니다.
떨쳐 버려야
돈 떼 먹고 달아난 자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라는 말이 있듯이 오래 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음에도 문득문득 떠 오를 때 마다 불편하고 불쾌하고 때로는 분노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성내는 마음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으로 악업에 해당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럼에도 과거의 일로 악업을 짓는다면 나만 손해일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떨쳐 버려야 합니다. 이미 오래 전에 지난 일입니다. 문득문득 떠 오를 때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분노의 마음을 갖는다면 확실하게 나만 손해입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돈 떼먹고 달아난 자는 이중으로 죄업을 짓게 됩니다. 돈을 갚지 못해서 죄를 지은 것이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쾌와 분노를 유발하게 해서 죄를 짓게 됩니다.
왜 제명대로 못사는가?
돈 떼먹고 달아난 자가 잘 살 리가 없습니다. 대게 비참하게 일생을 마감할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 금액이 크면 클수록 더욱 더 비참하게 살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상대방의 시간을 빼앗아 갔기 때문입니다. 그 금액만큼 일한 시간을 말합니다.
한달 작업한 분량의 금액을 갚지 않았다면 그는 나의 한달에 해당하는 시간을 훔쳐 간 것입니다. 나의 한달이라는 시간을 가져 갔다면 그의 수명은 한달이 단축될 것입니다. 만약 1년 일한 분량의 금액을 갚지 않았다면 그의 수명은 1년이 단축될 것입니다. 한명이 아니라 10명에 해당되는 금액을 갚지 않았다면 수명이 10년 단축될지 모릅니다. 돈을 갚지 않았다는 것은 남의 시간을 가로 챈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돈을 떼먹은 자는 제명대로 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지난 일인데
이미 지난 일은 깨끗이 잊어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잊어 버리지 않고 마음 한켠에 지니고 있다면 한이 될 것입니다. 그 한이 크면 클수록 한 많은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한이 지나치면 ‘화’가 됩니다. 화가 지나치면 ‘화병’이 됩니다. 분노로 일생을 살아 간다면 자신만 손해입니다. 탐, 진, 치를 삼독이라 하는데 과거의 일로 인하여 분노하고 후회하고 회한에 젖어 산다면 분명히 악업을 짓는 것이 됩니다.
돈을 떼먹고 달아난 자로 인하여 이중으로 고통받습니다. 받을 돈을 못 받아서 금전적 손실로 인한 고통이 하나 있고, 불편하고 불쾌하고 분노의 마음을 가져서 악업을 지어서 고통받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과거의 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벗어 날 수 있을까?
첫 번째 방법은 이익 보았을 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면서 뜻 밖에 이득을 본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연락이 와서 쉽게 돈이 생긴 것을 말합니다. 또 일을 하는데 술술 잘 풀려서 거져 먹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기억 나지 않습니다. 못 받은 돈이나 떼인 돈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지만 쉽게 번 돈은 쉽게 잊어 버립니다. 떼인 돈으로 인하여 분노의 마음이 일어나면 쉽게 번 돈을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빚 갚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떼인 돈에 대하여 어느 생에서인가 빚진 것이 있어서라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은 전생 어느 때 저지른 행위가 조건을 만나 과보가 익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업이숙(kamma-vipaka)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논리를 지나치게 확대하면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숙명론이 됩니다. 그러나 업과 업의 작용을 인정하는 불교에서 이전 생의 행위에 대한 과보로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방법은 봉사하는 자들을 떠 올리는 것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무주상보시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백만원, 또 어떤 이는 이백만원, 또 어떤 이는 삼백만원을 봉사단체에 보시합니다. 업과 업의 작용을 믿지 않는 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미친 짓일 것입니다. 단멸론을 가진 자들은 “보시는 바보나 하는 짓이다.”라고 여깁니다. 떼인 돈에 대하여 아무 조건 없이 무주상보시로 생각한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이 더
그 업체가 결재를 할지 안할지 알 수 없습니다. 거래가 이루어지면 당연히 결재를 해야 함에도 이렇게 노심초사하는 것은 그간의 행태로 보아 사기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업체 사장이 업과 업의 작용을 믿는 ‘작론자’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갚으려 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양심적인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거래를 하면 대부분 결재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양심불량인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며 사는 자들을 말합니다. 업과 업의 과보를 믿지 않는 단멸론자이기 쉽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분노해 보았자 악업만 쌓이게 됩니다. 그들에게 분노의 마음을 갖기 보다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어떻게 연민의 마음을 내는가?
연민을 빠알리어로 까루나(karuṇā)라 합니다. 영어로는 ‘compassion; pity’의 뜻입니다. 측은지심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연민은 자애, 기쁨, 평정과 함께 네 가지 거룩한 마음 중의 하나입니다. 청정도론에 연민수행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볼품없고, 고난에 빠져있고, 고통에 빠져있고, 불운이 닥쳤고, 거지 신세이고, 손발이 잘렸고, 걸식할 밥그릇을 앞에 놓은 채 빈민 구제소에 앉아있고, 손발에 구더기가 끊고, 신음하는 어떤 불쌍한 사람을 보고 ‘이 중생이 고난에 빠져있구나,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하고 연민을 일으켜야 한다.”(Vism.9.78, 대림스님역)
연민수행의 핵심은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입니다. 지금 원한 맺힌 자가 있다면 분노의 마음을 내기 보다는 그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죄를 지은 사람이 비록 행복해보일지라도 그를 사형선고 받은 사람에 비유하여 연민을 일으켜야 한다.” (Vism.9.78)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형수의 비유
죄를 짓고도 잘 먹고 잘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죄업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업이 조건을 만났을 때 언제든지 불행으로 전환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사형선고 받은 사람을 보는 것처럼 연민의 마음을 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 가는 자도 밥은 먹어야 할 것입니다. 사형장에 끌려 가기 전에 진수성찬을 차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잘 먹으라는 것입니다. 좋은 옷도 입혀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호사를 시켜 주지만 사형수는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딱딱한 음식과 부드러운 음식과 화환과 향수와 연고와 구장 잎을 준다. 비록 그가 그것들을 먹고 즐기면서 행복하고 향락을 누리는 것처럼 가지만 어느 누구도 그가 행복하고 향락을 누린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이 가련한 사람은 지금 죽을 것이다. 내딛는 발자국마다 죽음 곁으로 다가간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에게 연민을 느낀다.” (Vism.9.78, 대림스님역)
사형장으로 끌려 가는 사형수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죄업을 지은 자가 호사를 누려도 결국 형장에 끌려 가는 사형수와 같은 신세라 볼 수 있습니다.
분노의 마음 보다 연민의 마음을
내 돈 떼어 먹고 달아난 자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청정도론 연민수행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연민의 마음을 내라고 합니다.
“이 가련한 사람은 비록 지금은 행복하고 즐겁고 향락을 누리지만 [신 ․ 구 ․ 의] 세 가지 문 가운데 어느 하나를 통해서도 좋은 업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악처에서 큰 고통과 슬픔을 겪으리라.”(Vism.9.78, 대림스님역)
원한 맺힌 자에게 분노하기 보다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업을 지었기 때문에 반드시 그 과보가 익게 되면 악처에 떨어질 것이라 합니다. 마치 사형장에 끌려 가는 죄수처럼 악처에 떨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분노의 마음 보다 연민의 마음을 내라는 것입니다.
자애수행과 어떻게 다른가?
연민수행은 자애수행과 다릅니다. 자애수행의 경우 자기 자신부터 시작해서 가까운 사람, 먼 사람, 그리고 원한 맺힌 자 순으로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연민수행의 경우 정반대입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연민수행을 할 때 “제일 먼저 좋아 하는 사람 등에 대해서 시작해서는 절대 안된다.” (Vism.9.77)라 했습니다. 연민수행은 원한 맺힌 자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원한 맺힌 자부터 시작해서 고통에 빠진 자, 그 다음에 좋아하는 사람, 그 다음에 자기자신 순으로 연민의 마음을 내야합니다.
연민수행은 원한 맺힌 자부터
하루 대부분 시간을 일터에서 보냅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고 악의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결재를 하지 못하는 경우는 언젠가는 반드시 결재 합니다.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업과 업의 과보를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악의적으로 떼어 먹는 자입니다.
악의적로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는 업과 업의 작용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무주상보시하는 자들에게 “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라고 믿는 자들일 것입니다. 업과 업의 과보를 모르기 때문에 돈을 떼어 먹어도 전혀 거리낌 없이 살아 갑니다. 오히려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업과 업의 작용이 진실이기 때문에 반드시 과보를 받습니다.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지금 행복을 누리고 있을지라도 형장에 끌려 가게될 사형수와 같습니다. 지은 악업으로 인하여 악처에 떨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부처님은 그들에게 분노하기 보다 연민의 마음을 내라고 했습니다. 사무량심 중에 연민의 마음은 원한 맺힌 자가 가장 큰 대상입니다.
2017-03-0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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