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 능력껏 보시하고 아는 만큼 알려 주자
늘 도움을 받고 살았는데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었을 겁니다. 그때 비가 왔습니다. 우산을 쓰고 왔는데 어머니가 “옆에 있는 친구와 같이 쓰고 오지 그랬냐”라 했습니다. 내 우산이니까 내가 쓰고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같은 동네 같은 반 친구가 있었지만 나홀로 쓰고 온 것입니다. 배려하거나 도와 준다는 개념이 전혀 없었을 때 입니다.
살아 오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약골이라 주변에서 많이 도와 주었습니다. 유년시절 동갑내기 사촌이 있습니다. 지금은 여자 목사로 활동 중에 있습니다. 사촌은 나 보다 더 크고 힘이 셌습니다. 생일도 한참 빨랐기 때문에 누나와 같았습니다. 시골에서 자랄 때 늘 옆에서 도와 주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다리를 다쳤습니다. 자전거를 타다 다리가 골절 된 것입니다. 거의 한달 가량 기브스를 하고 집에 있었습니다. 기브스를 풀자 다리가 굳어 걸어 다니기 힘들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때 어느 친구가 업어서 등교를 시켜 주었습니다. 그 친구 이름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 친구 이름은 ‘백창수’입니다.
약골로 태어나 약골로 자라서 도움만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도움을 받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가르침을 접하기 이전에는 도움을 준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물론 돈을 벌어서 가족을 부양하는 것도 돕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을 벗어나 아무 조건 없이 자비의 마음으로 돕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인색하게 산 것 같습니다.
얌체사랑
대부분 사람들은 계산적입니다. 그래서 주고받기에 능합니다. 내가 점심 한끼 대접 받았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을 해서 월급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일을 하면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은 전형적인 주고받기입니다. 그런데 주고받기는 거래의 기본이라는 사실입니다.
물건을 살 때 돈을 건네면 물건을 줍니다. 물론 물건을 받고 돈을 건네 주기도 합니다. 선불이든 후불이든 모든 거래는 주고받기식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도 주고받기식이 됩니다. 그래서일까 어떤 얌체는 “사랑을 한꺼번에 많이 주지 말라. 조금씩만 주어라. 많이 주면 버릇된다.”라 합니다.
사랑은 아무리 많이 주어도 줄어 들지 않습니다. 재물은 나누면 나눌수록 줄어 듭니다. 그러나 사랑은 아무리 많이 주어도 조금도 줄어 들지 않습니다. 사랑은 많이 주면 줄수록 오히려 더욱 늘어납니다. 그러나 얌체들은 사랑을 주는데 매우 인색합니다. 오늘 이만큼 주었으니 다음 번에는 또 이만큼 주는 식으로 계산적입니다. 찔끔찔끔 주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는 것처럼 인색하게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복리에 복리가 되는 것처럼
사랑은 주면 줄수록 커집니다. 무형이기 때문에 베풀면 베풀수록 더욱 더 커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보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고 나누면 나눌수록 공덕이 커집니다. 보시를 하면 자신의 호주머니 돈은 줄어 들지 몰라도 무형의 공덕은 증가합니다.
보시를 하면 할수록 마치 복리에 복리가 되는 것처럼 눈덩이처럼 증가합니다. 더구나 보시공덕을 회향하면, 즉 다른사람에게 돌리면 두 배가 됩니다. 보시공덕을 회향하면 공덕이 절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두 배가 됩니다. 무형의 보시공덕을 나누면 나눌수록 배가 되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있습니다.
어느 사회나 약자는 도움의 대상입니다. 만일 어린이나 노인, 여자 등 노약자들이 도움은커녕 학대 받는 세상이라면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상이나 다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부끄러움과 창피함, 또 다른 말로 양심과 수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에 대하여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 보니
지나온 삶을 되돌아 보니 참으로 인색하게 산 것 같습니다. 오로지 나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산 것 같습니다. 월급생활자로 살면서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 올 때 한번도 기부를 해 본적이 없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고 세금을 잘 내면 역할과 의무를 다 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종종 TV에서 기부천사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었습니다. 연말에 누군가 연탄이나 쌀을 돌렸다든가 하는 이야기 등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좋은 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 여긴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부나 보시는 꼭 여유 있는 자들만이 하는 것일까요?
보시는 능력껏
보시나 기부를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삶에 여유 있는 자들이 여유돈으로 불행한 이웃을 도와 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행관련 뉴스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린 것입니다. 나와는 무관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 보시에 대한 다음 구절을 보고 생각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능력에 따라 보시하고 또한 즐기면
비난받지 않고 하늘나라를 성취하리.” (S1.41,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능력에 따라 보시하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능력에 따라’에 해당되는 빠알리가 ‘yathānubhāvaṃ’입니다. 이 말은 ‘yathā+nubhāva’형태로서, ‘yathā’는 ‘as; like’의 뜻이고, ‘ānubhāva’는 ‘power; splendor’의 뜻입니다. 따라서 ‘yathānubhāva’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as fits his means’라 하여 ‘그의 수입에 적합하게’의 뜻으로 번역했습니다. 이를 전재성님은 ‘능력에 따라’라 번역했고, 각묵스님은 “능력껏’이라 번역했습니다.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입니다. 보시는 자신의 수입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보시하는데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자가 많은 금액을 보시한다고 하여 더 많은 공덕을 쌓는 것이고, 가난한 자가 조금 보시한다고 하여 공덕이 적게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에 따라 보시하는 것이라면 부자가 더 인색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자신의 수입에서 1%를 보시한다고 했을 때, 지금 월 일억을 버는 자는 백만원을 보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백만원을 버는 자가 십만원을 보시한다면 월 일억 버는자에 비하여 열배를 더 보시하는 셈이 됩니다. 가난한 자의 보시금은 십만원에 불과하고 부자는 백만원으로 커 보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의 보시공덕은 부자에 비하여 열배에 달합니다.
부자나 가난한자나 능력껏 보시하는데 있어서 평등합니다.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입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능력껏 보시는 데 있어서 금액의 많고 적음에 대한 공덕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양보하면 손해 베풀면 바보?
어떤 이는 능력에 비하여 과도하게 보시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생명까지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인색하게 살아 갑니다. 오로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한 삶입니다. 먹고 마시는 등 즐기는데 돈쓰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남에게 돈쓰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보시 한번 못해 보고 일생을 보내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 늘 얻어 먹고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고받기에 철저한 자들은 손해 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무상으로, 무주상으로 주는 것에 대하여 이해 하지 못합니다. 철저하게 ‘기브앤테이크(Give & Take)’입니다. 그들은 눈이나 귀 등으로 오욕락을 즐기는데는 열심이지만 남에게 주고 베풀고 나누는 것에는 인색한 자들입니다. 심지어 퍼 준다고 하여 비난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보시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들일 것입니다.
최근 인터넷신문에서 인상적인 제목을 보았습니다. 기사 제목은 “한국에선 양보하면 ‘손해’? 베풀면 ‘바보’?”입니다. 양보하면 손해이고 베풀면 바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다.”라 했습니다. 갈수록 삶이 팍팍해지고 생존경쟁이 심화되는 세상에서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사회현상이라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남에게 베풀고 보시하는 것 역시 바보나 하는 짓이라 여길 것입니다.
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
가르침에 따르면 보시공덕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가르침을 따르는 현자라면 보시공덕을 쌓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인색한 삶을 살아 갑니다. 심지어 잘못된 견해를 가진 자들, 특히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단멸론적 견해를 가진자들에게 있어서는 보시는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싸깜발린’의 견해에서 다음과 같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보시는 실로 어리석은 자들의 말이고, 사후의 존재를 설하는 사람들의 말은 오로지 공허한 거짓일 뿐이다. 어리석은 자이건 현명한 자이건 몸이 파괴되고 죽은 후에는 괴멸하여 사라져 존재하지 않게 된다.”(S24.49, 전재성님역)
부처님당시 육사외도 스승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은 단멸론을 주장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생각과 거의 유사합니다. 요즘 사람들 대부분은 죽으면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져서 돌아간다고 합니다. 단멸론적 견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멸론적 견해를 가진 자들은 공통적으로 보시공덕을 부인합니다. 그래서 “보시는 실로 어리석은 자들의 말이다.” (S24.49) 라 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라 할 것입니다.
단멸론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는 몸이 파괴 되면 정신도 흩어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의 스승이나 현재 사람들의 생각이나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보시는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보시를 해도 아무런 공덕이 없음을 말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면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면 존우론, 숙명론, 우연론, 무작론, 단멸론이 됩니다.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으라 볼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돌아 가셨다’라 할 때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졌다라는 말과 같다고 합니다.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져 자연으로 돌아 갔을 때 내세를 위한 공덕을 쌓을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살아 있을 동안 즐겁게 살다가 돌아가면 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즐겁게 살고자 합니다. 눈이나 귀 등으로 오욕을 즐기는 삶입니다.
오욕을 즐기는 삶에 있어서 남을 배려하고 베풀고 나누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착하게 살면 되다고 합니다. 더구나 즐겁게 살다 돌아 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 여깁니다. 대부분 이렇게 살아 갑니다. 그러다 보니 베풀고 나누고 보시하는데 매우 인색합니다. 단 돈 만원이 나가는 것도 벌벌 떨며 심지어 살점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깝게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보시라는 것은 “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보시는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기에 즐기는 삶을 살아 갑니다. 그러나 가르침에 따르면 죽는다고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살인을 저지른 자가 완전범죄에 성공하여 죽음을 맞이 했을 때 사대로 흩어지는 것으로 끝난다고 여긴다면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업과 업의 작용, 즉 연기의 법칙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행위에 대한 과보가 반드시 따른다고 했습니다. 보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현자들은 보시한다
보시를 하면 그 결과는 반드시 따름을 말합니다. 보시공덕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집이 불에 탈 때는
가구를 꺼내서
태우지 않는 것이
유익한 것이네.
이처럼 세상이
늙음과 죽음으로 불탈 때에는
보시로써 구원해야 하니
보시만이 잘 구원하는 것이네.
보시하면 좋은 공덕을 얻지만
보시하지 않으면 좋은 공덕이 없다네.
도둑이나 왕들에게
약탈당하거나 불타서 사라진다네.
모든 재산과 함께 이 몸은 끝내는 버려야 하네.
슬기로운 자여, 잘 알아 즐기며 또한 보시하세.
능력에 따라 보시하고 또한 즐기면
비난받지 않고 하늘나라를 성취하리.” (S1.41, 전재성님역)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현자들이 보시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어리석은 자들은 보시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외도스승이 “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부처님의 업과 업의 작용에 따르면 “바보는 취하고 현자는 보시한다.”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현자들은 보시합니다. 그것은 업과 업의 작용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를 ‘불난집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불난 집의 비유
집에 불이나면 모든 것이 다 타버립니다. 불이 나면 손 쓸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타 버리기 때문에 그저 멍하니 바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겨울 12월 8일 천장사에서 불이 났습니다. 천장사 염궁선원에서 불이 난 것입니다. 그때 당시 상황을 전하는 거사님에 따르면 “제가 할 수있는 것은 오직 불보살님들께 제발 인명피해 안나고, 불길이 산으로 번지지 않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라 했습니다. 천장사에서 불이 났을 때 기도하는 것 외 달리 방법이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천장사 염궁선원에 불이 났을 때 스님들이 몸만 빠져 나왔다고 합니다. 가구나 옷 등 중요한 물건이 모조리 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불난집의 비유를 들어 이 몸도 불난집과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몸이 파괴 되어 죽으면 그동안 모았던 재산을 가져 갈 수 없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가져 갈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보시공덕입니다. 무형의 보시공덕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가져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보시만이 구원자 역할을
한평생 애써 모아 놓은 재물은 결국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도둑이 훔쳐 가고 왕이 빼앗아 가고 천재지변으로 사라집니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무형의 보시공덕입니다. 그래서 업과 업의 작용을 아는 현자들은 이 생에서 능력껏 보시공덕을 많이 짓습니다.
몸이 파괴 되었을 때 보시만이 구원자 역할을 합니다. 보시한 공덕으로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보시공덕이야말로 이 생에서 지어야 하는 최고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업과 업의 작용, 연기의 법칙을 아는 자라면 베풀고 나누고 보시하는 삶을 살아 갈 것입니다.
능력껏 보시 했을 때 하늘나라에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보시는 바보들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보시는 현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바보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살아가지만 현자들은 베풀고 나누고 보시하는 삶을 살아 갑니다.
보시는 능력껏 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보시라도 그것이 나의 전부라면 상상할 수 없는 커다란 공덕이 됩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미소만 지어 보여도 커다란 보시가 됩니다. 보시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것만큼 알려 주어도 보시가 됩니다.
능력껏 보시하고 아는 만큼 알려주자
많이 아는 자, 많이 배운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왠일인지 보시에 인색합니다. 부처님은 물질적 보시와 정신적 보시 가운데 “정신적 보시가 더 수승하다.”(A2.44) 라 했습니다. 그럼에도 학식 있는 자들은 보시에 인색한 것 같습니다.
배운자들은 법보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법보시에 대단히 인색한 것 같습니다. 학자들이 논문 쓰는 것에는 열심이지만 인터넷에 글을 쓰지 않습니다. 인터넷에 글을 쓰는 것을 잡문(雜文)이라 하여 시간낭비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시간에 논문을 쓰고 책을 내는 것이 더 낫다고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님들이 수행을 열심히 하지만 이를 회향하는 것에는 인색합니다. 스님들이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심산유곡에서 신선처럼 살아 가지만 저자거리에 있는 중생들에게는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가난한 자도 능력껏 보시하면 그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법보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많이 배운 자, 학식 있는 자는 법보시를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Ph.D’ 가 있거나 출가자만이 법보시 해야 한다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조금만 알아도 나누는 것입니다. 능력껏 보시한다는 말이 있듯이, 아는 만큼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능력껏 보시하고
아는 만큼 알려주자!”라고.
2017-03-0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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