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초기경전에 집착하는 나는 불교근본주의자

담마다사 이병욱 2017. 2. 17. 16:00

 

초기경전에 집착하는 나는 불교근본주의자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인생관이 다르다 보니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같은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종교관이 다르다면 곤란한 일입니다. 교리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면 날카롭게 대립할 것입니다. 특히 수행자나 성직자의 견해가 다르다면 이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큰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메세지를 하나 받았는데

 

메세지를 하나 받았습니다. 어느 법우님이 올린 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보내 주셨습니다.

 

 

연꽃님은 경전과 지식이라는 울타리에 갖혀 있습니다.

불교 경전과 교리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으세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부르짖는 광신도와

단멸과 윤회에 집착하는 연꽃님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부처와 경전에 대한 집착마저 버릴 때 자유가 옵니다.”(J법우님)

 

 

메시지를 보내 주신 법우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수 많은 댓글을 받지만 일일이 답을 해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매일 새로운 글을 올려서 답하는 것으로 대신한다고 한 바 있습니다.

 

믿을 것은 경전 밖에

 

법우님은 집착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경전에 대한 집착이라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경전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습니다. 현재 처한 상황에서 믿을 것은 경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초기경전입니다.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우는 빠알리경전입니다.

 

초기경전에 집착하는 것은 초기경전이야말로 부처님이 말씀한 것에 가깝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부니까야를 포함하여, 쿳다까니까야, 그리고 율장, 논장에 이르기 까지 방대한 문헌이 전승되어 왔습니다. 최근 20년 이내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매일 글을 쓰면서 접하는 것이 초기경전입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접하면서 느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방대한 빠알리경전이 서로 다른 상반된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거대한 기계가 있어서 수 많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 가듯이 정교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강독모임에서 시스터메틱(Systematic)’하다고 했습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라는 말입니다.

 

톱니바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입니다. 그리고 순차적 가르침으로 되어 있습니다. 방대한 수 많은 경전이 있지만 이 쪽에서 한 말 다르고, 저 쪽에서 한 말 다른 케이스가 없습니다. 어느 니까야에서나 똑 같은 내용입니다. 다만 설명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일관성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크게 사성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성제가 확장된 것이 십이연기입니다. 또한 사성제의 실천은 팔정도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는 서로 맞물려 돌아 가는 톱니바퀴와 같습니다.

 

사성제에서 도성제는 팔정도이고,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입니다. 십이연기에서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고, 사성제는 이지연기에 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핵심가르침은 서로 물려 있습니다. 그 목적은 한가지로 포커스가 맞추어 집니다. 괴로움의 소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왜 괴로움이 키워드인가

 

부처님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설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존자는 코끼리발자국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벗들이여, 움직이는 생물의 발자취는 어떠한 것이든 모두 코끼리의 발자취에 포섭되고 그 크기에서 그들 가운데 최상이듯, 벗들이여,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원리라면 어떠한 것이든 모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포섭됩니다.”(M28) 라고 했습니다.  어느 동물도 코끼리 발자국 안에 다 들어 오듯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성제에 포섭됨을 말합니다. 그 핵심가르침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키워드로 하여 네 가지 진리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교에 대하여 행복의 종교라 합니다. 어느 스님은 강연에서 금생의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 행복이라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맞는 말은 아닙니다. 일부는 맞지만 전부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긍정적 언표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불교에 대하여 행복의 종교라고 하는 것 보다, 불교에 대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종교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합니다.

 

만일 부처님이 행복을 키워드로 했다면 사성제는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고성제)’가 아니라 행복의 거룩한 진리(낙성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거룩한 진리(고집성제)는 행복의 원인에 대한 거룩한 진리(낙집성제)가 되어야 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거룩한 진리(고멸성제)는 행복의 발생에 대한 거룩한 진리(낙생성제)가 되어야 하고, 괴로움의 소멸의 길에 대한 거룩한 진리(고멸도성제)는 행복의 발생의 길에 대한 거룩한 진리(낙생도성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는가

 

부처님은 행복이라는 말 대신 괴로움을 키워드로 하여 사성제를 설했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럼에도 불교에 대하여 이고득락이니, 금생의 행복이니, 내생의 행복이니, 궁극적 행복이니 하여 행복을 키워드로 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올바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없습니다.

 

행복이 무엇입니까? 행복이라는 빠알리어는 수카(sukha)입니다. 수카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pleasant, happy; happiness, pleasure, joy, bliss’ 등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 불교를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 했을 때 락자는 즐길 ()’자입니다. 인생을 즐기자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까? 물론 즐긴다는 ‘pleasure, joy’라는 말 대신 행복을 뜻하는 ‘happy; happiness’나 축복을 뜻하는 ‘bliss’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 대하여 행복의 종교라고 규정했을 때 그 스펙트럼은 너무나 넓어서 오해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행복이라는 긍정적 언표대신 차라리 괴로움이라는 부정적 언표를 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긍정적 언표는 일부를 포함하지만, 부정적 언표는 모두를 포괄합니다. 그래서일까 법조문에서는 부정적 언표를 사용합니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법우님은 경전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으라고 했습니다. 또한 단멸과 윤회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경전에 집착하고 말씀에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길거리에서 예천불지를 부르짓는 전도사와 다를 바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지적은 아마 근본주의를 생각해서 일 것입니다.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습니다. 오로지 바이블에 실려 있는 말씀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맛지마니까야에서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하는 외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바이블에 실려 있는 내용은 대단히 배타적이고 독선적입니다. 특히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없는 내용도 많습니다. 이를 곧이 곧대로 믿어서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며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접근한다면 민폐 끼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근본주의가 있다면 이슬람에는 원리주의가 있습니다. 코란에 쓰여 있는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려 하는 자들의 가치관입니다. 이슬람 원리주의 역시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 근본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가 충돌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서로 이것 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라 했을 때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십자군전쟁, 최근에는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기독교나 이슬람 모두 구약을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실려 있는 내용 중에는 전쟁을 부추기는 말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진리로 알아 그대로 실천하려는 근본주의와 원리주의가 충돌하면 전쟁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 경전에는 긴장과 갈등, 전쟁을 부추기는 가르침을 볼 수 없습니다. 방대한 초기 경전 그 어디에도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가르침 위주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평화주의자가 됩니다. 기독교나 이슬람에서 문자에 집착하면 전쟁이 일어나지만, 불교에서 초기경전에 집착하면 평화로워지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는 뿐나존자가 서부지역으로 포교하러 떠날 때 “세존이시여, 만약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이 날카로운 칼로 저의 목숨을 빼앗으면, 그 때 저는 이와 같이 ‘몸 때문에 목숨 때문에 오히려 괴로워하고 참괴하고 혐오하여 칼로 자결하길 원하는 세존의 제자들도 있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도 칼로 자결하는 셈이다.’라고 말하겠습니다.”(S35.88)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불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려 있는 초기경전에 집착하는 것은 평화주의자가 되는 길입니다. 초기경전 그 어디에도 긴장과 갈등, 전쟁을 부추기는 말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을 것을 설하는 가르침으로 되어 있어서 그대로 실천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자가 됩니다. 그래서인지 아소까대왕은 비문에 담마(Dhamma)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가져온다.”라고 했습니다. 전인도를 통일한 대왕이 정복전쟁을 포기하고 담마로서 세계정복을 천명한 것입니다.

 

초기경전에 집착하는 나는 불교근본주의자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쓰기 하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만 11년 되었습니다. 그 동안 쓴 글이 3,000개가 넘습니다. 매일 하루 한 개꼴 로 글을 쓴 것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게 된 원동력은 가르침에서 인생의 해법을 발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방대한 초기경전을 다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서로 관련된 경을 읽었을 때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결코 후대에 삽입 되었다든가 꾸며 넣은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읽어 본 자만이 감으로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매일 초기경전을 접하고 있습니다. 책상 바로 뒤에 책장이 있어서 의자만 돌리면 바로 책을 꺼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매일 접하는 초기경전은 삶의 전부와 같습니다. 그래서 초기경전만이 부처님의 원음임을 확신합니다. 이런 확신이 들 때 분명한 사실은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인 거짓이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든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마 집착일 것입니다. 그러나 초기불교와 초기경전에 대한 집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혜의 가르침이고, 자비의 가르침이고, 평화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으로 본다면 불교근본주의자이자 동시에 불교원리주의자입니다.

 

경전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긴장과 갈등과 전쟁을 부추기는 가르침과는 달리 지혜와 자비와 평화로 가득 찬 가르침이 실려 있는 초기경전에 집착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독교근본주의와 이슬람원리주의는 매우 위험한 것이지만, 평화의 가르침인 불교근본주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초기경전에 집착하는 불교근본주의자입니다!”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경전을 접하지 않으니

 

빠알리경전이 이 땅에 번역되어 출간된지 18년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한역아함경 등 초기경전이 있었지만 누구나 쉽게 우리말로 출간된 것은 20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사부니까야가 완역된 것은 10년도 되지 않습니다. 쿳다까니까야의 경우 총 15개의 경전 중에 이제 6개가 번역되어 있을 뿐입니다.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경전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접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재성박사님에 따르면 경전이 번역되어 한번 출간하면 천권인데 모두 소진하는데 5년 걸린다고 합니다. 일년에 200권 가량 팔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우리나라 불자들이 경전을 사서 읽지 않고 있음을 말합니다. 경전을 접하지 않으니 부처님 그분이 어떤 분인지,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스승에게 크게 의지합니다. 스승이 한 말을 부처님 말씀 보다 더 신뢰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입니다.

 

깔라마의 경에서

 

우리나라 불자들은 자신이 믿고 따르는 스님에 대하여 비판하면 몹시 불편해 합니다. 그러나 비판 받을 만하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입니다. 특히 부처님 그분이 말씀 하신 것과 달리 말할 때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스님을 비판했다고 하여 불쾌하기 생각한다면 깔라마의 경에서 충고를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깔라마의 경이 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나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 (A3.65,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누가 이러쿵 저러쿵 말한다하여 곧이 곧대로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요즘 JTBC에서 집중보도 하고 있는 가짜뉴스를 연상케 합니다. 상황을 반전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여 교묘하게 편집하여 사람들을 혼란으로 빠뜨리는 찌라시를 말합니다.

 

경전을 다 믿어서는 안된다고?

 

부처님은 성전의 권위에도 끄달리지 말라(mā piakasampadānena)’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전이라는 말은 ‘piaka’로서 ‘a basket’이라는 뜻입니다. 빠알리 삼장에 대하여 ‘Tipiaka’라 하여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이 됩니다. 이는 율장, 경장, 논장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성전의 권위에도 끄달리지 말라라는 말을 오해합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도 믿지 말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과연 이런 말이 타당할까요?

 

부처님은 45년 동안 수 많은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모두 구전으로 전승되어 왔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책이 없었습니다. 모두 암기해서 외웠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경전에 의지하지 말자든가 경전에 쓰여 있다고 해서 다 믿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한다면 모순입니다.

 

부처님은 부처님이 설한 것 외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 라 했습니다. 그럼에도 성전의 권위에도 끄달리지 말라라고 하여 경전이라고 해서 다 믿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성전의 권위에도 끄달리지 말라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브라만교의 베다성전을 말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제자들이 모두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책으로 된 성전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설령 부처님이 외운 것에도 의지 하지 말라고 했다면 가르침에 의지하라라는 말과 모순이 됩니다. 부처님이 성전의 권위에도 끄달리지 말라라 한 것은 브라만교의 교리나 육사외도의 사상에 대한 것입니다.

 

윤회 없음에 대하여 법문했다면

 

스승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설령 스승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처님 그분이 말씀 하신 것과 다르면, 깔라마의 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 (mā bhabbarūpatāya, mā samao no garū)”라는 구절을 상기해야 합니다. 만일 어느 스승이 윤회 없음에 대하여 법문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부처님 말씀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업과 업의 작용을 말씀 하시면서 수 없이 윤회에 대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스승이 이 윤회 사상은 인도로부터 온 흰두교 사상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마치 윤회를 인정하면 불교신자고. 윤회를 인정 안 하면 불교신자가 아닌 것처럼 지금 이런 위치를 차지해 버렸다.”(B스님) 라고 말한다면 따져 보아야 합니다. 또한 부처님이 내생이 있느니 업느니 이런 얘기 하는 게 부처님이겠어요? 그러면 천당이 있느니 없으니 하는 거와 차이가 뭐가 있어요?”라고 말한 것도 따져 보야야 합니다. 그 기준은 초기경전입니다.

 

불자들은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스님이 한 말을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 보다 더 우위에 두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는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도가 무지할수록 성직자의 권위는 올라가고

 

어느 종교이든지 신도가 무지할수록 성직자의 권위는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신도들이 부처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매일 경전을 읽었을 때 윤회가 없다거나 본래 없다거나 등의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깔라마들이여, 이러한 것들이 악하고 건전하지 못하고, 이러한 것들이 잘못된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식자에게 비난 받을 만하고, 이러한 것들을 실천하여 받아 들이면, 유익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알게 되면, 깔라마들이여, 그때에 그것들을 버리십시오.”(A3.6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스승이 잘못된 가르침을 설했을 때 부처님의 말씀과 비교하여 맞지 않다면 버리라고 했습니다. 만일 잘못된 것임에도 그대로 실천한다면 오랜 세월동안 불익을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불익은 이번 생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생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존우로, 우연론, 무작론, 무인론, 단멸론 등 빗나간 견해를 믿었을 때 그 과보는 확실히 지옥행이라 했습니다. 그것도 한겁이라는 한우주기에서도 제도 되지 못하고 더 아래 사이지옥에 떨어져 한량 없는 수 겁 동안 암흑속에서 고통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마음의 불사

 

어느 종교이든지 신도가 무지할수록 성직자의 권위는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원음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사 볼 수 있습니다. 스님에게 보시하는 것도 좋고 불사에 참여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부처님 그분이 어떤 분이고 어떤 말씀을 했는지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합니다.

 

누군가 경전에 집착한다는 말을 해도, 설령 불교근본주의자라는 말을 들어도 경전을 사 보아야 합니다. 정견을 가지게 되면 사견으로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 경전을 한권 두권 사 모우는 것만한 마음의 불사가 있을까요?

 

 

 

2017-02-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