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심판하는 저울, 이집트보물전을 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일인사업자로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자영업자입니다. 한가지 좋은 점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월급생활자로 살면 근무시간 외에 자유가 주어지지만 나홀로 살아 가다 보면 하루 24시간이 자유입니다.
일인사업자의 명함에는 ‘대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인사장입니다. 나홀로 일을 함에도 대표라고 되어 있는 것은 관행이기도 하지만 때로 고용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길거리에서 “사장님!”라고 소리치면 모두 되돌아 본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
일인사업자에게는 일하는 날 보다 노는 날이 더 많습니다. 그 많은 시간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하나라도 해야 합니다.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고 실적을 올려야 하는 월급생활자에게는 운동할 수도 있고 자기계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인사업자에게 있어서 달리 할 것이 없습니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라면 부지런히 뛰어야 하겠지만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을 놓아 버린 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글 밖에 없습니다.
일인사업자의 하루는 새벽에 시작됩니다. 주말도 예외가 아닙니다. 월급생활자라면 토요일과 일요일 늦잠자며 느긋하게 보낼지 모르지만, 일인사업자는 평일과 다름 없습니다. 해가 뜨기 전 새벽같이 일어나 일터로 향합니다. 그렇다고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글쓰기입니다. 이것도 집착이라면 집착이겠지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어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용산에 있는 박물관입니다. 겨울철 추운 날씨 때문에 외출이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실내에서 하는 행사를 찾아 가는 것이 제격입니다. 해마다 겨울철에 박물관을 찾습니다.
용산중앙박물관에서는 이집트특별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이집트보물전’입니다. 전시기간은 2016년 12월 20일부터 2017년 4월 9일까지 입니다. 학생들 방학에 맞추어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전시회 입장권은 금액이 상당합니다. 개인의 경우 13,000원이고 단체는 11,000원입니다. 초등학생은 6,000원입니다. 그럼에도 일요일 오후 박물관 특별전시실은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특히 초등학생 등 청소년들이 많습니다.
이집트보물전을 보려면 기다려야 합니다. 표를 끊고서 1시간 반 가량 대기 했다가 순번이 오면 차례로 들어 갑니다. 시간이 남아서 일반전시실로 향했습니다. 예전과 다르게 일반전시실은 무료 입니다. 예전에는 입장료를 받았습니다. 아마 특별전시실에서 수익을 챙기기 때문에 일반전시실을 무료로 개방하는 듯합니다.
복희여와상
일반전시실에 가면 대게 아시아관으로 향합니다. 3층에 있습니다. 아시아관중에서 특히 중앙아시아관에 자주 머물게 됩니다. 특히 ‘투르판’에 나온 유물에 눈길이 갑니다. 그 중에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이 ‘복희여와상’입니다.
복희여와상에 대한 설명문을 보면 1916년에 입수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제시대때 입수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약탈문화재입니다. 일제시대 당시 일본 오타니탐험대가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떼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한 두 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앙아시아관에 전시 되어 있는 상당수가 오타니 콜렉션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총독부에서 보관되어 있던 문화재가 해방과 동시에 우리나라 것이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문명가로지르기에 성공한 불교,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군에서(2013-06-02)’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간다라 보살상
중앙아시아관에는 인도와 티벳관련 문화재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째 똑 같은 전시물입니다. 해가 바뀌면 전시물도 바뀌어야 함에도 매번 똑 같은 전시물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곳에 올 때는 주의 깊게 살펴 봅니다. 그 중에 간다라 보살상이 있습니다.
간다라보살상은 2세기에서 3세기의 작품입니다. 최초의 불상이 간다라에서 시작 되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무불상시대였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한 후 불자들은 감히 부처님상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사리탑이나 와륜, 보리수 등을 신앙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불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부처님 열반후 약 오백년이 지나서부터 간다라지역에서 부터입니다.
간다라보살상은 32상 80종호로 표현 되는 부처님을 형상화 한 것입니다. 그런데 간다라지역은 알렉산더대왕의 통치지역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풍의 불상을 볼 수 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보살상도 그리스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티벳 비로자나불
또 하나 주의깊게 본 것이 있습니다. 티벳 비로자나불입니다. 13세기 작품입니다. 청동으로 만든 것으로 매우 섬세합니다. 보관을 쓰고 있고 귀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목에는 커다란 목걸이가 있습니다. 손목에는 팔찌가 있습니다. 그런데 윗팔 부분에는 커다란 꽃 무뉘의 팔찌가 있습니다. 허리에도 띠를 하나 두르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발에도 발찌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티벳비로자나불을 보면 보관, 귀걸이, 목걸이, 아래팔찌, 윗팔찌, 허리띠, 발찌 등 온통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품이 몸을 휘감고 있습니다.
티벳비로자나불을 보면 마치 관세음보살상을 보는 듯 합니다. 관세음보살은 천의를 입고 보관을 쓰고 영락으로 목걸이를 하고 손목에는 팔찌를 차고 있습니다. 목걸이 등으로 치장을 하고 있는 것에서는 관세음보살상과 그다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보살상과 차이가 나는 것은 ‘오묘한 미소’일 것입니다.
티벳보살상은 비로자나불 특유의 수인을 하고 있습니다. 수인이 없다면 아마 관세음보살상으로 착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화려한 장신구 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상호입니다. 눈을 아래로 뜨고 있습니다. 입가에는 오묘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아마 선정삼매와 해탈의 즐거움을 표현한 듯 합니다. 이런 미소를 보고 있으면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 합니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미소가 아마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미소짓는 마음
초기경전에 부처님이 미소를 띠었다라는 말이 종종 나옵니다. 대게 “이때에 세존께서는 길을 벗어나 어떤 장소에서 미소를 지었다.”(M81)라는 형식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면 아난다가 “어떠한 원인, 어떠한 조건 때문에 세존께서는 미소를 보이셨을까? 여래는 이유 없이 미소를 보이시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구절이 뒤따릅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미소짓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에는 선심과 불선심, 과보심, 작용심 이렇게 네 가지 마음이 있는데, 미소짓는 마음은 ‘작용심’에 속합니다. 그런데 미소짓는 마음에 대하여 ‘아라한의 마음’이라 합니다. 대상에 대하여 호불호를 떠나 단지 작용만하는 마음만 일어납니다.
아라한들은 어떤 업도 생산해 내지 않기 때문에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짓지 않습니다. 선행을 하지만 선행 했다는 티를 내지 않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즐겁다고 하여 이빨을 내며 웃지 않습니다. 다만 미소만 보일 뿐입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아라한으로 하여금 하찮은 것에도 미소를 머금게 하는 역할을 한다.”(Vism.14.108) 라 했습니다. 하찮은 대상이란 여섯 가지 감각대상을 말합니다. 그것은 ‘기쁨이 함께 한 미소짓는 마음(somanassasāhagataṃ hasituppādacitta)’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노래는 울음이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춤은 광기이다.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은 장난이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노래도 계율의 파괴이고, 춤도 계율의 파괴이다. 이유가 있어 기뻐한다면,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A3.103, 전재성님역)
이집트보물전
시간이 되어서 다시 이집트특별전시실로 향했습니다. 로비에는 대기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마치 은행에서 순번표를 받듯이 매표할 때 순번표를 나누어 줍니다. 약 한시간반에서 두 시간 정도 대기 했다가 입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로비는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입구에 들어 서면 벽면에 안내판이 보이는데 한글과 영어와 일본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집트보물전이서인지 이집트사람들처럼 보이는 가족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습니다.
영원한 삶을 위하여
이집트보물전은 어떤 성격일까요? 이에 대하여 팜플렛과 안내게시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입니다. 죽음에 대한 전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대이집트인들은 어떤 믿음을 가졌을까요? 전시회의 핵심을 설명하는 문구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영원한 삶을 희망합니다. 이집트인들도 마찬가였습니다. 그들에게 사후세계에서의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을 심어준 것은 바로 신화였습니다. 그 신화 가운데 이집트를 다스렸던 태초의 왕, 오시리스(Osiris)가 그의 동생인 세트(Seth)에게 죽임을 당하지만, 아내인 이스시(Isis)에 으해 되살아나 사후세계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을 준비하며 사후세계에서의 영원한 삶을 꿈꾸게 하였습니다.”(이집트보물전 설명문)
설명문의 키워드는 ‘영원한 삶’입니다. 이른바 영원주의일 것입니다.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죽은 자를 썩지 않게 하여 미이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고대이집트인들은 사후에 영혼이 다시 육체에 복귀한다는 신앙을 믿고 있었습니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호걸도 죽음에 임박하면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힘도 없습니다. 미이라가 대게 왕이나 대신 등 지배계층에 대한 것이 많습니다. 살아서 누린 부귀영화를 죽어서도 영원히 누리겠다는 듯이 보이는 듯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화려하게 장식된 관과는 달리 관안에는 말라 비틀어진 나무토막과도 같은 시신이 누워 있을 뿐입니다.
따오기의 관
이집트인들의 영원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사람에게 그치지 않습니다. 이번 이집트보물전에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사람뿐만 아니라 기르던 고양이, 뱀 등도 미이라로 만들어 관속에 보관해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따오기의 관’입니다.
따오기의 관을 보면 매우 사실적입니다. 따오기 형상을 한 관안에는 실제로 따오기 미이라가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설명문에 따르면 따오기는 달, 지혜, 글의 신으로 잘 알려진 토트(Toth)를 상징하는 동물이라 합니다.
“나는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었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었다”
이집트보물전에는 갖가지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미이라이지만 돌에 새겨진 상형문자도 여럿 있습니다. 특히 이집트 상형문자는 문자 하나하나가 이미지로 되어 있어서 무엇을 뜻하는지 대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명문을 읽어 보지 않으면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벽면에는 “나는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었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었다.”라는 상형문자가 눈에 띕니다.
영혼을 심판하는 저울
고대이집트인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영원주의라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담겨 있습니다. 일반민중들이야 죽지 못해 사는 괴로운 삶일지 모르지만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삶이 영원하기를 바랬습니다. 지금 이 행복이 죽어서 사후세계까지 영원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강력한 욕망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이른바 ‘오욕락’일 것입니다.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마슬로는 이를 욕구실현 오단계로 설명했습니다. 즉 생리적 욕구, 안전욕구, 애정 및 소속욕구, 존경욕구. 자아실현욕구를 말합니다. 이와 유사한 욕구가 불교에서 말라는 오욕락, 즉 식욕, 성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일 것입니다. 모두 욕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욕망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자야 합니다. 이는 기본욕구입니다. 기본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다음 단계로 나아 갑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가진 기득권자들은 이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죽어서까지 이 지위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사후에 영혼이 모두 부활할 수 없습니다. 이집트인들에 따르면 욕망을 내려 놓은 자들만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된 그림이 영혼의 심판입니다.
이집트보물전에는 유물뿐만 아니라 영상으로도 전시합니다. 대형화면을 통하여 동영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약 1분 가량 보여주는 영혼심판에 대한 동영상입니다.
동영상을 보면 저울에 심장을 다는 장면이 있습니다. 죽은 자의 심장을 떼어 내어 천칭저울의 한쪽에 올려 놓습니다. 저울의 한쪽에는 놀랍게도 깃털이 올려져 있습니다. 설명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 죽은 이는 자신의 심장을 저울에 올려 놓고 정의를 상징하는 깃털과 무게를 잽니다. 만약 죄가 많으면 심장이 무거워지게 되고, 심장은 괴물 아무트(Ammut)에게 먹히게 되어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죄가 없으면 깃털과 균형을 이루게 되어 영원한 삶을 얻게 됩니다.”(영원한 삶을 얻기 위한 심판, 상영시간 1분)
이 설명문을 보면 아무나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신을 믿으면 무조건 천국에 태어나 영원한 삶을 누린다고 믿고 있는 유일신교와 비교됩니다. 고대이집트인의 영원관에 따르면 깃털 보다 가벼운 삶의 궤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천칭의 한쪽에 깃털을 올려 놓고 다른 한쪽에 심장을 놓았을 때 평형을 이루어야 영생이 보장됨을 말합니다. 과연 깃털보다 더 가벼운 삶을 살았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깃털보다 더 가벼운 죄업
기독교에 낙타와 바늘의 비유가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에 들어 가는 것이 더 어렵다’(마태복음 19장 24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 번역된 것이라 합니다. 아랍어 밧줄을 뜻하는 gamta를 낙타를 뜻하는 gamta를 잘못읽은 오류라 합니다. 낙타 밧줄이 바늘 구멍속에 들어 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자는 정신적으로 오염된 자들일 것입니다. 부자라 하여 모두 천국에 들어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는 과정에서 죄업을 많이 지은 자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대 이집트인들도 권력자라 하여 모두 사후에 영원한 삶이 보장되지 않은 듯 합니다. 욕망에서 자유로운 자들만이 영원한 안식처가 보장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집트보물전을 보기 전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이라를 만든 목적이 영원한 삶에 대한 것이라면 결국 영원주의라는 생각입니다. 영원주의는 62가지 사견 중의 하나로서 버려야 할 견해입니다. 그럼에도 고대이집트인들이 죽어서 영원히 살기 위해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고 사후에 영혼의 부활을 위해 미이라를 만드는 행위에 대하여 영원주의라는 삿된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심판하는 저울 그림을 보고서 생각이 약간 달라졌습니다. 비록 그들이 영원주의를 믿는다고 하지만 마음이 깨끗한 자들만이 영생이 보장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물질적 부를 추구합니다. 돈버는 능력이 있건 없건 간에 돈벌기 선수가 되어야 하는 사회입니다. 돈버는 재주가 없어서 평생 가난하게 사는 자도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어서 이 세상을 살아 가는 능력이 되지 않은 자들은 죽지 못해서 살아 갑니다. 그럼에도 돈버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거기에다 명예와 권력까지 거머쥔 자들이 있습니다. 이 땅의 기득권자들입니다.
기득권자들은 천상과도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행복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영원에 대한 바램은 사후로 까지 이어집니다. 죽어서도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천상에 들어 가는 문은 매우 좁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바이블에서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깃털 보다 더 가벼워야 영원한 삶이 보장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불교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서쪽 지역 사제들은
상윳따니까야 촌장상윳따에 바위와 기름의 비유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날란다에 있는 빠바리깜바 숲에 계실 때 그 지역 촌장이 찾아 왔습니다. 찾아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brāhmaṇā, bhante, pacchā bhūmakā kāmaṇḍalukā sevālamālikā udakorohakā aggiparicārakā. Te mataṃ kālaṅkataṃ uyyāpenti nāma saññāpenti nāma saggaṃ nāma okkāmenti. Bhagavā pana, bhante, arahaṃ sammāsambuddho pahoti tathā kātuṃ yathā sabbo loko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sugatiṃ saggaṃ lokaṃ upapajjeyyā”ti?
“세존이시여, 서쪽지방에 사는 사제들은 물병을 들고 쎄발라 꽃으로 화환을 하고 물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불의 신을 섬기는데,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을 들어올려 이름을 부르고 하늘나라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로 태어날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까?”(S42.6, 전재성님역)
촌장은 부처님이 죽은 자를 천상으로 인도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여기서“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을 들어올려 이름을 부르고 하늘나라로 인도합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서쪽 지역 사제들은 죽은 자를 천상으로 인도하는 ‘천도재’를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역질문
‘죽은 사람들을 들어 올린다.(mataṃ kālaṅkataṃ uyyāpenti)’라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주석에 따르면 “죽은, 돌아간 자를 가지고 나왔다.”라는 뜻이라 합니다. 초혼을 의미합니다. 또 ‘이름을 부르고 하늘나라로 인도합니다.(saggaṃ nāma okkāmenti)’라 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보면 “하느님 세계로 가자, 하느님 세계로 가자”라는 뜻이라 합니다. 사제(brāhmaṇā)가 있어서 죽은 자를 범천으로 인도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촌장은 부처님에게 죽은 자를 하늘나라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묻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촌장에게 다음과 같이 ‘역질문’합니다.
“촌장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상에 어떤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사랑 나눔에 잘못을 범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스럽고, 성내는 마음을 가지고, 삿된 견해에 사로잡혔다면, 그에게 많은 사람이 모여 와서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로 태어날지어다.’라고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한다면 촌장이여,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은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한 까닭에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로 태어날 수 있습니까?” (S42.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오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계도 지키지 않은 자가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오계도 지키지 않은 자에게 “하늘나라로 태어날지어다.”라고 사제가 기도한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태어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부처님은 촌장에게 돌과 기름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이 호수에 커다란 돌을 던져 놓고 기도한다고 하여 돌이 떠 오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계도 지키지 않고 십악행을 저지른 자가 죽었을 때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업을 지은 자는 아무리 기도해도 천상에 태어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악업에 대한 죄업이 무겁기 때문에, 마치 호수에 바위가 가라 앉는 것처럼 “그 사람은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입니다.” (S42.6) 라 했습니다.
물위에 뜬 기름처럼
악업을 지은 자는 죄업이 바위돌 처럼 무거워서 아래로 가라 앉을 것입니다. 그래서 악처에 떨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아무리 천도재를 올려도 악업의 무게 때문에 천상으로 올라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계를 지키고 십선행을 한 자는 선업으로 인하여 깃털처럼 가벼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호수 위에 뜬 기름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했습니다.
“촌장이여, 예를 들어 버터가 든 단지나 기름이 든 단지를 깊은 호수에 집어넣고 부수어 봅시다. 그러면 조각이나 자갈이 되어 밑으로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 때 버터나 기름은 위로 뜨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와서 ‘버터여, 기름이여, 잠겨라, 버터여, 기름이여, 물 밑으로 가라앉아라. 버터여, 기름이여, 바닥으로 가라앉아라.’라고 기도하고 저주하고 합장하고 순례한다면, 촌장이여,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버터나 기름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저주하고 합장하고 순례한 까닭에 잠기거나 물 밑으로 가라않거나 바닥으로 가라앉을 수 있습니까?” (S42.6, 전재성님역)
기름은 물에 뜨게 되어 있습니다. 기름은 물보다 더 가볍기 때문입니다. 오계를 지키고 십선행을 지은 자, 선업으로 깃털처럼 가벼운 자에게 누군가 악처에 떨어지라고 저주의 기도를 올린다고 하여 아래로 떨어질까요? 선업을 지어 업이 깃털처럼 가벼운 자는 아무리 저주의 기도를 올려도 천상에 태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수레를 끄는 괴로움과 깃털처럼 가벼운 그림자
법구경에 쌍의 품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게송이 정신(mano)과 사실(dhamma)에 대한 것입니다. 법구경 1번 게송을 보면 “만약에 사람이 오염된 정신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르리. 수레바뀌가 황소의 발굽을 따르듯.”(dhp1)라 했습니다.
1번 게송에서는 수레바퀴와 황소의 비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에 대하여 황소가 끄는 수레바퀴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주석에 따르면 “황소는 수레를 거꾸로 돌리거나 거기서 벗어 날 수 없다. 황소가 앞으로 벗어나려고 하면, 멍에가 황소의 목을 조른다. 뒤로 벗어나려고 하면, 바퀴가 황소의 엉덩이 살을 도려 낸다.”라 했습니다. 마찬 가지로 신체적-정신적 고통은 오염된 정신 때문에 세 가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지옥 등, 그가 가는 어느 곳이든지 뒤를 따른다는 말입니다.
법구경 2번 게송은 1번 게송과 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사람이 깨끗한 정신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르리. 그림자가 자신을 떠나지 않듯.”(dhp2)라 했습니다. 이는 선업공덕에 대하여 즐거운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게송에서는 즐거움에 대하여 그림자로 비유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그림자는 몸과 연결 되어 몸이 움직이면 움직이고, 서면 서고, 앉으면 앉는다. 부드럽거나 거칠거나 모욕을 주는 어떠한 명령으로도 그림자를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림자는 몸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림자가 몸에서 떠나지 않듯이 선업공덕을 쌓으면 늘 함께 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선업공덕에 대하여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수레로 비유한 악업과 비교됩니다. 그런 그림자는 무게가 없습니다. 마치 깃털처럼 가벼운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천도의 기도나 저주의 기도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일생동안 지은 업의 무게에 따라 악처에 떨어지기도 하고 천상에 태어나기도 합니다. 사제가 열심히 기도한다고 하여 업의 무게를 조정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돌과 기름의 비유를 보면 이집트보물전에서 본 영혼의 심판 저울을 떠 올리게 합니다. 또 법구경에서 수레와 그림자의 비유를 보면 선업공덕은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니는 것이며 동시에 깃털처럼 가벼워서 천상에 태어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17-02-19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에서 돈 벌 수 있는 기회는 많지만, 청정한 도반과 함께 하는 공부모임 (0) | 2017.03.09 |
---|---|
바보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 능력껏 보시하고 아는 만큼 알려 주자 (0) | 2017.03.02 |
초기경전에 집착하는 나는 불교근본주의자 (0) | 2017.02.17 |
무간지옥 보다 더 무서운 암흑의 사이지옥 (0) | 2017.02.16 |
“패권주의가 뭐 어때서?” 정치낭인 정청래와 함량미달 손혜원의 정치인식 (0) | 2017.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