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간지옥 보다 더 무서운 암흑의 사이지옥
부처님 당시 외도스승들은 갖가지 견해를 말했습니다. 수 많은 견해 중에서도 최악의 견해가 단멸론입니다. 영원론은 그래도 낫습니다. 영혼을 믿지만 유익한 업을 지으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견해를 말합니다. 그러나 단멸론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오계를 지킬 필요도 없고 십선행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범주에 해당하는 견해가 무작론(akiriyā-diṭṭhi), 무인론(ahetuka-diṭṭhi), 단멸론(antthika-diṭṭhi)입니다.
부처님은 무작론 등 세 가지 견해에 대하여 오역죄와 같은 범주로 보았습니다. 부모와 아라한을 살해하거나, 부처님에게 상해 하는 것, 승단분열에 대하여 한 우주기 동안 지옥고를 받을 정도로 ‘무거운 업(重業)’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무거운 업이 사견을 갖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견에 집착하면
그렇다면 사견이 얼마나 무거운 업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사이지옥’이야기가 있습니다. 해로운 업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사견인데 이런 해로운 업은 수 겁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오역죄는 한우주기 동안, 즉 한겁 이내이지만, 무작론, 무인론, 단멸론 등 사견을 가지고 있으면 수 겁 동안 지옥고를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업과 윤회의 법칙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이러한 잘못된 견해에 취착하는 것은 6가지 해롭고 무거운 업들 가운데 가장 무거운 업이다. 그래서 수 겁동안 지옥에서 고통받는다. 그 업의 잠재력이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한 심지어 세상의 시스템이 파괴된다 하더라도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업과 윤회의 법칙, 346쪽)
세상의 시스템이란 우주의 성주괴공을 말합니다. 세상은 한겁을 주기로 하여 생성되고 파괴됨을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파괴될 때는 지옥부터 소멸된다고 했습니다. 지옥부터 시작하여 축생, 아수라, 인간, 욕계천상 순으로 모조리 파괴도고 마지막으로 색계 초선천, 즉 범천까지 파괴됩니다. 이와 같이 세상이 생성하고 소멸하기 까지 한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견을 가지면 수 겁을 지옥에서 보낸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모조리 파괴 되었다면, 그것도 지옥까지 파괴 되었다면 사견을 가진 자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주석에 따르면 사견을 가진 자들의 지옥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세계 시스템들 사이에 있는 간극에 태어난 중생들은 해당되는 업에 따라 고통을 받는다.”(업과 윤회의 법칙, 397번 각주) 라 했습니다. 이런 지옥을 ‘사이지옥’ 또는 ‘틈새지옥’이라 합니다.
빛이 들지 않는 버려진 세계
한세계가 한겁을 주기로 주기적으로 파괴 되어도 파괴 되지 않는 곳이 있는데 바로 그곳이 사견을 가진 자가 가는 어둠의 세계입니다. 이런 지옥은 경전적 근거를 갖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 ‘암흑의 경(andhakāra sutta: S56.46)’이 바로 그것입니다.
Atthi bhikkhave, lokantarikā aghā asaṃvutā andhakārakā5 andhakāratimisā. Yatthāpimesaṃ candimasuriyānaṃ evaṃmahiddhikānaṃ evaṃmahānubhāvānaṃ ābhā6 nānubhontīti.
“수행승들이여, 덮개도 없고 바닥도 없는 캄캄한 칠흑 같은 암흑에 둘러싸여 이와 같은 광대한 초월적 힘과 이와 같은 광대한 초월적 능력이 있는 해와 달이 비추지 못하는 지옥이 있다.”(S56.46, 전재성님역)
우주는 한겁을 단위로 주기적으로 파괴된다고 했습니다. 우주가 괴겁기에 들어가면 지옥문도 닫히게 됩니다. 부모를 살해한 자라 할지라도 지옥이 파괴되면 천상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는 부모살해라는 무거운 업에 대한 과보를 지옥에서 받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남아 있는 업 중에는 선업도 있을 것입니다. 가장 무거운 업을 먼저 받고, 무거운 업에 대한 과보를 다 받으면 이전에 지은 업, 이미 지어진 업을 받을 차례입니다. 그래서 지옥중생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옥문이 닫혀도 빠져 나오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사견을 가진 자들 입니다. 그들은 빛도 들어 오지 않는 지옥에서 한량 없는 세월을 보내야 합니다.
로까뷰하(Lokabyuha: 世莊嚴)이야기
우주가 성주괴공함에 따라 괴겁기에 접어 들면 가장 먼저 지옥문이 닫힙니다. 한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이 아니라 지옥문부터 위로 축생, 아귀 순으로 차례로 문이 닫힙니다. 이는 세상의 파괴를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업과 윤회의 법칙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습니다.
“세계가 끝이 나면 지옥에 있는 모든 중생들은 인간이나 천신의 세계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정을 닦는다. 이 결과로 범천의 세계에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지옥 중생 가운데 잘못된 견해 가운데 한 가지에 취착하는 중생들은 아직 파괴 되지 않은 ‘다른 세계의 시스템’ 들 사이에 틈에 존재 하는 악처로 다시 떨어진다.”(업과 윤회의 법칙, 346쪽)
지옥중생도 업이 다하면 천상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 따르면 ‘로까뷰하(Lokabyuha: 世莊嚴)이야기’(Vism.13.34) 로 설명합니다. 말세가 되면 하늘에서 로까뷰하라 불리는 천신들이 나타나 세상의 종말을 알린다고 합니다. 이들은 “여러분, 여러분, 지금부터 백 천이 지난 뒤에 겁의 [종말이] 시작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멸망할 것이고, 대해도 마를 것입니다…”라며 비참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며 세상의 종말을 알립니다. 그리고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자애를 닦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애를 닦으면 범천(색계2선천 이상)에 태어나 우주가 괴멸 되어도 존재할 수 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륵상생신앙의 기원
대부분 사람들은 로까뷰하(천신)의 경고를 가슴으로 받아 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들을 향해 자애를 닦고 선업을 짓습니다. 자애를 닦아 선정에 들어 갑니다. 선정을 닦을 수 없는 사람들은 과거에 지은 유익한 업 때문에 천신의 세계에 태어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범천에 태어납니다. 디가니까야(D1)에 따르면 괴겁기가 되면 색계 초선천까지 파괴 되기 때문에 색계 2선천 이상에 모두 태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로까뷰하이야기를 보면 마치 ‘미륵상생신앙’을 연상케 합니다.
역사적으로 세상의 종말이라 생각되면 미륵신앙이 유행합니다. 미륵을 뜻하는 ‘멧떼이야(metteya)’라는 말은 자애를 뜻하는 멧따(metta)라는 말과 어근이 같습니다. 그래서 미륵보살을 ‘자씨보살(慈氏菩薩)’이라고도 합니다.
미륵상생신앙은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신앙입니다. 청정도론에서 로까뷰하 이야기를 보면 모든 중생들이 자애를 닦아 색계 2선천 이상 범천에 태어나기 때문에 미륵상생신앙과 유사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로까뷰하 이야기는 미륵상생신앙의 기원처럼 보여집니다.
사이지옥은 어떤 곳인가?
괴겁기가 되면 가장 먼저 지옥문이 닫히고, 이어서 축생문이 닫히고, 다음으로 아귀문, 아수라문, 인간문, 욕계천상문이 닫힙니다. 이는 세계가 파멸함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색계 초선천 까지 남김 없이 파괴 됩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로까뷰하(Lokabyuha: 世莊嚴)라는 천신이 내려와 자애 등 사무량심을 닦으라고 눈물로서 경고합니다. 이에 사람들은 모두 사무량심을 닦아 색계 2선천 이상에 태어납니다.
지옥문이 닫혀도 지옥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견을 가진 자들입니다. 사견을 가진 자들은 사이지옥이라 하여 틈새지옥으로 또 다시 떨어집니다. 이와 같은 사이지옥에 대하여 “해와 달이 비추지 못하는 지옥” (S56.46)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세계의 철위산 사이에 하나의 아비지옥이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세계사이(lokantarikā)에 있어서 사이지옥이라 합니다.
사이에 있기 때문에 빛의 사각지대입니다. 그래서 늘 어둠만 있습니다. 경에서는 “덮개도 없고 바닥도 없는 캄캄한 칠흑 같은 암흑에 둘러싸여” (S56.46) 라 표현 되어 있습니다. 초불연 각주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세 개씩의 우주(cakkavala: 철위산) 가운데 각각 하나씩의 ‘우주의 틈새(loka-antarika)’가 있다. 이것은 우주의 틈새에 있는 지옥인데 그 크기는 8,000요자나(대략 10,000km)가 된다. ‘텅 빈(agha)’곳이란 항상 열려 있다는 뜻이다. ‘끝없이 깊은’은 발판을 얻을 수 없음을 뜻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너무 어두워서 눈의 알음알이조차 일어날 수가 없다.”(초불연 상윳따 6권, 300번 각주, 각묵스님)
사이지옥은 틈새지옥이라 볼 수 있습니다. 빛이 들지 않는 사각지대입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빛이 들지 않는 지역이 있듯이 버려진 곳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세계와 세계 사이에 있는 그곳은 칠흑 같은 어둠에 쌓여 있는 곳이라 합니다. 평생 빛 한번 볼 수 없기 때문에 안식(眼識)이 일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보살이 입태할 때와 보살이 태어날 때
비행기를 타고 가다 보면 광막한 우주와 접하게 됩니다. 낮에 구름 위를 날아 갈 때 그 푸르름은 모니터상에서 보는 청색이 아닙니다. 깊고 그윽하여 그 끝을 알 수 없는 광막한 푸르름 입니다. 밤에는 어둠과 마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보통 어둠이 아닙니다. 색으로 표현되는 black이 아니라 ‘vast blackness’입니다. 광막한 black입니다. 한자로 표현한다면 검을 흑(黑)자가 아니라 검을 현(玄)자입니다. 깊이가 있는 어두움입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광막한 어둠을 비행기 타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어두둠에 대하여 “덮개도 없고 바닥도 없는 캄캄한 칠흑 같은 암흑(lokantarikā aghā asaṃvutā andhakārakā andhakāratimisā)”이라 했습니다.
광막한 어둠에서 사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견을 가진 자들이 사는 지옥입니다. 우주가 성주괴겁해도 지옥문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수 겁 동안 사는 자들은 한번도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 올 때가 있습니다. 보살이 입태할 때, 보살이 태어날 때 입니다. 디가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되어 있습니다.
“덮개도 없고 바닥도 없는 캄캄한 칠흑 같은 암흑에 둘러싸여 그와 같은 광대한 초월적 힘과 이와 같은 광대한 초월적 능력이 있어도 빛을 비추지 못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도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신들의 위력을 압도하며 나타난다. 그곳에 태어난 뭇삶들이 있는데, 그들도 그 빛으로 ‘벗이여, 참으로 다른 뭇삶들도 여기에 태어났구나.’라고 서로를 알아 본다.”(D14, 전재성님역)
사견을 가진 자들이 태어나는 사이지옥에서 빛을 볼 수 있는 때 가 두 번 있습니다. 보살이 입태할 때와 보살이 태어날 때 입니다. 그 외에는 칠흑 같은 광막한 어둠입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우주끝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음을 말합니다.
사이지옥에 있는 중생들은 빛이 들어 오자 그제서야 서로를 알아 봅니다. 경에서는 “벗이여, 참으로 다른 뭇삶들도 여기에 태어났구나.”라 했습니다. 사견을 가진 자들끼리 서로 알아 보는 것입니다. 삿된 견해를 가진 자들이 암흑의 사이지옥에 한량 없는 세월을 보내다가 빛을 본 것입니다. 그 빛은 지혜와 자비의 광명입니다. 부처님이 출현했기 때문에 지옥을 탈출할 가능성이 생긴 것입니다.
암흑보다 더 크고 무서운 암흑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사이지옥에 떨어진 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수행승들이 “세존이시여, 그곳의 암흑보다 다른 더 크고 무서운 암흑이 있습니까?”(56.46) 라며 묻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더 크고 무서운 암흑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성제를 모르면 사견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2연기에서 무명에 대하여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S12.2) 라고 명확하게 정의했습니다.
천수경에 십악참회가 있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치암중죄금일참회(痴暗重罪今日懺悔)’가 있습니다. 대부분 “어리석은 죄업 오늘 참회합니다.”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어리석음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명확하게 정의 되어 있습니다. 초기경전에서 “세상에 어떤 사람이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스럽고, 성내는 마음을 가지고, 삿된 견해에 사로잡혔다면”(S42.6) 라는 정형구가 있습니다. 여기서 열 번째 항을 보면 ‘삿된 견해’라 되어 있습니다. 천수경에서 치암은 삿된 견해를 말합니다. 영원주의 허무주의 같은 견해입니다. 구체적으로 육사외도 스승의 견해입니다.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성제를 모르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사성제를 모르면 사견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견에 빠지면 오역죄를 짓는 것 보다 더 아래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것은 빛이 전혀 들지 않는 사각지대입니다. 우주가 괴멸되어도 지옥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사이지옥입니다. 세계와 세계사이 사각지대에 있다고 해서 사이지옥입니다. 무간지옥 보다 더 무서운 곳이 암흑의 사이지옥입니다. 그런데 암흑보다 더 크고 무서운 암흑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2017-02-16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혼을 심판하는 저울, 이집트보물전을 보고 (0) | 2017.02.19 |
---|---|
초기경전에 집착하는 나는 불교근본주의자 (0) | 2017.02.17 |
“패권주의가 뭐 어때서?” 정치낭인 정청래와 함량미달 손혜원의 정치인식 (0) | 2017.02.05 |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저 높은 바위산처럼, 인생의 파란곡절이 일어났을 때 (0) | 2017.02.01 |
괴이한 인구피라미드 (0) | 2017.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