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저 높은 바위산처럼, 인생의 파란곡절이 일어났을 때
삶에서 ‘파란’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가에 돌을 던졌을 때 물결이 이는 것과 같습니다. 차를 타고 나서다가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습니다. 급한 마음에 오로지 앞만 보고 가다가 옆에서 나오는 차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거주지 골목이라서 큰 사고는 아닙니다. 다만 두 차문에 약간 긁힘이 일어난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애로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냥 보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보험처리하는 것을 보고서 몹시 불편했습니다. 아침 가라 앉은 마음에 파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삶에서 ‘곡절’이 있을 수 있습니다. 파란 보다는 더 센 것이 곡절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삶의 방향이 굽혀지기도 하고 때로 단절지기도 합니다.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 없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실제로 나에게도 닥칠 수 있습니다. 평온한 일상이 깨졌을 때, 삶에서 파란이 일어났을 때, 인생에서 곡절이 생겼을 때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사고는 접촉으로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생길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아무리 조심한다 하더라도 작은 방심과 자만에 따라 사고가 일어납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방어운전을 하는 등 늘 긴장하지만 상대방의 실수에 따라 영향을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 나와 무관한 남의 일처럼 여겨 졌던 것이 현실화 되었을 때 당혹해 합니다. 더 나아가 상대방을 원망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은 벌어진 것입니다.
인생에서 파란곡절이 일어 났을 때 후회하거나 분노하거나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모두 ‘접촉’에 따른 것입니다. 자동차 접촉사고가 난 것처럼 모든 것은 접촉을 원인으로 합니다. 하필이면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요인이 됩니다. 작은 사고이든 큰 사고이든 모두 접촉에 따른 것입니다. 일상에서 삶 역시 접촉에 따른 것입니다.
눈이 있어 무심히 쳐다 보는 행위도 접촉에 따른 것입니다. 여기에 의도가 실리면 업이 됩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듯이 행위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조건이 맞으면 과보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행위에 대한 과보는 즉각적 결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조건이 성숙되어야 나타납니다. 이를 ‘업이숙(kammavipaka)’이라 합니다. 행위에 대한 과보가 달리 익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저지른 행위가 지금 당장 과보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조건만 맞으면 과보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시간을 두고 달리 익는 것을 업이숙이라 합니다.
업보는 업이숙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에 따릅니다. 원인과 결과만 있다면 행위에 대한 과보는 즉각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맞지 않으면 시간을 두고 일어납니다. 사고가 일어난 것도 역시 조건이 맞았기 때문입니다. 하필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동차 사고는 접촉이 되었을 때 일어나듯이, 마찬가지로 모든 업보는 접촉에 따른 것입니다.
업이 익었을 때 결과로 나타납니다. 내가 부주의 해서 접촉사고가 났다면 이전에 나의 행위는 그런 사고가 날 가능성을 늘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능성이 현실화 되었을 때 사고로 나타납니다. 작은 사고이든, 큰 사고이든 행위에 대한 과보가 익은 결과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하루하루가 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태로울 수가 있습니다. 자동차 운전을 하다 보면 순간순간 위험을 느낍니다. 고속도로에서 본 자동차사고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것이 마치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한시도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위험한 세상에서 파란이 일어나고 곡절이 발생합니다. 이럴 때 요청되는 것이 ‘평정’입니다. 사무량심에서 말하는 우뻬카(upekhā)를 말합니다.
평정이 가장 수승한 이유
사무량심은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을 말합니다. 이를 네 가지 거룩한 마음이라 합니다. 청정한 삶은 사무량심의 실천으로 완성됩니다. 자애의 삶은 어머니가 외동아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어떤 차별도 없이 중생을 사랑하는 보편적이며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연민의 삶은 근심과 번뇌로 괴로워하는 모든 중생에 대한 연민의 태도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기쁨의 삶은 다른 사람의 성공, 복지, 행복을 축하하고 그것에 공감하는 삶을 말합니다. 평정의 삶은 인생의 모든 파란과 곡절에서 침착과 평정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네 가지 거룩한 마음, 사무량심에서 우열을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순위를 정한다면 ‘평정’일 것입니다. 사무량심에서 4선정에 이를 수 있는 것은 평정이 유일합니다. 나머지는 초선에서 3선까지만 가능합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평온수행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애 등에 대해 세 번째 선을 닦아야 함을 말합니다. 평온수행을 가장 마지막에 하는 것은 4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온수행이 가장 수승한 이유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자애, 연민, 기뻐함에 대해 위험을 보아야 한다.”(Vism.9.88) 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거칠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그들이 행복하기를!” 라든가, “그들이 고통없기를!’라 했을 때 이는 ‘마음의 주의기울임(manasikara)’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적의와 찬사가 가까이 있고 또한 기쁨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거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온의 경우 고유한 성질로 인하여 4선에서 완전한 평온에 이를 수 있습니다. 4선정에 대한 정형구를 보면 “행복도 고통도 버려지고, 기쁨도 근심도 사라진 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S45.8) 이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4선정에서 키워드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입니다. 이를 한자용어로 ‘사념청정(upekhāsatipārisuddhiṃ)’이라 합니다.
사무량심에서 가장 수승한 경지는 평정입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두 가지 행복이 있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기쁨을 대상으로 삼는 행복과 평정을 대상으로 삼는 행복이다. 이 두 가지 행복 가운데 평정을 대상으로 삼는 행복이 탁월하다.”(A2.74)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파란과 곡절이 일어났을 때
평정한 마음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아 가는데 있어서 어떤 바람을 맞을 지 모릅니다. 부처님은 팔풍(八風)이라 하여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A8.6)”을 말합니다. 여덟 가지 바람은 삶에 있어서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바람에 휘둘릴 수 업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파란곡절이 일어났을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에게 이득이 생겨나면, 그는 ‘이러한 이득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불이익이 생겨나면 ‘이러한 불이익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명예가 생겨나면, 그는 ‘이러한 명예가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불명예가 생겨나면 ‘이러한 불명예가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칭찬이 생겨나면 ‘이러한 칭찬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비난이 생겨나면 ‘이러한 비난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행복이 생겨나면 ‘이러한 행복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불행이 생겨나면 ‘이러한 불행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A8.6, 전재성님역)
어떤 경우에서라도 평정을 유지해야 합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방법은 있는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비난한다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알아차림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이익이 생겼다면 “이러한 이득이 나에게 생겨났는데”라며 먼저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이러한 이득이 영원하지 않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파란곡절이 생겼을 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저 높은 산의 바위처럼
처음 부터 비난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비난 받을 만하기에 비난 받는 것입니다. 비난이 처음부터 있어서 비난 받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 한다면 마음의 평정을 잃어 버릴 것입니다. 행복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지금 행복하다고 하여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불행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득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불익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명예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불명예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칭찬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비난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행복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불행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는 이미 생겨난 이득에 경도되고 불익을 배척하고, 이미 생겨난 명예에 경도되고 불명예를 배척하고, 이미 생겨난 칭찬에 경도되고 비난을 배척하고, 이미 생겨난 행복에 경도되고 불행을 배척한다.
이와 같이 그는 경도와 배척에 빠져서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히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A8.6, 전재성님역)
일반사람들은 대부분 팔풍에 휘둘려 삽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아주 단단한 바위덩이가 비람에 움직이지 않듯, 이와 같이 현명한 님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Dhp.81)라 했습니다. 평정을 유지한 자는 마치 저 높은 산의 바위처럼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인생의 파란곡절을 겪어도 흔들리지 않고 평정을 유지합니다.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
이러한 인간의 원리들은
항상하지 않고 변화하고야 마는 것이네.
이러한 것들을 알고 새김있고 현명한 님은
변화하고야 마는 것들을 관찰한다.
원하는 것이라도 그의 마음을 교란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것도 혐오를 일으키지 못하네.
그것에 대하여 매혹이나 혐오는
파괴되고 사라져서 존재하지 않으니
경지를 알고 티끌의 여읨과 슬픔의 여읨을 올바로 알아
님은 존재의 피안에 이르네.”(A8.6)
2017-02-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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