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도 네 탓도 아니다, 괴로움은 일어날 만 해서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분명히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나로 인해 발생 되었다면 가슴을 치며 “내 탓이오!”라 할 겁니다. 그럼 전생에 지은 업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왜 저를 낳으셨나요?”라며 부모를 원망할 수 있습니다. 내 돈 떼 먹고 달아난 자에게는 “네 탓이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전생에 있었던 것은?
오늘은 어제의 연속입니다. 이 생은 전생의 연장입니다.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는 같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고 변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조건이 바뀌었습니다. 이 생의 나와 전생의 나 역시 같지 않습니다.
조건이 바뀌었음에도 행위자와 경험자를 동일시 하여 “내 탓이요!”라 한다면 괴로움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전생에 지은 것까지 내 탓으로 본다면 숙명론자입니다. 또 변치 않는 나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영원주의자가 됩니다.
행위자와 경험자가 다르면, 과보는 있으나 작자가 없다면,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은 모두 남 탓이 되어 버립니다. 창조주를 원망하거나, 부모를 원망하거나, 젊은 시절 죄를 지은 그 놈인 자신을 탓하게 됩니다. 남 탓해서는 괴로움이 해결 되지 않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접촉에 따른 것입니다. 눈, 귀, 코 등 감각기관이 형상, 소리, 냄새 등과 접촉하여 발생된 것입니다. 생각도 접촉에 따른 것입니다. 이전에 행위에 대한 과보가 익어 느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이 있는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영원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17)
행위자와 경험자를 동일시 했을 때 상견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늘 죄책감에 시달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입니다. 후회해 보았자 불선업만 짓습니다. 한때 저지른 실수에 대하여 조건이 바뀌었음에도 현재의 자신과 동일시 하는 것입니다. 이는 처음부터 죄의식에 따른 괴로움이 본래 있는 것이라고 상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 됩니다. 괴로움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접촉에 따라 조건발생 함에도 늘 죄의식에 시달린다면 죄의식에서 벗어 날 수 없을 겁니다.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을 당한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17)
행위자와 경험자가 다르다면 단견에 빠질 것이라 했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은 전적으로 남 탓 입니다. 심지어 젊은 시절 그 놈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댓가를 지금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억울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죄를 지어 놓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행위에 대한 과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단멸론자의 견해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은 일어 날 만 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내 탓도 아니고 남탓도 아닙니다. 내 탓으로 보면 평생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남 탓으로 보면 무책임한 사람으로 비난 받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는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하는 연기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내 탓과 남 탓은 양극단 입니다. 양극단을 떠난 중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조건발생 입니다. 괴로움은 접촉으로 발생 됩니다. 괴로움을 느꼈을 때 내 탓이라거나 남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단지 알아차리면 됩니다. 괴로움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것으로 보면 됩니다. “아, 나에게 괴로움이 일어났구나!”라고.
2017-01-2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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