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선악대차대조표는 다시 쓰여져야
버스가 떠나 버립니다. 스마트폰에 글을 쓰느라 잠시 한눈 판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슬슬 떠나는 버스를 따라 가지만 야속하게 버스는 떠나고 말았습니다. 추운 겨울날 아침의 일입니다.
버스를 운전하는 사람이 야속했습니다. 잠시 세워 주면 되려만 그것을 참지 못하여 못 본채 한 것이 몹시 속이 상했습니다. 버스기사가 ‘자비로운’ 사람이라면 충분히 태워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멈춘 그 시간에 타지 않았다고 하여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만일 멈추어 주어서 버스를 타게 되었다면 “고맙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작은 배려에 감동합니다. 사소한 것에 신경 써 주었을 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존중’과 ‘자애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모른 체 합니다. 자신 한몸 편하기 위해서 모른 체 합니다. 귀찮고 번거로워서 모른 체 합니다. 몰라서 못했다면 용서가 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모른 체 한다면, 알면서도 안한 것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것을 안한 것이라면 ‘죄악’이라 봅니다.
폐 끼치지 않고 착하게 살면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아 갑니다. 때 되면 밥먹고 때 되면 자는 일입니다. 먹고 살아야 하기에 일을 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오늘도 내일도 똑 같은 일상을 반복합니다. 그렇게 세월 보내다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 합니다. 인생의 선악대차대조표에는 아마 악행이 더 많을 것입니다. 착하게 살았음에도 선행보다 악행이 더 많은 것입니다. 선악대차대조표에 악이 더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착하게 살면 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인다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착하게 살면 된다”라고 말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입니다. 또한 법을 잘 지키는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 착하게 산다는 것이 내면적인 것이라기 보다 외향적인 것이기 쉽습니다. 법과 질서를 잘 지키는 것과 내면적인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법과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이 외면적으로 착하게 사는 것이라면, 내면적으로 착하게 사는 것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양심과 수치심을 말합니다. 그런데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두 기둥과 같다고 합니다. 만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회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약육강식의 동물세계나 다름 없을 것입니다. 또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면수심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법과 질서로 유지 되고 있습니다. 만일 법이 무너지면 질서도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남에게 폐끼치 않고 착하게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폐끼치 않고 살면 그 뿐이라 하지만 내면의 마음을 계발하지 않았을 때 언제든지 악행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욕망으로 사는 이유가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즐기는 삶에 대하여
누구나 즐기는 삶을 살아 갑니다. 즐긴다는 말 자체가 행복을 뜻하기도 합니다. 행복을 뜻하는 빠알리어 ‘수카(sukha)’는 안락, 즐거움, 행복의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행복하게 삽시다”라고 말한다면 “즐겁게 사세요”라는 말과 동의어가 됩니다.
즐겁게 산다는 것은 대체로 욕망을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먹는 것도 즐기는 것이고, 잠자는 것도 즐기는 것이고, 이성과 함께 하는 것도 즐기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재물과 명예도 즐거움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식욕, 수면욕, 성욕, 재물욕, 명예욕이라 하여 ‘오욕’를 즐기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일생동안 ‘오욕락(五欲樂)’을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욕락은 욕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욕망이 없다면 오욕락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결국 즐기는 삶입니다. 행복이라 말하지만 즐기는 삶입니다. 행복과 안락과 쾌락과 즐거움은 모두 동의어입니다.
욕망을 살아 가는 인간은 또한 필연적으로 분노로 살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욕망과 분노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입니다. 늘 욕망과 분노는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 있는 곳에 분노가 있고, 분노가 있는 것에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과 분노가 한몸인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것은 느낌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는 거머쥐려 하고, 괴로운 느낌이 발생 했을 때는 밀쳐 내려 합니다.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만 있습니다. 대상에 대하여 즐거은 느낌이 일어나면 거머 쥐려 하는 것이 욕망이고, 대상에 대하여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밀쳐 내려 하는 것이 분노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욕망과 분노로 살아 갑니다. 매순간 욕망과 분노로 살아 갑니다.아니 일생동안 욕망과 분노로 살아 갑니다. 이렇게 욕망과 분노로 살아 가는 삶이 어리석은 삶입니다. 욕망과 분노의 삶은 괴로움을 야기하고 결국 악처로 이끌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뭇삶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아 간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삶이 요청 됩니다.
인생의 선악대차대조표는 다시 쓰여져야
착하게 산다고 하지만 대부분 욕망으로 살아 갑니다. 어쩌면 욕망으로 형성된 욕계에서는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을 계발하지 않으면 결코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욕망과 분노로 살아 가면서 법과 질서에 순응한다고 하여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법과 질서가 무너지면 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등 언제든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내면적인 법과 질서입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을 양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양심을 순수한 우리말로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라 합니다. 부끄러움과 양심은 동의어입니다. 남에게 폐끼치 않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남에게 폐끼치 않고 착하게 살아 왔다고 해서 결코 잘 산것이라 볼 수 없습니다. 대부분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아 갑니다. 한평생 욕망과 분노로 일생을 살았다면 악행이 더 많습니다. 인생의 대차대조표에서 선행과 악행을 비교해 본다면 악행이 더 많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삶입니다.
지혜로운 삶은 욕망과 분노로부터 멀리 떠난 삶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삶입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남에게 폐 안끼치고 착하게 살면 그만이지 뭐”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욕망과 분노에 가득한 삶을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착하게 사는 것도 좋지만 지혜롭게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선악대차대조표는 다시 쓰여져야 합니다.
2017-01-2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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