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고 안락한 삶인가? 수행하며 봉사하는 삶인가?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앙굿따라니까야를 보면 ‘둘의 모음’이 있습니다. 법수(法數)별로 구성되어 있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둘의 모음을 보면 두 개의 대립되는, 또는 비교 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금강경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재보시와 법보시의 관계에 대해서도 “두 가지의 보시가 있다. 물질적 보시와 정신적 보시이다. 이 가운데 정신적 보시가 더 수승하다.”(A2.144) 라는 식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법수에 따라 두 부류의 사람, 세 부류의 사람, 네 부류의 사람 등으로 구별해 놓고 있습니다. 그 중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향유하는 사람과, 수행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아 가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대게 전자의 삶을 살아 갑니다.
부끄럽고 창피한 삶
이전에는 편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직장 다니던 시기였고, 종교적 삶을 살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컸습니다. 특히 노후대책입니다. 돈이 없으면 인간적인 생활도 할 수 없고 노후도 보장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서 가능하면 돈을 많이 벌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돈이라는 것이 벌고자 한다고 해서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식하는 자가 돈에 환장에서 단타매매로 몸부림쳐보지만 원금만 까지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에는 ‘욕망’이 개입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십년 동안 이곳 저곳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12년 전의 일입니다. 직장을 그만 두니 할 일이 없어 졌습니다.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인생이 전개 된 것입니다.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욕망에서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직장에 매여 있어서 글쓰기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직장을 마치면 집에서 편히 쉬는 개념이었습니다. 주말 역시 당연히 쉬는 개념이었습니다. 직장 문을 나서는 순간 직장 일을 깨끗이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일인사업자로서 삶을 살다 보니 여유가 있습니다. 금전적 여유가 아니라 정신적 여유입니다. 일인사업을 하여 큰 돈을 벌 수 없습니다. 다만 현상 유지하면 다행입니다. 자연스럽게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욕심, 노후를 대비하여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욕심을 접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글을 쓰다 보니 점점 욕망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되어 어느 순간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접었습니다.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욕심,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욕심을 버리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욕심하나 내려 놓아도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 줄 이전에는 몰랐습니다. 노후에 대한 염려로 옆도 쳐다 보지 않고,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오로지 앞으로만 달려 가는 경주마처럼 살아 온 삶이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았을 때 비로서 돌아 보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잘못되었다!
‘인생비육십(人生非六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 육십이 되어서 뒤를 돌아 보니 ‘모든 것이 다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지나온 삶을 되돌아 보니 잘못 살아온 것입니다. 원인을 분석해 보니 욕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믿고 있었던 직업관, 인생관 등 가치관이 잘못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불행중 다행이랄까 사십대 중반에 발견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입니다.
더 이상 욕망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매일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욕망을 누그러뜨려 줍니다. 사실 더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편하고 안락한 삶을 목표로 한다면 굳이 힘들게 매일 글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눈으로, 귀로 오욕락을 즐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오욕락을 위하여 돈이 있어야 하기에 돈 버는 일에 올인 했을 때 시간은 잘도 흘러 갈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돌아 볼 날이 있을 때 분명히 “모든 것이 다 잘못되었다!”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두 갈래의 길에서
이전에는 많이 가져야만 베푸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착각임을 알았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베풀고 나누는 삶이 가능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초기경전의 힘이 큽니다.
가르침에 따르면 ‘능력껏 보시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 있는 “능력에 따라 보시하고” (S1.41) 라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이 한마디가 보시의 전부를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이 다음에 돈을 많이 벌어서 큰 보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나누고 베푸는 삶입니다. 아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많이 배운 자, 보다 높은 학위가 있는 자, 수해경력이 많은 자가 가르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착각입니다. 베풀고 나누는데 있어서 지식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식도 “능력에 따라 보시하고” (S1.41) 라는 가르침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아는 만큼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 다음에 박사학위를 취득해서 세상에 봉사하려 한다거나, 어느 정도 수행의 경지를 이루어 놓은 다음에 세상에서 법을 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아는 만큼 알려 주는 것입니다.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편하고 안락한 삶과 수행하며 봉사하는 삶입니다. 편하고 안락한 삶은 누구나 바라는 삶이고 누구나 그렇게 살아 가는 수동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수행하며 봉사하는 삶은 극소수이고 누구나 함부로 그렇게 살아 갈 수 없는 적극적인 삶입니다. 대게 편안하고 안락한 삶은 ‘중생의 길’이라 볼 수 있고, 수행하며 봉사하는 삶은 ‘보살의 길’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무욕(無慾)의 잔잔한 행복
대부분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일부 소수의 사람들은 수행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아 갑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은 험하고 불편하고 위험한 길입니다. 그럼에도 기꺼이 그 길로 가고자 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자비심’에서 일 것입니다. 뭇삶에 대한 자비심이 없다면 돈도 안되고, 시간낭비이고, 힘만 드는 일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편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자에게는 정신적 성장이나 향상이 없습니다. 눈이나 귀 등으로 오욕락을 즐기는데는 열심이지만 정신능력을 계발하는데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저 베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넘치면 배설하는 삶의 연속입니다.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밖에 모르는 이기적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착하고 폐끼치 않는 삶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비교해 보면 ‘착하고 건전한 업(kusala)’보다는 ‘악하고 불건전한 업(akusala)’이 더 많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행하며 봉사하는 삶은 최상의 보살도를 실천하는 자들입니다. 많이 가졌다고 하여, 많이 배웠다고 하여 보살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침에 “능력에 따라 보시하고” (S1.41) 라는 말이 있듯이, 능력껏 보시하고 아는 만큼 알려 주는 삶입니다.
수행과 봉사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실천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도 수행하며 봉사하는 삶만 못합니다. 욕망충족 따른 거친 행복은 욕망을 내려 놓음에 따라 얻어지는 잔잔한 행복만 못합니다.
2017-03-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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