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자들에게 명지(明智)의 촛불을
“이것 외 없다.” 이말은 “이것 외 다른 것은 없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더 확장하면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말은 외도들이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라는 외도들의 말을 경계했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접하고 있는 요즘은 “부처님 가르침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불교를 종교로 삼고 있습니다. 라따나경에서와 같이 이 세상에서 부처님 가르침과 견줄만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부처님 가르침 보다 더 훌륭한 가르침이 있다면 그 쪽으로 가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훌륭한 줄 알기에 매일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느낀 것은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교학적으로만 알고 수행이 따르지 않는다면 반쪽에 불과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르침이 훌륭한 줄 알지만 가르침이 왜곡되고 가르침이 변질 되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도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햄버거파티
3월 17일 금요일 서울나들이 갔습니다. 수도권에 살기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는 것이 큰 마음 먹는 것 같아 나들이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들이 가면 만나 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 들러야 될 곳도 있습니다.
3월 17일 저녁에 불교역사상 최초로 촛불법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촛불법회에 앞서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습니다. 장충동에 위치한 ‘참여불교재가연대’사무실입니다. 재가연대에서 촛불법회 준비를 하고 있는데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는데 무언가 거들 것이 없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밥먹을 시간이 없을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무총장과 문자를 하여 햄버거를 사가지고 가기로 했습니다.
재가연대 사무실에서 햄버거파티가 열렸습니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이미 준비는 다 끝난 상태이었기 때문에 햄버거와 감자스틱을 먹으면서 담소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햄버거만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젊은 피 수혈?
참여불교재가연대가 활기에 넘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두 명의 젊은 간사들 때문입니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 온 이십대의 두 남녀 간사들로 인하여 활력이 넘쳐나는 듯 보였습니다. 이럴 때 하는 말이 아마 ‘젊은 피’라는 용어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점차 고령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고령화는 승가도 예외가 아닙니다. 어느 스님은 자신의 수행일기에서 결재철 선방풍경을 자세히 인터넷 카페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스님의 글에 따르면 선방에서 주류는 50대라 합니다. 이런 현상은 재가불교단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재가활동가들의 평균연령대가 50대입니다. 그래서일까 머리가 허옅게 센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승가에서나 재가단체에서나 젊은 피를 필요로 합니다. 대학가에 가면 이십대 청년들로 활기 넘치듯이, 승가나 재가단체에서 이십대가 들어 온다면, 젊음 그것 자체만으로 활력을 줍니다. 참여불교재가연대의 두 젊은 간사들의 활동을 보면서 ‘젊은 피’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 올려 집니다.
참여불교재가연대에 가입했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두 개의 긴 플레카드, 구호가 적힌 커다란 스치로폴 판대기, 책받침 모양의 구호가 적힌 두꺼운 종이, 성명서, 그리고 목탁에 이르기 까지 집회를 위한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재가연대 사무총장과 젊은 두 간사들이 준비한 것입니다. 이제 시간에 맞추어 조계사 일주문 앞으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울긋불긋 조계사
조계사에 도착했습니다. 한국불교의 총본산이라 하지만 이제는 관광지가 된 듯 합니다. 고궁과 인사동을 잇는 삼각벨트 안에 조계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평일임에도 외국인들의 모습을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조계사는 새봄을 맞이하여 울긋불긋 매혹적인 연등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연등은 불교를 상징하는 것과 같습니다. 절에 가면 법당에 연등이 달려 있고,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연등축제를 합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사 경내의 연등은 화려하기 그지 없습니다. 처음 보는 외국인들에게는 가슴이 설레일 것입니다.
연등은 밤중에 위력을 발휘합니다. 컴컴한 어둠에서 창호에 비친 연등불빛은 주변을 밝혀 줍니다. 그래서 ‘무명을 밝힌다’는 의미로 말하기도 합니다. 컴컴한 방에 촛불을 켜면 일시에 밝아져서 모든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부처님은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S56.11) 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연기법과 사성제로 무명을 타파한 것입니다.
조계사 연등은 화려합니다. 밤이 되면 창호에 새어 나오는 은은하고 아름다운 불빛이 장관을 이룹니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현실은 여전히 무명에 덮여 있습니다. 연등은 울굿불긋 컬러풀 하여 외국인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지만, 현실은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승가를 밝혀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 뜻 있는 스님들과 재가자들이 촛불을 들게 되었습니다.
촛불을 들어야 하는 이유
촛불을 들어야 하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아니 수 십 가지, 수 백 가지 됩니다. 그것은 쌓이고 쌓인 한국불교의 적폐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불교의 모순과 위선과 거짓 때문입니다. 스님들이 가르침대로 살지 않아 발생된 것입니다. 그 결과가 불자들의 이탈이 가속화 되었습니다. 무려 3백만명이나 불교인구가 감소된 것입니다.
촛불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수 백 가지가 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비법(非法)이 활개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부처님이 열반했을 때도 마찬지였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자 나이 든 비구는 ‘잔소리 하는 사람이 없어졌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깟사빠존자는 위기를 느꼈습니다. 가르침이 변질 될 것을 우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하깟사빠 존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벗들이여, 우리는 가르침과 계율을 결집합시다. 예전에 가르침이 아니었던 것이 번영하고 가르침이었던 것은 쇠퇴하고, 예전에 계율이 아니었던 것이 번영하고 계율이었던 것은 쇠퇴하고, 예전에 가르침이 아니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강해지고 가르침이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약해지고, 예전에 계율이 아니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강해지고 계율이었던 것을 설하는 자가 약해집니다.”(Vin.II.285, 율장소품, 전재성님역)
마하깟사빠는 부처님이 열반하고 난 다음 결집을 주도했습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제1차 결집’이라 합니다. 마하깟사빠존자가 결집을 주도한 이유는 단 한가지 입니다. 정법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내버려 두면 정법이 변질되어 비법이 활개 칠 것을 염려 했기 때문입니다.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마하깟사빠존자는 가르침과 계율을 외우자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르침은 담마(Dhamma)라하며 한자어로 법(法)이라 합니다. 계율은 위나야(Vinaya)라 하며 율(律)을 말합니다. 가르침이 변질 되고 계율이 사라졌을 때 불교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담마가 힘을 잃고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계율이 힘을 잃고 계율 아닌 것이 득세하기 전에, 담마를 말하는 사람은 약해지고 담마 아닌 것을 말하는 사람은 강해지기 전에, 계율을 말하는 사람은 약해지고 계율이 아닌 것을 말하는 사람은 강해지기 전에 담마를 함께 외웁시다. 계율을 함께 외웁시다.”(일아스님역) 라고 호소한 것입니다.
가르침(Dhamma)과 계율(Vinaya)을 법(法)과 율(律)이라 합니다. 이를 한단어로 표시하면 법률(法律)이 됩니다. 어느 나라든지 법률이 있습니다. 법률이 있어서 질서가 유지됩니다. 만일 법률을 위배한다면 처벌 받을 것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가르침대로 실천하지 않고 계율을 위반하고 산다면 당연히 비판받을 것입니다. 한국불교가 그렇습니다. 특히 조계종이 그렇습니다. 조계종에서는 담마 아닌 것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그런 조계종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집단 같습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면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이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같다고 했습니다. 두 개의 기둥이 무너진다면 세상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는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계나 다름 없습니다.
짐승들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기에 아무하고나 붙어 새끼를 낳습니다. 짐승들은 가장 힘센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합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른다는 것은 도덕이 무너진 세상입니다.
세상을 지탱하는두 개의 기둥이 무너졌을 때 무법천지가 됩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시대가 됩니다. 가장 힘센 자가 모든 것을 독식합니다. 법과 율이 무너지고,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집단에서 이런 현상을 봅니다.
국민들은 헌법이 유린 되었을 때 촛불을 들었습니다. 작년 10월 29일 처음 촛불을 든지 4개월만에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먹통정권’은 붕괴되었습니다. 마침내 불교에서도 촛불을 들었습니다.
3월 17일 금요일 저녁 불교역사상 최초로 촛불이 타오른 날로 기록될 것입니다. 이름하여 ‘총무원장 직선실현을 위한 1차 촛불법회’입니다. 1차 촛불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이제 시작입니다. 앞으로 2차, 3차 촛불이 계속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집단에게 드는 촛불입니다.
왜 조끼를 입었나?
조계사 일주문 앞에 사람들이 속속 모여 들고 있습니다. 주로 재가활동가들과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준비한 조끼를 입었습니다. 연노랑조끼에는 ‘한국불교 직선제가 희망이다!’ ‘불교개혁 직선제가 시작이다!’와 같은 구호가 적혀 있습니다. 이런 조끼에 대하여 두 가지 시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집회에 대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빨간조끼 입은 사람들입니다. 빨간조끼는 가장 강성이라 일컫는 ‘금속노조’를 떠 올리게 합니다. 집회 때 마다 가장 선두에서 서서 구호를 외치고 과격시위를 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보수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전문시위꾼이라하여 백안시 합니다.
작년 촛불집회에서 조끼입은 사람들은 그다지 환영 받지 못했습니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 각계각층에서 심지어 가족단위로 나온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속한 단체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일관하자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대신 노래 등으로 문화제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본다면 조끼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습니다.
조끼에 대한 두 번째 시각은 리더로서의 역할입니다. 누군가는 이끌어 가야 합니다. 조직화 되어 있지 않으면 흐지부지 될 것입니다. 강한 결속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다’라는 일체감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끼를 입는다면 긍정적입니다. 조끼를 입었다는 것은 조직화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6시가 되자 조계사 일주문 앞 계단에 도열 했습니다. 조끼를 입은 사람과 입지 않은 사람 합하여 50명이 넘은 것 같습니다. 이날 촛불집회가 끝날 때 80여명이라 했습니다. 불교적 현실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 지내는 것처럼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세상에 알리기 위한 수단입니다. 주로 교계신문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당지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회는 인권변호사 김형남님이 보았습니다. 비장하기 보다 농담을 섞어 가며 우스개 소리를 하며 자유로운 분위기로 진행 했습니다. 조끼 입은 사람들은 다 아는 사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자회견에 앞서 이날 실질적인 리더라 볼 수 있는 허정스님이 대변인 자격으로 발언이 있었습니다. 어느 기자가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뚜렷한 계획은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는 ‘물같은 조직’의 특징입니다.
큰 조직에서는 관료화 되어 있어서 예측가능한 계획을 세우지만 작은 조직에서는, 특히 게릴라와 같은 조직에서는 앞날을 예측하기 힘듭니다. 마치 물 같은 조직입니다. 물은 용기에 따라 형태를 달리 합니다. 자발적 모임의 단체에서는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대응해야 하기 때문에 물과 같은 조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드럽고 유연한 조직입니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이 이긴다는 노자의 말이 있듯이, 물과 같은 조직이기 때문에 “뚜렷한 계획은 없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그것은 ‘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마치 기우제를 지낼 때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 총무원장 ‘직선제가 실현 될 때까지’ 촛불을 드는 것입니다.
도중에 지리멸렬했지만
대불청회장을 지낸바 있는 전준호님이 ‘경과보고’를 했습니다. 이날 최초의 촛불을 들기 까지 거의 일년 걸렸습니다. 시발점은 작년 4월부터 열린 사부대중백인대중공사 때부터입니다. 총무원장선출방식을 논의하기 위한 대중공사가 전국을 순회하며 열렸습니다. 그 때 직선제가 60%를 차지하여 염화미소법을 압도적인 표차로 눌렀습니다. 이런 여세를 몰아 총무원장직선제 모임이 태동된 것입니다.
전준호님의 경과보고에 따르면 최초의 모임은 2016년 5월 23일 ‘자콥’이라는 음식점입니다. 처음으로 준비위 성격의 모임을 가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준비위는 도중에 ‘지리멸렬’ 되었습니다. 그것은 종회에서 구성된 직선특위 명단에 허정스님이 빠진 것입니다. 이유는 문자 보낸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문자내용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여 해촉해 버린 것입니다.
종회에서 구성된 직선특위에서 한가지 잘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것입니다. 공신력 있는 기관에 의뢰하여 스님들 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놀랍게도 직선제 찬성율이 81%에 달했습니다. 대부분 스님들이 총무원장 직선제를 찬성한 것입니다.
81%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대다수 스님들이 직선제를 찬성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모임에 탄력을 붙게 했습니다. 지리멸렬 했던 모임도 정비되었습니다. 재가단체와 협력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재가활동가들이 가세 하여 군대용어로 말하면 전투력이 막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조직화’ 되었습니다. 모든 역량을 총무원장직선 실현으로 쏟아 부은 것입니다. 그런 조직화의 표시가 바로 연노랑색의 조끼라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요구하는가?
기자회견문은 도정스님이 낭독했습니다. 제주에서 비행기 타고 올라 왔습니다. 스님은 정봉주와 함께 팟캐스트방송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총무원으로부터 징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날 참석한 스님들은 대체로 총무원으로부터 징계받거나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스님들입니다. 81%에 해당되는 수 많은 스님들이 있지만 공개적인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입니다.
도정스님의 목소리는 우렁찼습니다. 쩌렁저쩌렁한 목소리가 총무원청사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릴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였습니다. 사자후를 연상케 합니다. 한국불교 현실에 대하여 ‘할’하는 듯 했습니다. 기자회견문 낭독에 이은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조계정 중앙종회는 직선제에 대한 검토와 논의를
통해 직선제를 통과시킴으로써 대중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
하나, 자승총무원장 스님은 자신의 공약대로 직선제가
조속히 검토되고 관철될 수 있도록 일념의 노력을 하여야 한다.
하나, 우리는 2017년 10월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가
직선제에 의하여 실시될 수 있도록 그때까지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요지는 직선제공약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직선제공약대로 라면 당연히 이번 총무원장선거는 직선제로 치루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염화미소법 등을 만지작 거리며 시간 없다는 핑계로 또 다시 예전과 같이 그들만의 리그로 총무원장을 뽑겠다는 심산인 것 같습니다. 비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 다는 말이 있듯이, 공약사항이자 81%가 찬성한 총무원장 직선제가 실현될 때까지 촛불을 들겠다는 말입니다.
무명을 밝히는 등불
기자회견이 끝나고 도로 건너편 템플스테이 기념관 앞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일주문 앞이나 조계사 경내에서는 촛불집회를 할 수 없다는 총무원의 방침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강행하려 한다면 사유재산 침해라 합니다. 마치 제집이 있어도 제집에 들어 가지 못하는 것처럼 길거리에서 촛불집회를 한 것입니다.
준비한 양초와 종이컵에 촛불을 만들었습니다. 한번 붙은 촛불은 다른 초에 옮겨 붙어 또 다른 촛불이 생겨났습니다. 삽시간에 촛불이 이곳저곳에서 밝혀졌습니다. 비록 도시의 화려한 밤하늘이 환하다고 하지만 작은 촛불 하나의 불빛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무명을 밝히는 촛불이기 때문입니다. 건너편 일주문이 제아무리 화려하고 컬러풀한 연등으로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지만 뜻있는 불자들의 염원이 담긴 촛불에 견줄 수 없는 것입니다.
“별거 아니네!”라 한다면
템플스테이 기념관 앞에서 불자들은 촛불을 들었습니다. 아주 작은 촛불입니다. 이날 85명 가량 모였다고 합니다. 스님들은 칠팔명에 불과합니다. 이런 모임을 두고서 만약 누군가 “별거 아니네!”라 한다면 오산일 것입니다. 마치 작년 촛불집회에서 백만명이 모였음에도 어떤 이는 “거기에 참가하지 않은 국민이 훨씬 더 많거든?”라 했습니다. 이런 말이 우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아는 사실입니다.
이날 모임에는 홍보를 했음에도 그렇게 많이 모인 것은 아닙니다. 다들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기 위해서일지 모르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작은 인원이라 하여 별거 아니라고 여긴다면 판세를 잘못 읽은 것입니다. 이미 배후에는 143명의 스님 발기인과 156명의 재가자 발기인이 있습니다. 그것도 지난 2월 말 직선제공청회 당일 의사를 밝힌 숫자입니다.
오늘 든 촛불은 81%가 찬성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인들의 81%가 떠 받쳐 주고 있습니다. 아니 모든 불자들의 염원이 담긴 촛불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별거 아니네!”라며 무시해 버린다면, 집권기간 내내 불통으로 일관하다가 촛불의 힘으로 쫒겨난 자의 신세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여법하게 마무리하고
저편 건너 일주문 앞에서는 한스님이 ‘삼보일배’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온몸을 불사를 듯 불꽃처럼 살아 온 스님입니다. 저 스님의 간절한 바램대로 과연 기득권자들은 마음을 바꾸어 먹을까요?
밤이 어두워지자 촛불은 더욱 빛나는 것 같습니다. 이제 행진에 나설 때 입니다. 촛불을 들고 이동했습니다. 인도에서 인도로 짧은 이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는 사람들도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직선실현”구호를 계속 외칩니다.
거리 행진이 끝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 왔습니다. 발원문 낭독이 있었습니다. 마지대표 김현진님이 차분한 목소리로 낭독했습니다. 보현행원가, 산회가, 사홍서원으로 이날 역사적인 1차 촛불법회를 마무리 했습니다.
명지(明智)의 촛불을
도시의 불빛은 화려 합니다. 더 화려한 것은 조계사 일주문에 걸려 있는 연등입니다. 일주문에는 ‘대한불교총본산조계사’라 되어 있는데 글씨에도 불이 켜져 있습니다. 밤하늘의 어둠과 함께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밝힌 작은 촛불하나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무명에 덮여 있습니다. 법 아닌 것이 득세하고 계율은 무너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 무리들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지금 이대로 영원히!”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불교가 망하든 말든, 불자수가 줄든 말든 그들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뜻있는 스님들과 불자들은 무명의 조계종에 촛불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거짓과 위선과 모순에 대하여 무명을 밝히는 촛불입니다. 한국불교 역사상 최초로 작은 촛불이 타올랐습니다.
오늘 타오른 작은 촛불이 찻잔속의 미풍으로 그칠지, 찻잔속의 태풍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어둠은 밝음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자들에게 ‘명지(明智)의 촛불’을 듯 것입니다.
2017-03-1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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