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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컸나? 음주운전 보다 더 무서운 음주카톡

담마다사 이병욱 2017. 3. 28. 09:26

 

스님들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컸나? 음주운전 보다 더 무서운 음주카톡 

 

 

음주운전 보다 더 무서운 음주페이스북

 

최근 안희정지사의 페이스북 글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새벽 2시 가량 썼다는 페이스북에는 불편한 심경을 격한 어조로 토로 했기 때문입니다.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일어난 불편한 심기입니다. 상대방을 무너 뜨리기위해서는 인신공격 등 어떤 일도 마다 하지 않는 문재인의 극성지지자들에 대한 불편함에 대한 글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놓고 음주페이스북이 아니냐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강연에서 불편한 심기를 계속 토로하는 것으로 보아 음주페이스북은 아닌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술을 마신상태에서 페이스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현실과 가상공간의 구별이 없어진 시대에 술을 마시고 인터넷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술 마신 상태에서 이야기하면 횡설수설 하듯이, 가상 공간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허물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격한 분노의 감정을 표출 하는 등 평소와 다른 글을 올렸을 때 음주인터넷인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이는 음주페이스북이 음주운전 보다 더 무섭다고 말합니다. 음주운전은 자신만 처벌 받으면 문제가 없으나, 음주페이스북은 회복이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면 설령 삭제 했다고 하더라도 그 기억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음주페이스북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카톡이라는 사실입니다.

 

한번 뱉은 글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요즘 카톡시대입니다. 아이나 어린이나 노인이나 모두 카톡으로 소통합니다. 그런데 카톡에는 치명적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삭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글을 올리고 나서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있는 기능이 없습니다. 밴드만 해도 수정과 삭제가 가능하지만, 카톡의 경우 한번 올린 글은 고스란히 노출됩니다. 우리 속담에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라는 말이 실감될 정도입니다.

 

어느 단체카톡방에서 대형사고가 터진 적이 있었습니다. 스님도 여러 명 있는 사찰신도카톡방입니다. 어느 여자법우님이 놀랍게도 음란동영상을 올렸습니다. 경악할 일입니다. 짦은 동영상으로 참으로 보기에도 민망했습니다. 삭제를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삭제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카톡에 한번 올려진 것은 본인이 삭제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사고가 터진 것일까요? 격앙한 어느 법우님이 추궁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 자신의 핸든폰을 가지고 몰래 올린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변명처럼 들립니다. 본인의 손으로 올린 것임에 분명합니다.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그 사람을 음란물유포혐으로 고발한 적이 있습니다.

 

종종 카톡방에서 실수 합니다. 엉뚱한 곳에 글이나 자료가 올려져 있을 때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재빠르게 해명해야 합니다. 수정도 안되고 삭제도 되지 않는 카톡방에서 오자나 탈자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 곧바로 정정하는 메시지를 남겨야 합니다. 그럼에도 방치한다면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자 때문에 결별 당했는 말도 들립니다.

 

카톡의 가장 큰 장점은 실시간 소통입니다. 번개 보다 더 빠르게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번개처럼 소통합니다. 그러나 실수하면 회복불능이라는 치명적 약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카톡에 글을 올릴 때는 매우 신중합니다. 항상 한번 뱉은 글은 주워 담을 수 없다!”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음주카톡으로 의심되는 글을 보고

 

카톡에 글을 올릴 때 방법이 있습니다. 메모에 작성된 글을 여러 번 훝어본 다음에 자신의 카톡에 먼저 올립니다. 그러면 오자나 탈자가 나타나고 문맥이 맞지 않은 것이 발견됩니다. 다시 한번 수정한 다음에 해당 카톡방에 글을 올립니다. 이렇게 하면 비교적 실수도 적고 글이 논리가 있어 보입니다. 문제는 곧바로 글을 쓸 때 이고, 더 큰 문제는 음주한 상태에서 카톡하는 것입니다.

 

100명 이상이 되는 재가자모임 카톡방이 있습니다. 총무원장직선추진을 위한 재가자 발기인들에 대한 단체 카톡방입니다. 안면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직선제에 대한 홍보도 하고 정보도 알려주고 종종 잡문도 올립니다. 그런데 심야에 올라 온 글을 보니 틀림 없이 음주카톡으로 보였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불평과 불만, 울분 등을 토로한 글이었습니다. 더구나 육두문자까지 있어서 음주임을 직감했습니다.

 

그 분은 재가단체에서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글을 보니 스님들에 대한 불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삼배에 대한 것입니다. 재가자가 왜 스님들에게 삼배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글을 올리는 과정에서 쌍시옷자가 들어가는 푸념성 비속어가 나왔습니다.

 

엎질러진 물입니다. 카톡방은 수정도 안되고 삭제도 안되니 주어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침에 이런 내용의 카톡을 보았을 때 음주카톡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글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의식 있는 재가자 모임방이라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퇴장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습니다.

 

어떤 이가 나서서 대신 사과의 말을 하고 다독였습니다. 그 후로도 몇 명이 더 퇴장했습니다. 이런 경우 당사자가 사과의 메시지를 보내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넘어가려 하는 것 같습니다.

 

스님들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컸나?

 

카톡방에서 욕설이나 비속어를 사용하면 품위와 품격이 떨어집니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듯이, 한번 써 놓은 글은 수습이 되지 않습니다. 본인이 해명하고 사과를 하지 않는 한 그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분은 왜 그토록 스님들에 대하여 울분을 토로 했을까요? 이에 대하여 상처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 스님들에게 상처 받았기 때문에 술의 힘으로 나온 것이 아닐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에 이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불자들 상처가 너무 큽니다. 한번쯤 상처를 받았기에 분노 또한 큽니다. 어느 스님은 별종 취급하지 마세요!’라 합니다. 유발자가 보기에 때에 따라 별다른 사람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스님에 대하여 불가원 불가근을 말 합니다. 이 말은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라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자주 법주, 자귀의 법귀의, 자등명 법등명이라 합니다. 믿을 것은 자신과 가르침뿐이라는 말 입니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습니다. 믿고 의지 할 것은 삼보뿐 입니다. 붓다와 담마, 그리고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 입니다.”

 

 

100명이 넘는 카톡방에는 총무원장직선제를 바라는 재가불자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활동가들은 아마 한 개 이상 상처가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스님과 승가에 대한 상처라 볼 수 있습니다.

 

활동가들 한명, 한명 얼굴을 떠 올리면 이전에 승가로부터 불이익이나 모욕 등 상처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는 승가에 고소당에 재판정을 오가는 고통을 지금 이 순간에도 당하고 있고, 어떤 이는 교수직에서 쫒겨 났다고 복직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대학을 장악하려는 권승들에게 맞서 단식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카톡방에 음주성 글을 올린 이도 아마 스님과 승가로부터 큰 상처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없고 재가자들만 있는 카톡방에 분노를 표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노는 역효과가 났습니다. 아직도 스님과 승가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줄행랑 치듯이 줄줄이 퇴장 했기 때문입니다.

 

스님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올린 글에서 사람을 쉽게 믿지 말자고 했습니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 어떻게 마음이 변할지 모르는데 스님도 예외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스님을 부처님처럼 믿었는데, 그 스님의 계행이 엉망이라면 실망하기 쉬울 것입니다. 더구나 믿었던 스님이 환속한다면 불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잡아함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다음에는 그가 믿고 공경하는 사람이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가면, 그를 공경하고 믿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사람은 나의 스승으로서 나는 스승을 존중하고 공경하는데, 그는 계를 버리고 속세로 돌아갔으니, 나는 이제 그 절에 들어갈 수 없다.’그리하여 그가 절에 들어가지 않으면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면 법을 듣지 못하게 되며, 법을 듣지 못하면 착한 법에서 물러나거나 그것을 잃게 되어 바른 법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사람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생기는 네 번째 허물이라고 하느니라.(과환경-過患經, 잡아함경 제30권 제837)

 

 

 

 

 

부처님 가르침이 오래 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스님을 쉽게 믿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됩니다. 스님을 스승삼아 하늘처럼 믿고 따랐지만, 그 스님이 계행을 지키지 못하여 속퇴했다면 허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스님만 떠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자도 떠나고 바른 법도 동시에 떠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습니다. 사람을 믿어서 손해 본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스님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습니다. 스님의 계행이 바르지 않을 때 절을 떠나게 될 것이고, 스님이 환속하면 불교를 떠나게 될 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 법정스님은 “믿을 게 없어서 중들 말을 믿어?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중놈 말을 어떻게 믿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누구를 믿어야 할까요?

 

불자들이 믿어야 할 것은 삼보(三寶)’입니다. 붓다와 담마와 상가입니다. 여기서 상가(Sangha)는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를 말합니다. 만일 스님들만 있고 자자와 포살이 없다면 승가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자와 포살이 있어야 계행이 유지되고,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에서 성자가 출현합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재가활동가들에게 있어서 스님들에 대한 불신은 대단합니다. 아마 이전에 누구나 한번쯤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재가자들끼리 만나면 스님들의 흉을 보기에 바쁩니다. 차담을 하면서 스님들을 화제 삼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치 직원들이 술자리에서 사장을 안주 삼아 회자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스님들은 조소의 대상입니디. 특히 스님들이 이득을 탐하고 권력을 갖는 등 재가자와 다름 없이 살고 있을 때 여지없이 안주거리가 되어 버립니다.

 

어느 활동가에 따르면 스님을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한 멀리 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마치 가까이 하면 데이고, 멀리하면 소원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마치 종교인이 정치인을 대할 때처럼, 재가자도 스님대하기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하라는 말입니다.

 

삭발에 검은 양복 입은 듯

 

스님과 재가자는 외모로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출가자는 삭발에 회색승복을 입었습니다. 재가자는 유발에 자유로운 복장입니다. 멀리서 보면 스님들은 통일 되어 있습니다. 삭발과 회색승복을 특징으로 하는 모습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그다지 호감을 주는 인상이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세상 사람들이 살지 않는 심산유곡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아 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스님들이 종회나 총무원이라는 권력기관을 만들어 놓고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려 할 때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스님들이 정치를 할 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치 삭발에 검은 양복 입은 것 같아 보입니다. 더구나 목살에 살이 디룩디룩 쪄서 덩치가 커 보일 때 도저히 스님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스님들에게 활동가들이 한번쯤 상처 받은 것 같습니다.

 

지사(志士)와 같은 활동가들

 

어느 사회에서는 선구자들은 있습니다. 근대에는 지사(志士)라 했습니다. 시대를 읽는 안목이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막고자 하는 세력들에게 탄압 당했습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수 많은 지사들이 목숨을 잃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도 지사들이 있습니다. 재가활동가들입니다. 교수, 변호사 등 각계각층의 뜻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재가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삭발에 검은 양복을 입은 듯한 스님들로 받은 상처입니다.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상처 받았을 때 분노로 표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 대신 연민의 마음을 내야 합니다.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을 것이라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분노의 마음은 끓는 물과 같습니다.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는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겨야 합니다.

 

 

“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묶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정복된 마음으로 지내고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면, 그 때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그 때 타인에게 유익한 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고, 그 때 양자에게 유익한 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오랜 세월 암송해왔던 경구들도 생각나지 않는데, 하물며 암송하지 않은 경구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바라문이여, 마치 물그릇이 불에 달구어져 끓어오르고 거품을 일으켰다면 거기서 사람이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S46.55, A5.193, 전재성님역)

 

 

2017-03-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