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든 작은 꽃등촛불, 문화축제로 진화한 3차 촛불법회
상황은 늘 변합니다. 케이블채널을 이렇게 많이 볼 줄 몰랐습니다. 이전에는 EBS에 거의 채널이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다큐와 인문학강좌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요즘 케이블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보고 있습니다. 작년 촛불집회 영향입니다.
케이블채널을 자주 보니 ‘자연인’ 등 소위 산속에서 홀로 사는 사람들 프로도 즐겨봅니다. 산간 오지에 홀로 사는 사람을 찾아 일박하면서 밥도 먹고 그들의 이야기도 들어 보는 방송을 말합니다. 도시에서 번잡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만일 그들을 방송하지 않았다면 그런 삶이 있는 줄 조차 모를 것입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라 했습니다.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라도 기록해 두면 역사가 되고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됩니다. 조계종총무원장직선실현을 위한 촛불법회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제3차 촛불법회
제3차 촛불법회가 종로 보신각앞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를 기대했으나 언제나 그렀듯이 미흡합니다. 웹자보를 만들어 ‘뿌리오’라는 전달수단으로 인터넷으로 유포 했다고는 하지만 자발적 참여자는 거의 없는 편입니다. 대게 불교관련 단체에 소속된 활동가들이 참가 합니다. 그러다 보니 늘 보는 얼굴입니다.
직선실현을 위한 촛불법회가 두 차례 열렸습니다. 그러나 기록해 놓지 않으면 알수 없습니다. 단지 소수의 참가자의 뇌리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기억할 뿐입니다. 어렵게 마련한 자리를 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소위 해종언론이라 폄하하는 두 언론매체, 즉 불교닷컴과 불교포커스는 이를 보도 합니다. 인터넷에도 알려야 할 것입니다. 블로그, 카페, 페이스북 등에 기록을 남겨 두면 역사가 됩니다.
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에 남겨 둡니다. 개인사기이도 하지만 무엇보다 참여하지 못한 불자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한번 써 놓은 글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보신각광장에서
2017년 4월 8일 3차 촛불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종각으로 향했습니다. 종각역에서 내려 보신각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종로는 익숙한 곳입니다. 중학교 다닐 때 지하철이 개통되었습니다. 이제 지하철은 매우 익숙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하철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늘 그 자리에 지하철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보신각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보신각광장에 섰습니다. 보신각은 2층 누각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고교시절 보던 보신각은 단층이었습니다. 단층을 허물고 그 자리에 2층 누각 형식으로 더 크게 지은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2층 누각이었는줄 알 것입니다.
오랜만에 보신각 광장에 섰습니다. 넓직한 광장은 축제분위기입니다. 다름 아니라 ‘연등’때문입니다. 종로에 연등이 주렁주렁 걸려 있다는 것은 ‘부처님오신날’이 머지 않았음을 예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종각과 함께 종로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상징이 있습니다. 마치 유에프오(UFO)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스타일의 빌딩입니다. 이 건물을 배경으로 하여 울긋불긋 연등이 걸려 있습니다.
진화하는 촛불법회
오후 7시부터 시작 되는 행사를 위해서 참여불교재가연대 회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날 3차 촛불법회는 지금까지 방식을 탈피 하여 문화제 형식입니다. 무대를 만들고 조명을 설치 하는 등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것입니다. 비록 무명이긴 하지만 가수와 치어리더 응원단을 초대하여 문화축제 형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쯤 되면 촛불법회도 진화하고 있다 볼 수 있습니다.
치어리더는 M법우님이 섭외했습니다. M대학 치어리더 모임입니다. 이날 촛불법회를 맞이 하여 특별히 공연하기로 한 것입니다. 날이 밝을 때 예비공연을 하자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여 듭니다. 늘 볼거리, 즐길거리로 넘쳐 나는 종로입니다. 흥겨운 음악과 함께 치어리더의 열정적인 율동이 사람들의 시선을 끈 것입니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 연등은 또한 불교의 상징입니다.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거리마다 울긋불긋 연등이 걸릴 때가 되면 부처님오신날이 머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해마다 연등축제가 열립니다. 연꽃모양의 등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은 한국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입니다. 그런데 직선제 촛불법회에서도 연등이 등장한 것입니다. 컵에다 연꽃잎을 붙여 만든 이른바 ‘꽃등’입니다.
촛불의 힘이 불교계에도
지난해 촛불집회가 있었습니다. 불통으로 일관하던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촛불의 힘으로 몰아 낸 것입니다. 어떤 이에 따르면 4.19와 6.10과 함께 세 번째 민중의 승리라 합니다. 이런 촛불의 힘이 불교계에도 옮겨 붙었습니다. 촛불을 든 것입니다. 그러나 불자답게 꽃등이라 불리우는 연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한국불교 적폐청산 직선제가 희망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하는 꽃등입니다.
행사는 여법하게
행사는 여법하게 진행됐습니다. 삼귀의와 함께 반야심경을 봉독했습니다. 그리고 끝날 때는 사홍서원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이날 스님은 세 분 참석했습니다. 늘 단골로 참석하는 허정스님과 도정스님입니다.
허정스님은 스님들의 참여가 적은 것에 대하여 안타까워 했습니다. 비록 돈키호테 같은 행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노력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멀리 제주도에서 올라 오신 도정스님은 ‘중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승가에서 ‘중물들었다’라는 말은 부정적이라 합니다. 어른 스님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스님을 ‘중물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입바른 소리를 하거나 말을 고분고분 잘 듣지 않은 스님에 대하여 ‘중물이 덜 들었다’고 합니다. 도정스님 역시 스님들의 참여가 부진한 것에 대하여 안타까워 했습니다. 참여불교재가연대 상임대표의 말대로 스님들의 문제임에도 스님들의 참여가 적은 것을 대단히 아쉽게 생각한 것입니다.
스님들 참여가 부진한 것은
스님들이 참여가 부진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가장 큰 이유로 ‘불이익’을 들 수 있습니다. 촛불법회에 참석하면 현재 살고 있는 처소에서 쫒겨 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실제로 1차와 2차 촛불법회 당시 호법부스님이 사진촬영을 한 바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스님들이 참여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참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재가자에게도 불익을 준다고 합니다. 촛불법회에서 참석한 재가자의 직장에 전화를 건다거나, 확인 되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세무조사하도록 압력을 넣기도 한다고 합니다.
불교계에도 블랙리스트가
불교계에도 블랙리스트가 있다면 믿을까요? 불행하게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았을 때 불교계에도 블랙리스트가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현총무원장 체제에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명단을 만들어 놓고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계에 블랙스리스트가 있다면 행동에 제약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막말로 “찍히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잘못보이거나 밉보이면 불이익 받습니다. 종단에 쓴소리 했다고 하여 주지연임이 거부되거나, 팟캐스트방송에 출연했다하여 공권정지에다 강등당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더구나 명진스님의 경우 종단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제적당했습니다.
체념적 침묵과 방어적 침묵
모두 다 침묵하고 있습니다. 스님들도 침묵하고 있고 재가불자들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습니다. 종단에 대하여 쓴소리 하거나 잘못을 지적하면 ‘확실히’불이익 받습니다. 조직침묵입니다.
할 말이 있어도 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좋은 의견이 있어도 말하지 않습니다. 직무나 조직관련하여 아이디어나 정보가 있어도 말하지 않습니다. 말을 해도 어차피 받아 주지 않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체념적 침묵’입니다.
담마아닌 것이 득세해도 그냥 내버려 둡니다. 불자들이 3백만명이나 떨어져 나갔음에도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말을 해 보았자 불이익 받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더 낫다고 보는 것입니다. ‘방어적 침묵’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체념적 침묵과 방어적 침묵, 즉 조직침묵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옆에 사람이 죽어 가도 돌아 보지 않듯이, 정법이 훼손되어 가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모두 무관심으로 일관했을 때 한국불교는 공멸할 것입니다.
그들만의 리그에 균열내기
3차 촛불법회는 스님 세 분과 다수 재가활동가들이 참석했습니다. 늘 보던 얼굴들입니다.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한국불교의 현실에서 그나마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쇠귀에 경읽기 또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 하지만 목소리를 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만의 리그에 ‘균열내기’ 위한 것입니다.
불상이나 탑을 만들 때 바위를 잘라야 합니다. 바위에 작은 구멍을 내고 나무못을 여러 개 박습니다. 나무못에 물을 부으면 나무가 팽창하여 바위에 균열이 일어납니다. 직선제운동이 바위에 계란치기라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들만의 콘크리트리그에 균열내기입니다. 오로지 이익으로 뭉쳐진 카르텔에 균열 내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작 50여명 모여서 직선제 구호 외치는 것이 무모한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보는 이에 따라 돈키호테 같은 행위일지 모릅니다. 또 계란으로 바위치기식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이지 않으면 균열 낼 기회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문화축제형식으로
매번 보던 스님들과 매번 만나는 재가활동가들이 또 다시 촛불을 들었습니다. 벌써 세 번째 입니다. 회수가 진행됨에 따라 진화해 갑니다. 촛불이 꽃등으로 바뀌고 구호가 문화축제로 바뀌었습니다.
이날 초청된 가수는 ‘김성만’님입니다.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무명가수입니다. 소개하기를 ‘노래하는 노동자’라 합니다. 무대를 만들고 앰프를 설치하면서 노래까지 혼자서 다하는 것입니다. 역시 무명가수로 ‘송인상’님이 두 곡을 불렀습니다. 아프리카 타악기팀 ‘아토’의 신나는 공연도 있었습니다. 이외 창(唱)을 하고 피리도 불었습니다.
명지의 촛불을
한국불교 역사상 최초로 꽃등법회가 열렸습니다. 불자답게 컵등이 꽃등으로 바뀐 것입니다. 불자들은 정성스럽게 만든 꽃등에 불을 붙였습니다. 서로 불을 나누어 가지자 이곳 저곳에서 꽃등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서 한국불교 개혁을 알리는 불꽃입니다. 담마아닌 것이 득세하는 한국불교에서 정법을 수호코자 불을 밝힌 ‘명지의 촛불’입니다.
치어리더의 율동에
이날 촛불법회, 꽃등법회에서 최대의 하일라이트는 아마도 치어리더일 것입니다. 명지대 치어리더 그룹 청아를 M법우님이 섭외한 것입니다. 이십대 초반의 생기발랄한 남녀 치어리더의 율동은 광장에 온 사람들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무명의 바다에서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보신각광장에서 조계사까지 꽃등 촛불을 들고 왕복했습니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이 꽃등촛불을 압도합니다. 그러나 조계사 경내에서는 밝게 빛났습니다. 화려한 연등천정으로 장엄했을지라도 불이 켜지지 않았을 때는 ‘무명(無明)’입니다. 작은 촛불하나가 능히 연등의 바다를 이겨냅니다.
내가 든 작은 촛불하나가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조계사 연등은 화려합니다. 울긋불긋 하늘을 가득 매운 연등은 보기에도 매혹적입니다. 특히 불을 밝힌 일주문 방향 연등은 환상적입니다. 그러나 오늘 든 작은 컵등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크고 화려한 연등은 전기의 힘으로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손에 든 작은 꽃등에는 촛불이 타오릅니다. 무명의 바다에서 내가 든 작은 촛불하나가 세상을 밝힙니다.
화염, 광채, 빛깔
초기경전에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S7.9)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급전단향나무나 소똥을 말린 것이나 땔감으로 사용했을 때 붙는 불의 특징은 똑 같습니다. 어느 땔감이든지 불의 특징은 화염, 광채, 빛깔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앞에 평등합니다. 브라만이나 왕족이나 평민이나 노예나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면 ‘한맛(一味)’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앞에 비구와 비구니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앞에 사부대중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치 모든 땔감에서 불이 붙듯 부처님 가르침 앞에 차별이 없습니다.
어느 땔감이든지 불의 특징은 화염, 광채, 빛깔입니다. 그러나 전기로 장엄된 연등에는 화염, 광채, 빛깔이 없습니다. 단지 빛만 낼 뿐 진짜 불이 아닙니다. 하지만 촛불에는 화염, 광채, 빛깔이라는 불의 특징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정의로운 작은 촛불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담마아닌 것(adhamma: 非法)’이 득세하는 세상입니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비법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스님 아닌 자들이 스님인 것처럼 행세하는 시대입니다. 미치 ‘전기연등’과도 같습니다.
조계사 앞마당에는 화려한 전기연등으로 장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든 작은 촛불하나만 못합니다. 그것은 가짜와 진짜의 차이입니다. 반승반속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불자들은 작은 ‘꽃등촛불’을 들었습니다. 뜻있는 불자들은 “어둠 속에 등불을 들어 올리듯이”정의로운 작은 촛불을 들었습니다.
“세존이신 고따마시여,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신 고따마시여,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신 고따마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이,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을 갖춘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들어 올리듯이,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존이신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세존이신 고따마께서는 재가 신자로서 저희들을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 바쳐 귀의하겠습니다.”(귀의문 정형구, 전재성님역)
2017-04-0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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