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불교에서 난사람, 든사람, 된사람이란?

담마다사 이병욱 2017. 4. 13. 17:56

 

불교에서 난사람, 든사람, 된사람이란?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난사람, 든사람, 된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난사람보다는 든사람이, 든사람보다는 된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난사람이라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잘난 사람이 떠올려지고, 든사람이라면 조직이나 단체에서 감투를 맡고 있는 사람이 떠 올려집니다. 잘난 사람이나 잘든 사람이 반드시 잘된사람이라 볼 수 없습니다. 잘나지 못했어도 잘들지 못했어도 잘된사람만 못하는 것은 인격의 차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난사람이란?

 

불교에서도 난사람, 든사람, 된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난사람과 불교에서 난사람은 다릅니다. 또 세상에서 든사람과 불교에서 든사람이 다릅니다. 세간에서 된사람과 불교에서 된사람 역시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난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세간에서 말하는 육체적, 정신적 조건이뛰어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을 향한 긴여정으로 볼 때는 차이가 있습니다. 초기경전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매듭을 풀 수 있으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번뇌가 다한 성자에게

그 얽매인 매듭은 풀리리.” (S1.23,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청정도론 제1장 제1절에 등장하는 게송이기도 합니다. 5세기 붓다고사가 청정도론을 저술할 때 이 게송을 가장 먼저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아닌 생이지(生而知)’에 대한 것입니다.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 난사람

 

빅쿠보디는 각주에서 세 가지 학습에 대한 지혜를 강조했습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first as innate intelligence ("wise");

2) second, as insight-wisdom (vipassanā-paññā), the wisdom to be developed;

3) and third, as "discretion," the pragmatic wisdom that takes the lead in all tasks (sabbakiccaparināyikā  parihāriyapaññā). (CDB Vol1, 359p)

 

 

 첫 번째가 ‘innate intelligence ’라 하여 타고난 지혜(wise), 생이지입니다. 두 번째는 ‘insight-wisdom’라 하여 통찰지(vipassanā-paññā)지라 하여 학이지입니다. 세 번째는 discretion라 하여 분별지라 합니다.

 

세가지 지혜 중에 타고난 지혜가 가장 수승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지혜를 갖춘 자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기 전에 조건을 갖춘 자를 말합니다. 이에 대한 구절이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Sīle patiṭṭhāya naro sapañño)입니다.

 

타고난 계행자

 

계행이 바른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계행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스스로 계행을 지키는 자는 타고난 자입니다. 또 지혜로운자가 있습니다. 어느 경우에서든지 지혜롭게 행동합니다. 타고났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선한 자가 선을 행하는 것은 쉽다.

악한 자가 선을 행하는 것은 어렵다.

저열한 자가 악을 행하는 것은 쉽다.

고귀한 자가 악을 행하는 것은 어렵다.(Ud.60, 전재성님역)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또 범죄를 저지릅니다. 전과자가 대부분 범죄를 저지릅니다. 악한 자가 악행을 쉽게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착한 자가 선행하기는 쉽지만 악한 자는 선행하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착한 자는 악행하기 어렵지만, 악한 자는 악행하기 쉽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 없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누구나 악행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생연결을 통해서

 

계행을 잘 지키는 자들이나 지혜가 있는 자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들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전생에서 수행한 자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생에 수행한 자들은 다음 생에 태어나도 수행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태어납니다. 이를 생이지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계에 머물러서, 계를 철저히 봉행하는 자를 여기서 계에 머무는 자라 부른다. 그러므로 계를 철저히 수지하여 계에 굳건히 머문다는 것이 여기서의 뜻이다.

 

사람 : 중생이다.

 

통찰지를 갖춘 :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재생연결을 통해 업에서 생긴 지혜를 가진,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Vism.1.7, 대림스님역)

 

 

생이지와 관련된 구절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라고 번역했습니다. 특히 통찰지를 갖춘 사람에 대하여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재생연결을 통해 업에서 생긴 지혜라 했습니다. 여기서 세 가지 원인은 무탐, 무진, 무치를 말합니다. 이전생에 수행한 자들이 이 세 가지 원인을 조건으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거의 없이 태어남을 말합니다.

 

지혜를 갖춘 자가 수행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수행할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지혜는 하루 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학습에 의해서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한수행 한다는 사람은 생이지, 즉 타고난 지혜를 가진 자라 합니다.

 

불성(佛性)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능력에 대한 차별을 인정합니다. 이는 부처님이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자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 얼굴이 다르고 성향이 다른 것은 지은 업의 차이 때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지혜 또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자로서 조건 중의 하나가 생이지입니다. 대단히 불공평한 것 같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사실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모두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여 마음을 닦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 차등이 생겨 나기 때문에 모두 마음 닦는다고 하여 아라한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전 생에서부터 무탐, 무진, 무치의 수행을 한 자들이 현생에서 이러한 세 가지 원인으로 하는 지혜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수행이 가능한 것으로 봅니다.

 

7세 아라한에 대하여

 

지혜를 가지고 태어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지혜를 가지지 않고 태어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학습능력이 뛰어난 자들은 타고난 지혜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이지로서 지혜를 가진 자를 들라면 ‘7세 아라한일 것입니다. 테라가타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습니다.

 

 

생후 겨우 칠 년 만에

구족계를 나는 받았고,

세 가지 명지를 성취하였으니

여법한 훌륭한 가르침이여!”(Thag.479, 전재성님역)

 

 

밧다존자가 읊은 게송입니다. 밧다존자는 일곱살에 구족계를 받고 아라한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런 게송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원인을 조건으로 해서 태어나면 일곱살에도 아라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조건을 갖추고 태어났기 때문에 세월이 오래 걸릴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수행이 완성단계에 들었기 때문에 세상의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나이, 즉 일곱살이 되었을 때 세상의 이치를 알아 깨달음에 이르게 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착하게 산다 하지만

 

아비담마에 따르면 대부분 사람들은 지혜가 결여된 채로 태어납니다. 무탐, 무진이라는 두 가지 원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일반사람들을 말합니다. 일반사람들이 착하게는 살아도 지혜가 없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나느냐, 아니면 무탐, 무진이라는 두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나느냐에 따라 수행자의 길과 범부의 길로 갈라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탐, 무진의 생활도 하지 않았다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항상 탐욕으로 사는 자나 늘 성내며 사는 자는 인간으로 형성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일평생 탐욕으로 산 자는 거기에 걸맞는 세계, 예를 들어 축생으로 형성될 것입니다. 일평생 분노로 산 자 또는 일평생 어리석게 산 자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악처에 태어날 것입니다.

 

두 가지 원인과 세 가지 원인에 대하여

 

무탐, 무진을 원인으로 인간으로 태어나도 지혜가 결여 된 채 태어나면 낮은 지위의 인간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무탐, 무진, 무치를 원인으로 태어나면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조건과 두 가지 조건에 대하여 붓다아비담마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유익한 지혜를 가지고 유익한 행위를 하면, 지혜와 결합한 큰 유익한 마음이 일어난다, 이 마음과 결합한 의도는 3가지 유익한 원인[뿌리], 즉 탐욕없음(無貪: alobha), 성냄없음(無瞋: adosa), 미혹없음(無癡: amoha)과 결합하게 된다. 그리하여 3가지 원인 있는 유익한 업을 획득한다.

 

훨씬 더 좋은 것은 유익한 행위를 하는 동안에 모든 것이 무상--무아라고 숙고하여 통찰지혜(vipassanā ñāa)를 계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은 유익한 업은 다시 3가지 유익한 원인[뿌리]과 함께 한다.

 

반면 만약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지혜가 없이, 통찰지혜 없이 유익한 행위를 하면, 지혜와 결합하지 큰 유익한 마음을 가지고 그 유익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의도는 2가지 유익한 원인[뿌리]인 탐욕없음, 성냄없음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오직 2가지 원인 있는 유익한 업을 얻은 것이 된다.”(붓다아비담마 272)

 

 

착하게 살지만 지혜 없는 사람은 두 가지 뿌리(원인), 즉 무탐과 무진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결여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나도 낮은 지위의 범부로 태어납니다. 지혜수행할 기회가 있어도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도 지혜가 결여 된 채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착하게 살면서도 지혜를 추구하는 자는 무탐, 무진, 무치를 뿌리로 하여 태어나기 때문에 수행자로서 삶을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서 지혜수행을 하는 자가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두 가지 원인과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난 것에 대하여 일묵스님은 매우 쉽개 설명합니다. 일묵스님은 “원인이 두 개가 되면 정상적인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육근이 골고루 갖추어집니다. 그 대신 지혜가 부족합니다. 이 생에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봅니다. 재생연결식에서 원인이 세 개가 되야 삼매도 들 수 있고, 선정에도 들 수 있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죽기 전에 원인 세 개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 생에서 수행을 좀 했다는 이야기입니다.(일묵스님ㅣ봉녕사 아비담마 8) 라고 말 했습니다.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다

 

이 생에서 세 가지 원인(뿌리), 즉 무탐, 무진, 무치를 가지고 태어난 자는 타고 난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게송에서 말하는 지혜를 갖춘 사람”(S1.23) 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생이지입니다. 생이지인 자가 금생에 깨달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매듭을 풀 수 있으리.” (S1.23)라 했습니다.

 

무탐, 무진, 무치의 조건을 갖춘 자는 계행을 지키지 말라 해도 계행을 지키고, 이미 지혜가 구족되어 있습니다. 이번 생에 닦기만 하면 됩니다. 계행을 갖추고 지혜를 갖춘 자가 선정에 들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지혜가 결여된 자는 선정에 들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탐욕으로 가득하고 분노로 가득한 자가 선정에 들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혜는 고요함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선정에서 지혜가 나옵니다. 이번 생에서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지혜를 타고나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세 가지를 뿌리로 해서 태어난 자는 빠르면 7세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는 이전 생에 아라한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Ud.51,A8.19)라 했습니다.

 

불교의 깨달음은 돈오점수라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을만한 조건을 갖추고 태어난 자는 점진적으로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것은 오염원을 제거해 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흔히 사향사과라 합니다.

 

성자의 흐름에 든 자, 든사람

 

사향사과는 견도, 수행도, 무학도로 나뉩니다. 견도는 수다원도과를 말하고, 수행도는 사다함도과와 아나함도과를 말하고, 무학도는 아라한도과를 말합니다. 이처럼 단계적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깨달음을 돈오점수라 합니다.

 

돈오점수로서 깨달음에 있어서 가장 먼저 요청되는 것이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를 예류자라 하며, 또 수다원의 경지라 합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간 자는 든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회에서 든사람이라 하면 고시패스를 하여 판사나 검사를 떠 올리게 합니다. 또 국회의원이나 지방자치단체장이 된 자도 든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 한자리 차지 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든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든사람이라 하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 즉 예류자 또는 수다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세 종류의 예류자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면 일곱생 이내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어 있습니다. 일곱생이내라는 말은 최대 일곱생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한생에서부터 일곱생에 이르기까지 아라한이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세 종류의 예류자가 있습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이 계행을 구족하였더라도 삼매가 그만하고 지혜가 그만하다면, 그는 작고 사소한 학습계율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범하기도 하고 복귀하기도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것이 무능을 의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근본청정에 순응하는 청정한 삶에 적당하고 계행에 효과가 있고 계행에 확고한 학습계율이 있는데, 그가 그 학습계율을 닦기 때문이다.

 

1) 그는 세 가지 결박을 끊어 버린 뒤에 최대한 일곱 번 다시 태어나는 님으로 최대 일곱 번 신들이나 인간으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

 

2) 그는 세 가지 결박을 끊어 버린 뒤에 고귀한 가문에서 고귀한 가문으로 태어나는 님으로 두 번이나 세 번 고귀한 가문으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

 

3) 그는 세 가지 결박을 끊어 버린 뒤에 다시 한번 태어나는 님으로 오직 인간으로 다시 한번 태어나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A3.86, 전재성님역)

 

 

여기서 세 가지 결박은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을 말합니다. 오온을 자아로 여기는 견해가 있는 한 결코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나 잘못된 수행방법을 따르는 자 역시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류자가 되면 최대 일곱생이고 짧게는 한생이면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고 합니다. 괴로움의 종식은 윤회의 종식을 뜻합니다.

 

아라한, 된사람

 

이번 생에 아라한이 되는 자는 전생에 수행을 많이 한 자 입니다. 탐욕, 성냄 등 낮은 단계의 결박이 모두 풀려진 자라 볼 수 있습니다. 무탐, 무진, 무치를 뿌리로 하여 태어난 자로서 타고난 지혜를 가진 자라 볼 수 있습니다.

 

타고난 지혜를 가진 자는 이번 생이 마지막이기 때문에 부처님 설법 한마디만 들어도 아라한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일곱살에 출가하여 아라한이 된 것도 전생에 수행한 공덕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무탐, 무진을 뿌리로 태어나기 때문에 지혜가 결여 되어 있습니다. 전생에 지혜 수행을 했다면 조건이 맞았을 때 궁국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는 것은 세간적으로 말하면 든사람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난사람, 든사람 보다는 된사람을 지향합니다. 불교에서 든사람이라면 번뇌 다한 아라한일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닦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학이라 합니다.

 

자기자신은 자기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번뇌가 얼마나 남았는지, 자신이 얼마나 청정한지는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스스로 알게 됩니다.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자, 감각적 쾌락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존재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습니다. 해탈되었을 때에 나에게 ‘해탈되었다.’는 앎이 일어났으며, 나는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았습니다.” (M4, 전재성님역)

 

 

아라한이 되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이것이 불교의 궁극의 목표입니다. 세간적으로 말하면 된사람입니다.

 

발판을 마련해 놓아야

 

초등학교 교과서에 난사람, 든사람, 된사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중에 된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불교에 적용해 보면 난사람은 지혜가 타고난 자로서 생이지에 해당되고, 든사람은 성자의 흐름에 든 자에 해당되고, 된사람은 모든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생에 해탈하여 아라한이 되려면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뿌리(원인)을 조건으로 태어난 자여야 합니다. 그래야 이번 생에 수행이 가능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무탐, 무진의 조건이라 합니다. 지혜가 없기 때문에 수행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수행처가 옆에 있어도 가지 않고 가르침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은 수행할 만한 조건을 갖추지 않고 태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비록 지혜 없이 태어난 자라 해도 수행이 가능할 것입니다.

 

다음 생에도 수행자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번 생에 최소한 발판을 마련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이번 생에 예류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류자가 되면 최대 일곱생 이내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전 생에 예류자이었다면 두 생 내지 세 생이면 아라한이 될 수 있어서 단축됩니다. 이전 생에 더 많은 수행을 했다면 한생만 더 태어나면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불교공부를 하고 불교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지 않으면 다음 생에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예류자만 되면 안심이라는 말입니다. 예류자가 되면 다음생에 스스로 알아 수행을 계속해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설령 외도의 집안에 태어나 외도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이전 생에 예류자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제자리로 돌아가 궁극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발판을 마련해 놓지 못하면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알 수 없고 어떤 세계에 태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생에서 발판만이라도 마련해 놓으라고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한번 빠져서 가라앉는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가라앉는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서 있는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관찰하고 비추어 본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얕은 바닥에 발판을 마련한다. 그런데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올라왔다가 저 언덕에 올라 거룩한 님으로 육지에 선다.” (A7.15, 전재성님역)

 

 

2017-04-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