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노인들 건강은 건강이 아니야!”생활속의 진리

담마다사 이병욱 2017. 4. 11. 10:38

 

노인들 건강은 건강이 아니야!”생활속의 진리

 

 

생활속의 진리

 

안양1번가 대로에 갈비탕집이 있습니다. 이 집은 독특합니다. 오로지 점심장사만 합니다. 재료가 다 떨어질 때가 영업이 끝나는 시간입니다. 대게 오후 2시 가량 됩니다. 11시에 문을 열어 오후 2시까지 3시간 가량 장사합니다. 이 식당의 또 하나의 특징은 술을 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갈비탕 하나로만 승부합니다.

 

 

 

 

 

갈비탕집에 종종 갑니다. 기력을 회복하고자 할 때 갑니다. 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를 걸어 갑니다. 그 집에 가서 식사한끼 하면 거뜬합니다. 마치 보약 먹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한방갈비탕이라 합니다.

 

갈비탕집은 노인들이 주로 옵니다. 아마 소문 듣고 온 것 같습니다. 늦게 가면 줄을 서야 합니다. 줄을 설 정도로 매력적인 맛이 있는 것입니다. 왕갈비 한대를 소자라 하는데 7,000원 합니다. 두 대면 9,000, 세 대면 11,000원합니다. 주로 소자를 먹습니다.

 

 

 

 

 

 

 

줄을 서서 먹는 갈비탕집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합석한 자리에서 들은 것입니다. 맞은 편에 앉은 70세 가량의 노인 두 분이 이야기를 합니다. 한분이 노인들 건강은 건강이 아니야!”라 합니다. 이 말에 공감했습니다. 명언처럼 들린 것입니다. 생활속의 진리라 볼 수 있습니다.

 

노인건강은 밥심에서

 

노인들 건강은 건강이 아닌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종종 장례식장에서 이런 말을 듣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멀쩡하던 팔십줄의 노인이 점심때 갑자기 쓰러져 돌아 가셨다는 말을 듣습니다. 또 어제까지 밥 잘 잡숫던 노인이 오늘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노인이 아무리 건강해 보여도 내일 일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인건강은 밥힘에서 나옵니다. 밥만 잘먹으면 버티는데 문제 없습니다. 그러나 밥을 먹지 못하면 건강은 급격하게 악화 됩니다. 우리말에 밥숟가락 놓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위 밥심으로 사는 노인이 숫가락을 들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 되었을 때 죽을 날이 머지 않음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매일 밥을 먹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밥을 먹습니다. 하루라도 밥을 먹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한자나 하루 세 끼 먹습니다. 허리가 구부러져 곧 쓰러져 갈 것 같은 노인도 밥을 한가득 쌓아 놓고 먹습니다. 세상사람들은 밥심으로 살아 갑니다.

 

먹방의 시대에

 

하루라도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파 견딜수 없습니다. 밥을 먹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밥벌이 해야 합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먹고 삽니다.”라고 말하면 넉넉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먹고 살기 힘듭니다.”라고 말하면 엄살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음을 말합니다.

 

먹방프로가 대세입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보지만 보이는 것은 먹방입니다. 마치 사람들은 먹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로지 먹는 것에만 관심 보인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Middhi yadā hoti mahagghaso ca
Nidd
āyitā samparivattasāyī
Mah
āvarāho'va nivāpapuṭṭho
Punappuna
gabbhamupeti mando'ti.

 

나태할 뿐만 아니라 많이 먹고

또한 잠자며 빈둥거리니

곡식 먹고 자란 커다란 수퇘지처럼,

그 어리석은 자는 자꾸 모태에 든다.”(Thag.17,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테라가타 일련시집에 실려 있는 것으로 부처님이 다싸까존자에게 읊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게송은 법구경 325번 게송과 병행합니다. 그러나 인연담은 서로 다릅니다.

 

테라가타 인연담을 보면

 

게송에 대한 테라가타 인연담을 보면 전생의 다싸까는 보시공덕으로 부처님 당시에 인간계로 태어났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아나타삔디까의 정사를 돌보는 하인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아나타삔디까가 하인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고자 부처님의 교단으로 출가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출가의 의무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테라가타 인연담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출가하고 나서부터는 게으르고 정진력이 부족하여 결코 실천과 의무를 다 할 수 없었는데, 어찌 수행자의 삶을 살 수 있었으랴. 오로지 진탕 먹고 잠만 잤다. 가르침을 들을 때는 한쪽 구석에 들어가 대중의 가장 자리에 앉아서 쿨쿨 코를 골며 잠을 잤다. 마침 세존께서 전생의 인연을 관찰하시고 외경을 일으키기 위해 이 시를 읊으셨다.”(Thag.17 다싸까존자 인연담, 전재성님역)

 

 

법구경인연담은 이와 다릅니다. 한됫박 분량의 밥을 먹는 빠세나디왕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됫박 분량의 경(S3.13)’에 묘사 되어 있습니다. 빠세나디왕이 됫박분량의 밥을 먹고 숨을 몰아 쉬고 있는 것을 부처님이 본 것입니다. 부처님은 밥 먹을 때 “언제나 새김을 확립하고 식사에 분량을 아는 사람은 괴로운 느낌이 적어지고 목숨을 보존하며 더디 늙어가리. (S3.13) 라는 게송으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먹고 토하기시대가 도래할까?

 

게송 첫 번째 구절에 나태할 뿐만 아니라 많이 먹고(Middhi yadā hoti mahagghaso ca)”라 했습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태와 무감각에 사로잡혀 많이 먹는 자를 말한다. 많이 먹는 자는 다음과 같은 사람이다.

1) 식후에 일어설 수가 없어서 손을 좀 잡아 달라고 하는 자

2) 식후에 옷이 꽉 끼여서 옷이 째지겠다 하는 자

3) 식후에 일어날 수 없어 바닥에 누워 뭉게는 자

4) 큰 입으로 한꺼번에 많이 먹고 흘려서 까마귀가 먹을 만큼 남기는 자

5) 너무 많이 먹어서 먹은 것을 토하는 자’”(Thag.A.I.74, DhpA.IV.16, 전재성님역)

 

 

오로지 먹는 것에만 관심을 보이는 자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다섯 번째 항을 보면 마치 로마시대 말기 극도로 타락한 식도락가들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이런 추세로 먹방이 대유행이라면 우리나라에서도 먹고 토하기하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돼지 혓바닥 치는 소리

 

두 번째 구절은 또한 잠자며 빈둥거리니(niddāyitā samparivattasāyī)”입니다. 이는 눕는 즐거움, 접촉의 즐거움, 나태의 즐거움에 빠진 자를 뜻합니다. 여기서 빠알리어 ‘Samparivatta’‘rolling about’의 뜻으로 구르다(せる, ごろごろ)’의 의미입니다. 양껏 밥을 먹고 누워 빈둥거리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먹기만 하고 움직이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포만감에 몸이 무거워 누워 있다보면 졸릴 것입니다. 먹과 자는 일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무엇과 같을까요? 게송에서는 곡식 먹고 자란 커다란 수퇘지처럼(Mahāvarāho'va nivāpapuṭṭho)”이라 했습니다. 돼지 우리에서 사는 것처럼 게으른 자를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쌀겨와 같은 가축사료를 먹고 자란 돼지를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자란 돼지는 몸집이 커져서 우리를 떠날 수 없고 콧김을 불러대고 좌우로 구르며 바닥에 눕는다. 사람도 나태하고 살이 쪄서 사료를 먹고 자란 돼지처럼 어떤 한 자세로 있기가 불가능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니게 된다. 그는 세 가지 존재의 특징(三法印: tilakkhana) ,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는 원리를 알 수가 없다. 마음을 여기에 집중하지 못하면, 그는 통찰이 부족하여 모태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그는 거듭해서 윤회하며 모태속에서 지내는 것에서 해탈할 수 없게 된다.”(Thag.A.I.74, DhpA.IV.16, 전재성님역)

 

 

유년기시절 시골에서 돼지키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좁은 우리에 갇혀 사는 돼지는 한바가지 퍼주는 온갖 음식찌꺼기를 먹고 잘도 자랍니다. 어느 미국농부는 다큐 프로에서 돼지들이 음식을 먹을 때 쳇쳇하며 혓바닥으로 핱아 먹는 소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고 했습니다. 돼지 혓바닥 치기입니다. 돼지가 혓바닥을 칠 때 마다 무럭무럭 살찌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의 먹잇감이 되어

 

공장식으로 사육되는 돼지는 월령으로 따집니다. 태어난지 6개월이면 도살장으로 향합니다. 도살되어 마트에 내 놓으면 사람들은 고기를 사갑니다. 고작 6개월만에 인간의 식탁에 올라 가는 살코기신세가 됩니다.

 

닭으로 태어나면 일령으로 따져 30일이면 도살됩니다. 소는 연령으로 따져 2년이면 인간의 식탁에 올라 갑니다. 인간이 주는 사료를 먹고 자라지만 최후는 남의 먹잇감이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단지 먹기만 하고, 먹기 위해서 산다면 먹잇감이 됩니다. 누구든지 지혜가 없으면 남의 먹잇감이 됩니다. 그리고 자꾸자꾸 모태에 들어갑니다.

 

자꾸자꾸 모태에 들어

 

네 번째 구절은 그 어리석은 자는 자꾸 모태에 든다(Punappuna gabbhamupeti mando'ti)” 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윤회함을 말합니다. 반대로 지혜로운 자는 모태에 들지도 않고 윤회하지도 않습니다.

 

빠알리어 ‘gabbha’‘interior; the womb’의 뜻으로 자궁 또는 태()를 말합니다. 돼지처럼 먹기만 하는 자는 자꾸자꾸(punappuna)’ 모태에 들것이라 합니다. 이는 세세생생 윤회함을 말합니다.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은 모태에 들 것입니다. 가르침을 알아도 실천하지 않는 자들 역시 모태에 들 것입니다. 모태에 들면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미얀마 속담에 빛나던 범천도 우리속에서는 꿀꿀거리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천상락을 누리는 자들도 지혜가 없이 먹는 것만 즐긴다면 우리 속의 돼지신세가 될지 모릅니다.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부처님은 어리석게 사는 자는 자꾸 모태에 든다고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업과 업의 작용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kamma)이라는 말이 이미 업의 결과를 내포하는 말입니다. 행위가 있으면 결과가 있기 마련이라는 업의 법칙입니다. 다면 늦게 익기 때문에 결과로 나타나는 업의 작용은 시간차이가 있습니다. 이를 업이숙(kammavipaka)’이라 합니다. 업이 달리 익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태어남에 대하여 업의 작용을 보았습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M135)’에서와 같이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M135)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업을 모태로 하여(kammayoni)’ 태어 났기 때문에 귀하거나 천한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얼굴이 다르고 성향이 다른 것이 업의 차이로 본 것입니다.

 

회의론자들은

 

부처님의 업에 대한 가르침은 뭇삶들이 윤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자신이 지은 행위, 즉 자신의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관을 보면 형성조건에 따라 31개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럼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로지 현세의 가르침으로 한정하려 한다면 가르침은 반토막나는 것이고 가르침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종교 경전이라 단지 우리보다 먼저 태어난자들이 남긴 망상일 뿐이다.”이 말은 수학자 강병균교수가 최근 불교닷컴에 기고한 글입니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만 믿는 회의론자에 따르면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모두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령 윤회가 참이라 하더라도 간난아기가 이전 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윤회론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라 합니다. 당연히 윤회론이 부정됩니다. 설령 윤회론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사성계급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보는 것입니다.

 

법륜스님은 윤회부정론자

 

그런데 놀랍게도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스님도 윤회부정론자라는 사실입니다. 강병균교수에 따르면 법륜스님의 윤회관에 대하여 예를 들어 정토회 회주 법륜은 공개적으로 윤회를 부인한다인도 민속신앙으로 격하한다지질학·천문학·진화론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 (성경과 불경) 라 했습니다.

 

법륜스님은 즉문즉설로 유명합니다. 정토회라는 잘 조직된 단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단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법륜스님의 윤회관을 보면 단멸론에 가깝습니다. 오로지 현세에 대해서만 얘기합니다.

 

왜 반쪽만 말하는가?

 

법륜스님에 따르면 내생과 윤회는 미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나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런 눈으로 본다면 초기경전에서 업의 가르침은 부정되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 핵심은 업과 업의 작용입니다. 이를 세간적 정견이라 하지만 출세간적 정견이라 불리우는 사성제와 함께 업의 가르침은 핵심중의 핵심입니다. 만일 출세간적 정견이라는 사성제 하나만 인정하고, 세간적 정견이라는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한다면 반쪽짜리 불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법륜스님은 반쪽불교를 말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대부분은 업과 업의 가르침입니다. 이는 삼세양중인과로 표현됩니다. 그럼에도 이에 대하여 단지 생물학적 윤회라거나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성립하지 않는 것이라 폄하한다면 부처님 제자들이라 볼 수 없습니다.

 

노인들 건강은 건강이 아니야!”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은 필연적으로 윤회의 종식으로 귀결됩니다. 누군가 삶의 과정에서 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을 느꼈다면 왜 이렇게 됐을까?”라며 의문할 것입니다. 십이연기의 역관의 시작입니다. 부처님도 이런 의문으로 출가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늙어 갈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실로 다가옵니다. 초기경전에 수 많은 부처님 말씀은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자들에게는 틀림 없는 사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누군가 노인들 건강은 건강이 아니야!”라 했을 때 이는 진리입니다. 노인들이 지금 밥 잘 먹고 건강한 듯 보여도 한 순간에 건강이 악화 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해 놓은 것이 없이 오로지 먹는 즐거움으로 한평생 살았다면 또 다시 모태에 들 것입니다. 모태에 들어 어느 누구 식탁에 살코기로 올라갈지 모를 일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자들만이 모태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17-04-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