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몸은 병들어도 마음만은, 오온무아(五蘊無我)의 가르침

담마다사 이병욱 2017. 4. 6. 13:35

 

몸은 병들어도 마음만은, 오온무아(五蘊無我)의 가르침

 

 

잠을 잘 자는 비법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잠자는 것입니다. 잠자는 것은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잠이 와야 잠을 자기 때문입니다. 잠이 오지 않는데 억지로 잠을 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잠을 잘 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A3.35)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잠을 잘 자는 비법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부처님은 스스로 잠을 잘 자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잠을 잘 자는 것은 잠을 잘 만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대게 사람들이 잠 못이루는 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아 가기 때문입니다. 지금 감각적 쾌락의 욕망으로 붙타오르고 있는 자가 잘 시간이 되었다고 해서 잠이 잘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욕망이 충족되기 전까지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할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지금 분노에 가득 찬 자가 잘 때가 되었다고 해서 잠을 잘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흥분하거나 들떠 있는 자도 잠을 잘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은 잠을 잘 자야 합니다. 그러나 잠을 잘 자야겠다고 마음 먹는 순간 잠은 달아나버립니다. 잠을 잘 못 자서 시험을 망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내일 상을 받는 다고 생각하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 결과 시상식장에서 피곤한 모습을 보일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잠을 가장 잘 자는 사람은 깨달은 자입니다. 탐욕, 성냄, 들뜸 등 온갖 번뇌에서 자유로운 자는 잠을 잘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이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A3.35)라 한 것은 번뇌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간 번뇌에서 잠못 이루는 왕자에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탐욕으로 인한 고뇌가 생겨나면, 그 탐욕으로 인한 고뇌로 불타면서 괴롭게 잠을 자지 않겠습니까? (A3.35) 라고 물은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부도 내 뜻대로 하고, 원하는 학교도 내 뜻대로 가고, 직장도 내 뜻대로 잡고, 배우자도 내 뜻대로 고릅니다. 심지어 남편(또는 아내)도 내 뜻대로 되야 하고, 아이들도 내 뜻대로 해야 합니다. 심지어 돈도 내 뜻대로 벌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대통령도 내 뜻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잠입니다.

 

잠이 와야 자는 것입니다. 잠은 억지로 청한다고 잠을 자는 것은 아닙니다. 늦은 시간에 커피나 차 등 카페인이 있는 것을 마신다고 잠 못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잠은 잠이와야 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을 청하는 태도는 잠이 오면 잔다.”라고 마음 먹으면 편합니다.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

 

잠은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마음 먹은 대로 된다고 하지만 잠만큼은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생노병사입니다. 어느 누구도 생노병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자신이 왜 태어 났는지도 모른 채 살아 갑니다. 세월이 흘로 늙어 갈 때 멈출 수 없습니다. 병이 들지 않기를 바라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죽음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경지송 추모경송품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에 따르면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라 했습니다.

 

현재 나의 삶은 견고 하지 않습니다. 시시각각 부서지고 무너지고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견고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부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삶은 견고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견고하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 처한 자가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세월에 따라 부서져 가는 자신의 몸을 보면서 죽음은 확실하고 견고하게 다가옵니다. 죽음의 그림자를 직감한 대부호 나꿀라삐따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늙고 노쇠하고 고령인데다가 만년에 이르러 몸에 병이 들어 종종 병고에 시달립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세존과 존경스런 수행승들의 모습을 친견하러 오는 것조차 힘듭니다. 제가 오랫동안 안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게 용기를 불어 넣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제게 가르침을 베풀어 주십시오.”(S22.1, 전재성님역)

 

 

 

 

 

 

나이가 들면 늙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런데 늙음과 함께 동반하는 것은 병입니다. 마치 오래 탄 자동차의 부품들이 하나 둘 망가져 가듯이, 늙어 감에 따라 장기가 하나 둘 퇴화 되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나꿀라삐따는 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나꿀라삐따는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간신히 몸을 이끌고 부처님을 찾았습니다.

 

몸은 병들어도 마음만은

 

상윳따니까야 3권은 나꿀라삐따의 경(S22.1)’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온의 가르침으로 잘 알려져 있는 칸다상윳따(S22)에서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재가자 나꿀라삐따 장자를 등장시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잘 나타납니다.

 

 

장자여, 참으로 그렇습니다. 장자여, 참으로 그렇습니다. 장자여, 그대의 몸은 허약하고 낡아버렸습니다. 장자여, 하물며 어떤 사람이 그와 같은 몸을 이끌고 다니면서 아주 잠시라도 건강하다고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배워야 합니다.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합니다.” (S22.1, 전재성님역)

 

 

경에서 핵심내용은 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āturakāyassa me sato citta anātura bhavissatīti)”라 입니다. 몸의 병으로 인한 병고가 정신까지 영향을 주어서 정신적 고통을 겪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는 육체적 고통이라는 제1의 화살을 맞았지만, 그로 인하여 정신적 고통이라는 제2의 화살을 맞아서는 안된다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두 종류의 화살

 

누구나 육체적 고통을 느낍니다. 부처님도 육체적 고통을 느꼈습니다. 부처님이 돌조각에 다리를 다쳤을 때 세존께서는 몸이 몹시 아프고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것을 심하게 느끼셨다.”(S1.38) 라 했습니다. 부처님도 고통을 느낀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이고 아파 죽겠네!”라고 비명지르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돌조각을 맞았습니다. 경에 따르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상처받지 않으면서 참아내셨다.”(S1.38) 라 했습니다. 이것이 고통에 대한 올바른 대처방법일 것입니다. 1의 화살은 맞았지만 제2의 화살은 맞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제2의 화살을 맞지 않을까요?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사람을 화살로 찌르고 또한 그를 두 번째의 화살로 찔렀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그렇다면 그는 두 개의 화살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수행승들이여, 바로 이와 같이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괴로운 느낌과 접촉하면 우울해지고 피곤해하며 슬퍼하고 통곡하며 미혹에 빠진다. 그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두 가지 종류의 고통을 느낀다.”(S36.6, 전재성님역)

 

 

육체적 고통이라는 제1의 화살과 정신적 고통이라는 제2화살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느낌(vedanā)입니다. 괴로움 느낌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일어날 만한 조건을 가졌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또한 괴로움은 무상한 것입니다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들은 화살 두 방을 맞습니다. 이는 그에게 괴로운 느낌과 접촉하여 분노가 생겨난다.”(S46.6)라는 가르침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접촉에 따른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고, 괴로운 느낌은 분노를 야기하여 악순환됩니다. 하지만 잘배운 고귀한 제자는 느낌에 대하여 괴로운 느낌과 접촉해도 우울해하지 않고 피곤해하지 않으며 슬퍼하지 않고 통곡하지 않으며 미혹에 빠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체적이지만 정신적이지 않은 단 한가지 종류의 고통을 느낀다.” (S36.6) 라 했습니다. 1의 화살은 맞을지언정 제2화살은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누군가 육체적 고통을 참지 못하여 아이고 아파, 아이고 죽겠네!”라며 비명지른다면 그는 정신적 화살까지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단지 조건에 따라 발생된 일시적 느낌에 불과한 것이라 여긴다면 아프네.”라 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 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부처님 말씀 한마디에 극적인 변화가

 

나꿀라삐따는 부처님에게 몸은 병들어도 마음만은 병들어서는 안된다.’라는 말 한마디에 고무됐습니다. 경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 하며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의 변화는 사리뿟따 존자가 나꿀라삐따에게 장자여, 구대의 감관은 고요하고 안색이 청정하고 밝습니다.”(S22.1) 라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 한마디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한마디의 말에 극적인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부처님 말씀도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다 죽어 가던 나꿀라삐따가 부처님의 몸은 병들어도 마음만은 병들어서는 안된다.’라는 말에 감관이 맑아지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가르침의 힘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인격적 변화입니다.

 

연쇄살인범 앙굴리말라도 부처님 한마디에 삶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부처님이 앙굴리말라여,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M86) 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보통걸음으로 걷고 있었지만 앙굴리말라는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신통으로 앙굴리말라를 제자리 걸음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앙굴리말라는 연쇄살인을 멈추었습니다. 마침내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가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이를 회상하는 앙굴리말라는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ariyāya jātiyā jāto)”(M86) 라 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출가로 인하여 이전의 앙굴리말라는 죽었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인생이 180도 바뀐 것입니다.

 

인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한마디에 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나꿀라삐따 역시 부처님의 한마디에 180도 바뀌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인격적 변화입니다.

 

불교공부를 하고 수행을 하는 목적은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절에 10, 20, 30, 평생을 다녀도 인격적 변화는커녕 아상만 높아져 있다면 잘못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단 일년을 공부해도 인격적 변화가 수반된다면 제대로 공부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인격적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수행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감로법(甘露法: amata)에 대하여

 

나꿀라따는 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로 얼마전까까지만 해도 육체적 고통으로 시달리던 자가 감관이 맑고 청정해졌을 때 인격적 변화를 수반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나꿀라따는 사리뿟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 세존께서 가르치신 설법으로 감로와 같은 축복을 받았습니다.”(S22.1,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가르침을 감로법(甘露法)이라 합니다.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단이슬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불교사전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어 수행하면 한량없는 공덕과 이익을 얻음이 마치 감로를 복용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과 같음에서 비유한 것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이상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감로를 뜻하는 빠알리어 amata’ 때문입니다.

 

빠알리어 아마따는 ‘Deathlessness’의 뜻으로 불사(不死)의 의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죽지 않는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죽지 않으니 태어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한 열반에 이르는 가르침을 감로법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감로법은 어떤 것을 말할까요?

 

앙굿따라니까야에 불사의 경(Amatasutta, A9.54)이 있습니다. 우다인이 아난다에게 벗이여, 불사, 불사라고 말하는데, 세존께서는 어떻게 불사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까?”라며 묻습니다. 이에 아난다는 벗이여,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듭니다.”(A9.54) 로 시작 되는 아홉 가지 출세간의 원리에 대하여 설합니다. 이것이 경전에서 말하는 감로법입니다.

 

왜 더 물을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꿀라따는 부처님에게 감로법을 듣고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아픈 것도 잊어 버릴 정도로 기쁨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 되어서는 안되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모른 것입니다. 이런 점을 사리뿟따존자는 지적했습니다.

 

사리뿟따존자는 왜 더 물을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 했습니다.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극적인 변화를 가져 온 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원리를 모르면 또 다시 고통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는 더 물어서 확실하게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식으로 말한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우는 아이에게 젖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을 때는 물어 보아야 합니다. 상대방을 마음을 헤아려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청법 했을 때 알려 주는 것입니다. 나꿀라따는 부처님 한마디 말에 만족하고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사리뿟따는 원리를 알려 줍니다. 이는 나꿀라따가 뜻을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청법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온무아(五蘊無我)의 가르침

 

법의 사령관이라 불리우는 사리뿟따존자는 부처님을 대신해서 나꿀라따에게 왜 제2화살을 맞아서는 안되는지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이는 오온무아(五蘊無我)’의 가르침입니다. 오온 중에 물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며,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속박됩니다. 그는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되지만 그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 물질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S22.1)

 

 

사리뿟따 존자는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때문이라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를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적용하면 모두 20가지가 됩니다. 이를 20가지 유신견(sakkāya-diṭṭhi: 有身見)이라 합니다. 그러나 형성이 52가지에 달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수 백가지 유신견이 있습니다.

 

내세울 것이 얼굴밖에 없는 사람

 

내세울 것이 얼굴밖에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얼굴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얼굴에 작은 뾰로지나 여드름이라도 나면 노심초사합니다. 얼굴과 자아를 동일시 하기 때문입니다. 김 태희 의 눈, 이나영 의 입술, 한채영 의 몸매 등 이런 사례는 수 도 없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를 성형왕국이라 합니다. 여성들 대부분이 상꺼풀 수술 등으로 얼굴을 고쳤음을 말합니다. 언젠가 대만사람이 한국여성들은 모두 성형미인입니다.”라 했습니다. 대만여성들은 성형을 많이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얼굴에 집착하는 것은 얼굴을 자아와 동일시 하기 때문입니다.

 

유신견에 대한 네 가지 비유

 

내세울 것이 얼굴밖에 없는 사람은 얼굴과 자아와의 관계에 대하여 일치, 소유, 포함, 함축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네 가지 종류의 유신견입니다. 이 네 가지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신견 정형구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rūpa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 vā attāna, attani vā rūpa, rūpasmi vā attāna)입니다.

 

첫째, 물질을 자아로 여긴다(rūpa attato samanupassati). 이는  일치를 말합니다. 주석에서는 등잔불의 불꽃이 그 색깔과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물질이 자아와 구별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둘째,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긴다(rūpavanta vā attāna). 이는  소유 말합니다. 주석에서는 그림자가 나무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라고 설명합니다. 비물질적인 요소들을 물질을 소유한 자아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물질이 아닌 것, 즉 마음과 마음부수들을 자아라고 간주하여 이것이 물질()을 가지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마치 나무가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라 했습니다.

 

셋째,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긴다(attani vā rūpa). 이는 포함을 말합니다. 주석에서는 향기가 꽃 안에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비물질적인 것을 그 속에 물질이 놓여 있는 자아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물질이 아닌 마음과 마음부수들을 자아라고 간주하고 이 안에 물질이 놓여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마치 꽃안에 향기가 있는 것과 같다.”라 했습니다.

 

넷째,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rūpasmi vā attāna). 이는 함축을 말합니다. 주석에서는 보석이 상자속에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라 했습니다. 비물질적인 정신을 물질 안에 있는 자아로서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물질이 아닌 마음과 마음부수들을 자아라고 간주하고 이것이 물질안에 놓여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마치 보석이 상자안에 놓여 있는 것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유신견은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를 말합니다. 얼굴 밖에 내세울 것이 없는 자는 얼굴이 자신의 삶의 전부라 볼 것입니다. 만일 성형실패 항 얼굴이 흉한 모습으로 변했을 때 더 이상 삶의 의미를 느낄지 모릅니다. 돈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자 역시 돈이 자신의 삶의 전부라 여깁니다. 돈이 곧 자아이고, 돈속에 자아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M22.1)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느낌, 지각, 형성, 의식 등 오온에 모두 적용됩니다.

 

나꿀라삐따는 기로에 선자였습니다.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죽느냐사느냐의 기로에 섰을 때 부처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찾아 뵙고 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이 한마디에 180도 인격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인식의 대전환입니다. 그러나 원리를 몰랐을 때는 언제 또다시 되돌아 갈지 모릅니다. 이럴 때 사리뿟따 존자의 법문으로 확고해졌습니다. 그것은 일치, 소유, 포함, 함축으로 설명된 네 가지 유신견입니다.

 

흐름에 든 자가 되면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은 오온을 나의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론데 오온은 늘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오온이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무상하게 변하는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을 때 속박됩니다. 예쁜 얼굴이 늙어감에 따라 추해졌을 때 괴로움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물질을 자아로 여기지않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지않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지않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않으며,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습니다.”(S22.1,전재성님역)

 

 

오온을 내것으로 여기면 속박되어 괴롭지만, 오온이 내것이 아니다라고 보면 속박되지 않아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에 해당되는 자가 흐름에 든자, 예류자입니다. 흐름에 든 자의 특징은 개체가 있다는 견해회의적 의심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이 극복된 자를 말합니다.

 

흐름에 든자, 즉 수다원이 되면 더 이상 육체적 괴로움에 따른 정신적 괴로움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오온이 내것이라는 견해가 타파된 자에게 설령 제1의 화살은 맞을 지언정 제2화살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에 따른 괴로움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는 정신적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몸은 괴로워하여도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2017—04-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