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이중표교수의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비판을 비판한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7. 4. 4. 11:27

 

이중표교수의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비판을 비판한다

 

 

승리와 축복의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줄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보다 더 수승한 가르침이 있다면 그 쪽으로 달려 갈 것입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된 예경지송중에 마하자야망갈라숫따에 따르면, “제게 다른 귀의처 없고 부처님이 저의 위없는 귀의처이오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제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 하여지이다.”라 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늘 함께 하고 있습니다. 길상승리게에서 땅 떼자사 바와뚜  자야 망갈라니(Ta-tejasā bhavatu te jaya-magalāni)”라는 후렴구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늘 함께 하면 이 위신력으로 승리의 축복이 제게(그대에게) 임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승리와 축복을 가져 오기 때문에 길상승리게라 합니다.

 

훈계하는 듯한

 

승리와 축복의 부처님 가르침은 초기경전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설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중표교수입니다. 이에 대하여 수 많은 글을 썼습니다. 검색하면 가장 먼저 걸립니다. 어찌 보면 이중표교수의 가장 큰 안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중표 교수가 자신의 신념대로 이곳저곳에서 강연하고 책을 내듯이, 이중표 교수의 모순에 대하여 지적하는 것도 신념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중표교수의 강연을 즐겨 보고 있습니다. 물론 비판하기 하여 보는 것입니다. 주로 유튜브를 통하여 접한 이중표교수의 강연을 보면 한마디로 가르치려 든다라는 것입니다. 마치 선생이 학생이 호통치면서 훈계하는 듯하고, 부모가 자식에게 야단치며 가르치려 하는 것 같습니다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가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중표교수의 삼세양중인과비판

 

이중표교수에 따르면, 자신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분석해 보니 이제까지 알고 있던 불교가 모두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바로 잡아 주기 위해서 전국을 돌아 다니며 강연을 하고 책을 내는 것이라 보여집니다. 이번 강연은 지리산 천은사 집중수련모임에서 강연한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강연의 포문은 삼세양중인과비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서 삼세양중인과를 가지고 연기법을 누가 했다고 합시다. 전생에 어리석음 때문에 업을 많이 지어서 그 업을 지은 중생의 식이 부모가 정을 나눌 때 어머니 태에 들어 왔다. 그래가지고 거기서 정신과 물질의 우리의 몸과 마음이 형태들이 만들어지다가 육근의 형태를 지니고 나서 세상에 나오는 것이 촉이다. 이렇게 설명하죠? 아마 불교대학 가서 다 그렇게 들었을 거에요. ..살아 가면서 다시 업을 지어가지고 그 업의 결과로 유가 만들어지면 그 유가 다시 내세에 태어나면 그놈이 또 늙고 병들어 죽어 가는 것이 십이연기다 이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삼세양중인과설이라 하는 십이연기해석이에요. 그게 의미가 있으려면 여러분들이 전생을 기억해내야 되요.” (2017 천은사 집중수련 이중표 교수님 강의 - 2월 24)

 

 

 

 

이중표교수의 강연을 수 없이 들어 보았습니다. 어느 강연을 들어 보아도 내용은 똑같습니다. 마치 유튜브에서 본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의 법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개나 소나 유튜브법문

 

개나 소나 유튜브법문시대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거거든. 이거 뿐이라니까!”라며 똑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자신의 말을 계속 듣고 있다 보면 언하에 대오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때로 탁자를 탕탕치기도 하고, 때로 종소리를 들려 주기도 합니다. 그때 하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라 합니다.

 

매번 똑 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있어서 이중표 교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튜브에 수십, 수백개에 달하는 강연 아무 것이나 찝어 들어도 매번 삼세양중인과 비판이고 이어서 나마루빠가 이름-형태라는 식의 강연입니다. 이런 사실을 너무도 당연히 잘 알고 있지만 혹시나 새로울 것이 없나 해서 끝까지 들어 보지만 역시나 똑 같은 내용입니다.

 

마치 녹음기를 틀어 놓듯이 똑 같은 말만 반복합니다. 대승을 기반으로 하여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의 법문이 대게 그렇습니다. 한두번 듣고 나면 더 이상 들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경전은 매우 방대합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빤냐와로 삼장법사의 유튜브 법문을 들어 보면 똑 같은 내용이 거의 없습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을 자신의 수행과 곁들여 현실과 맞게 설명합니다. 이런 법문은 두 번, 세 번 들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번 똑 같은 말만 반복하는 법문은 식상하기 그지 없습니다.

 

전생을 기억해내야 한다고

 

이중표교수의 트레이드마크라면 아마 자신의 박사논문 아함의 중도체계일 것이빈다. 여기서 중도라는 말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가 아니라 용수의 중론에 따른 중도를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허망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삼세양중인과로 설명되는 십이연기는 중도체계에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삼세양중인과가 의미가 있으려면 여러분들이 전생을 기억해내야 되요.”라 했습니다.

 

전생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선정을 닦아 숙명통이 열리면 전생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육칠세 정도에 머뭅니다. 이전생에는 어떤 생을 살았는지, 더 이전에는 또 어떤 생을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현생의 이 몸과 마음을 보고서 전생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현생은 전생으전부터 온 것이라는 부처님의 업과 업의 작용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중표 교수는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윤회의 부정입니다. 동시에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표현만 다를 뿐 같은 것이라고

 

이중표교수의 천은사집중수련동영상을 보면 거의 두시간 동안 쉼 없이 말합니다. 자신이 확립한 중도체계를 널리 알리기 위한 열정이라 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 보면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삼세양중인과입니다.

 

이중표 이중표 교수의 입장에서 본다면 삼세양중인과는 반드시 부정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세워 놓은 체계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본가르침을 중론과 유식으로 해석한 중도체계를 말합니다.

 

이중표교수는 근본가르침과 대승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심지어 강연에서 여래장사상에 대하여 근본가르침이 알기 쉽게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가하면, 대승열반경의 상락아정에 대하여 근본경전의 무상고무아부정과 표현만 다를 뿐 같은 것이라 주장합니다. 과연 이런 주장을 어디까지 수용해야 할까요?

 

여래장은 무아사상이라고

 

일플러스일은 이(1+1=2)라고 믿는 공학도출신입니다. 그러나 이중표 교수의 논리에 따르면 일플러스일은 이도 되고 삼도 되는 것 같습니다. 아니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가 하면, 있는 것을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있는 것 마저 180도 바꾸어 말합니다. 이중표교수는 니까야로 읽는 중론강좌에서 여래장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능가경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래장은 무아의 여래장입니다. 왜 여래장을 설했느냐는 물음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트만에 빠져 있어요. 뭐가 있어여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없다그러면 옆에 오지도 않아. 그러니까 방편으로 무엇이 있어야해. 그것이 여래장이야. (부처님이) 너희들이 아트만이라고 하는 비슷한 것 하나가 있기는 있다 그것이 여래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래장도 무아다이렇게 표현이 나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여래장은 불교가 아니다라고 일본 누구가 이렇게 말해요.” (이중표교수, 니까야로 읽는 중론1 1-2)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여래장도 무아사상이라 합니다. 능가경에 여래장은 무아의 여래장입니다.”라는 말을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이 아트만 사상의 아류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여래장에 대하여 무아라고 하는가 하면, 대승불교 반야부경전이 근본경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고 표현만 다를 뿐이라 합니다.

 

중론으로 재해석한 중도체계

 

위록지마(謂鹿止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슴을 사슴이라 말하지 못하고 말이라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래장사상은 명백한 아트만 사상임에도 근본불교의 무아사상이라고 같은 것이라 합니다. 학자의 권위로 그렇게 말하면 받아 들일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일개 블로거가 여래장은 무아사상이다라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중표 교수는 왜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중표 교수는 강연에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 불교에 대한 박사논문이 기존의 불교와는 해석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아비달마불교 다 무시하고 저 나름대로 중론과 초기경전에 나오는 경전에 근거해서 의미들을 해석해서 다시 사상체계가 중도체계가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거든요.” (이중표교수, 니까야로 읽는 중론1 1-2)

 

 

이중표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이 중론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용수의 중론으로 재해석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기존 전승되어 온 불교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이중표교수는 불교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했습니다. 부처님 이래 처음이라 합니다. 자신만이 해석한 불교에 따르면 아비달마논장은 모두 거짓이 되어 버리고 삼세양중인과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중표교수의 중도체계에 따르면, 여래장사상이 아트만 사상의 아류임에 분명함에도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도체계의 놀라운 신공(神功)

 

이중표교수의 중도체계는 놀라운 신공을 발휘합니다. 어느 것에나 중도체계를 적용하면 모두 무력화 시키고 쳐 부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대승경전만큼은 보호 됩니다. 그래서 근본가르침이 대승경전과 다르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대승경전의 상락아정이 초기불교의 무상고무아부정과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어떤 신공인지 궁금합니다. 유튜브강연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교의 무아설은 나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허망한 자아로부터 벗어나서 참된 자아의 삶을 사는 겁니다. 이 자아라는 것은 무아라는, 이때 자아라고 하지만 실체적인 자아로서 생각하면 안되죠. 부처님은 그런 것을 염려 해서 무아, 공을 강조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무아와 공을 진아라는 측면에서 부르게됩니다.

 

그래서 진아를 이야기하고 진아는 상락아정이다이런 표현들 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또 대승불교는 불교가 아니다이렇게. 말만 가지고는 그렇잖아요? 부처님은 무아라 했는데 여기서는 진아이야기하고, 오온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라 하는데 상락아정이야기 하고, ‘이게 무슨 이야기냐? 부처님 이야기가 반대가 된다이렇게 이야기하죠?

 

반대가 아닙니다. 말은 달라도. 그래서 컴퓨터에다 넣어 놓으면 대승불교와 근본불교는 정반대다 이런 답이 나오겠지만, 그걸 직접 실천 수행해서 들여다 본 사람들은 언어적 표현의 차이일뿐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이 한 맛이다 그렇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017 천은사 집중수련 이중표 교수님 강의 - 2월 24)

 

 

참으로 놀라운 신공입니다. 또한 놀라운 궤변입니다. 대승불교의 상락아정이 졸지에 초기불교의 무상고무아부정과 같아져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근본가르침과 대승불교는 차이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중표교수에 따르면,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를 계승하고 발전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아비달마불교는 가르침을 심하게 왜곡하고 있다 하며, 삼세양중인과 등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말했다고 가혹하게 비판합니다. 용수가 중론으로 부파불교를 파사현정한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이중표교수에 따르면 근본불교와 초기불교는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표현만 다를 뿐 같은 것이라 합니다. 심지어 여래장에 대하여 근본가르침과 같은 것이라 하는가 하면, 무아와 진아가 같은 것이라 하고, 상락아정이 무상고무아가 같은 것이라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중표 교수의 중도체계에 따르면 불가능도 가능으로 바꾸어 놓고, 없는 것도 있다고 하고, 있는 것도 없다고 하는 놀라운 신공을 발휘합니다.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라 생각하고


핵심을 핵심이 아닌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릇된 사유의 행경을 거닐며


그들은 핵심적인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Dhp.11)



 

 삼세양중인과는 생물학적 윤회?

 

이중표 교수는 아비담마논장을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왜곡했다는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지도 않은 것을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것이 삼세양중인과라 합니다. 그래서 그런 모순된 말을 남기고 부처님이 돌아가셨겠어요?”라 합니다. 이와 같은 비판의 절정은 삼세양중인과에서 나타납니다.

 

이중표교수는 삼세양중인과에 대하여 단지 생물학적 윤회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중표교수는 왜 이렇게 강연 때 마다 삼세양중인과를 비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삼세양중인과를 부파불교의 산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3의 석가인가?

 

용수를 2의 석가라 합니다. 대승불교의 창시자로 볼수도 있습니다. 용수는 부파불교를 파사현정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때 당시 최대의 부파를 형성하고 있었던 설일체유부의 유론에 대한 비판입니다.

 

삼세양중인과가 부파불교의 산물이라면 이중표교수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히 비판대상입니다. 부파불교의 산물로 보는 아비달마를 부정하고 삼세양중인과를 비판하는 것은 자신의 이론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몸부림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세양중인과를 단지 생물학적 윤회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 매도한다면 지나칠 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 됩니다.

 

이중표교수의 강연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르치려 드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알고 있는 불교가 다 잘못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새롭게 해석한 불교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막말도 서슴지 않습니다. “불교교리 공부 해 봤자 도움이 안됩니다.”라든가, “윤회설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삼세가 밖에 실재한다고 보는 겁니다.”라는 말입니다.

 

이중표교수는 아비달마와 삼세양중인과를 비난할 때는 불선심을 자극하는 말도 서슴지 않습니다. 정말 이중표교수가 자신이 말한대로 수천년 동안 잘못 해석하여 전승된 가르침을 바르게 해석했다면 그에 대하여3의 석가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중론의 논리로 따지면

 

거의 2시간에 이르는 천은사 집중수련 강연 동영상을 보고 메모해 놓았습니다. 모두 다 표현하여 비판할 수 없습니다. 가장 인상에 남는 것 몇 가지를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에 열반이 있습니다.

 

이중표교수식의 설명에 따르면 열반은 없습니다. 아니 있다’ ‘없다라는 말 자체를 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열반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도 모순이 됩니다.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윤회도 없습니다. 물론 죽음태어남도 없습니다. 마치 대승에서 반야심경을 낭송하는 것 같습니다.

 

공의 입장에서는 어느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나 비() 또는 불() 등 부정어를 사용하 표현합니다. 이런 표현법은 중론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중관학의 권위자 김성철 교수는 중관의 논리로 따지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부정됩니다.”라 했습니다. 언어로 아무리 잘 표현 하려 해도 모순이 있기 때문입니다. 열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중론의 논리에 따르면 명사화 된 것은 모두 모순입니다. 열반이라 했을 때 이는 단지 개념일 뿐입니다. 그래서일까 로버트 버스웰 교수는 열반이 아니라 열반하다라고 동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십이연기에서 유()라는 말 역시 성립하지 않는 말입니다.

 

유를 빠알리어로 바와(bhava)라 합니다. 이중표교수는 영어 비잉(being)’이라 합니다. 어원적으로 바와나 비잉은 같은 것이라 합니다.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동사적 표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중론에 따르면 명사보다 동사입니다. 동사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십이연기에서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당연히 윤회도 없습니다. 열반도 없습니다. 있다면 지금 여기서 삶만 있게 됩니다.

 

태어남과 죽음은 없다고

 

이중표 교수는 지금 여기서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기억나지 않는 전생이나 경험 해 본적이 없는 태어남과 죽음은 큰 관심사가 아니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안태어나고 안죽는데 가고 싶다고 한번도 해본적이 없어요. 왜냐 하면 안태어난다는 말도 문제고, 안죽는다는 말도 문제에요. 안태어나고 안죽는 곳이 있다는 것도 믿음이 안가요.”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죽은 놈 있고 태어난 놈 있어야 하는데 죽자 마자 태어났다고 하면 문제가 또 생겨요. 생과 사는 모순이기 때문에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거에요. 개념적으로. .. 유와 무가 동시에 있다는 거거든.  고민한거죠. 가운데다 뭐하나 끼워 넣자. 그래서 중이라는 개념이 나와요. 중유 또는 중음신이라는 개념이에요.” (2017 천은사 집중수련 중표 교수님 강의 - 2월 24)

 

 

이중표교수는 죽음에 대한 문제로 고등학교 때 출가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음이나 태어남이 이제 문제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개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용수의 중론에 따르면 개념화된 말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래서 존재(: bhava)에 대하여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죽고 태어난다고 해요. 유라는 개념이 그거에요.”라 합니다. 명사적으로 이름 붙여진 것은 실재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당연히 죽음이니 태어남이니 하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후대 사람들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해서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생물학적 윤회를 설명한 것이 삼세양중인과라 합니다.

 

이중표식 열반을 보면

 

그렇다면 이중표 교수가 말하는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은 어떤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나라는 착각을 일으키는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가를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오온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고 여러분의 삶속에서 오온이 작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걸 오온이 멸했다고 합니다….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한 여러분은 생명체로 살아갑니다. 이 생명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몸뚱이 속에서 온갖 번뇌와 고통이 일어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거에요. 삶의 본질을 근본을 제대로 깨닫고 살아가면 고통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환희심과 행복감이 충만해질 수 있다는 거에요. 이게 열반입니다.” (2017 천은사 집중수련 이중표 교수님 강의 - 2월 24)

 

 

이중표교수의 열반론입니다. 일견 타당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불자들이 알고 있는 열반과 다릅니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열반과도 다릅니다. 청정한 삶을 살아 탐진치를 소멸하는 삶 등 초기경전에서 언급된 열반과 달리 단지 오취온만 벗어나면 된다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이 몸과 마음을 가진 이 생명체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꼈을 때 그것이 열반이라 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현법열반(現法涅槃)입니다. 가짜열반을 말합니다.

 

반쪽짜리 불교

 

이중표표수의 열반론을 보면 한편으로 타당하기도 하지만 또한편으로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 사성제를 설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동시에 윤회의 종식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십이연기가 현실의 삶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윤회의 종식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로 본다면 연기는 괴로움의 소멸과 동시에 윤회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중표교수의 강연에 따르면 오로지 현실의 삶에 대한 것입니다. 윤회는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견해를 말한 것입니다. 이는 반쪽짜리 불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중표교수는 반쪽짜리 불교를 설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고 하여 윤회를 부정합니다. 또 중론에서 윤회는 명사로서 시설된 것이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은 것이라 합니다. 이는 강연 도중에 누구 천당 갔다 온 사람 있어요?”라고 묻는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심지어 삼세양중인과가 의미가 있으려면 여러분들이 전생을 기억해내야 되요라 합니다. 마치 강병균교수가 설령 윤회가 참이라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라며 간난아기 이론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소멸과 윤회의 소멸에 대해 설했습니다. 그러나 이중표 교수는 부처님은 오로지 괴로움의 소멸만 설했다고 말합니다. 반쪽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부처님은 현세적인 가르침만 펼치셨지 내생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초기경전을 읽어 보지 않은 자는 이런 말에 동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을 읽어 보면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이중표교수의 입에 의존하고, 이중표교수의 입만 바라본다면 이중표 교수는 용수이래 가장 위대한 제3의 석가일 것입니다.

 

중관학의 권위자 김성철 교수는

 

윤회없는 불교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설령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합리적인 추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가르침이 방대한 팔만사천 법문입니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은 경전을 다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꼭 필요한 경전 일부만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전승된 경전에 대하여 자신의 잣대로 판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경전을 불신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용수의 중론의 영향이라 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중관학의 권위자 김성철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용수스님이 보시기에 중관학적 조망에서는 현실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 만날 수 없고 현재는 과거미래 틈에 끼여서 있을 곳이 업습니다. 과거미래현재가 실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존재가 있다고 말을 하는데 그것은 생각속에서만 있는 것이지 실제 외부세계에 실재하지 않습니다.” (김성철교수, STB콜로키움 33 중관학 7)

 

 

중론은 철저하게 언어를 부정합니다. 설령 부처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언어로 표현된 것은 모두 모순이라 합니다. 이런 중론의 논리에 대하여 김성철교수는 테크닉(기교)’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김성철 교수는 중론은 테크닉으로 생각해야지 사상체계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라 했습니다.

 

김성철교수는 중론을 사상체계로 받아 들여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악취공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려와 달리 이중표교수는 중론을 자신의 사상체계로 받아 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중론으로 해석하여 윤회도 없고 열반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중도체계는 단멸론? 

 

중론을 자신의 사상체계로 받아들인 이중표 교수는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해야만 합니다. 삼세양중인과를 받아들이는 한 수 십년 쌓아 올린 자신의 학문적 성과는 물거품이 됩니다. 그래서일까 이곳저곳 강연에서 늘 똑 같은 소리를 합니다. 오로지 현실의 삶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십이연기 역시 현실에 삶에 대한 가르침이라 합니다.

 

십이연기가 현실의 삶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십이연기를 확장하면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여집니다.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는 것 같습니다.

 

이중표교수는 여러분들이 전생을 기억해내야 되요라며 말하며 윤회를 부정합니다. 또한편으로 양자론 등 과학적 설명을 곁들여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 합니다. 마치 과학적 유물론자처럼 보입니다. 초기경전에서 유물론은 대게 단멸론입니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보시공덕도 없다는 등 모든 것을 무() 또는 비() 또는 불()로 보는 것입니다.

 

이중표교수는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는 것은 윤회를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은 단멸론자들입니다. 오로지 현세적 삶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이중표교수의 중도체계는 단멸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

 

이들 진리를 보았으니

존재의 통로는 부수어졌고

괴로움의 뿌리는 끊어졌고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어졌네.”(S56.21)

 

 

 

2017-04-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