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해 동안 나는 한 마디 말만 했다” 불교판 오이디푸스 강가띠리야존자
늘 배고픈 동물의 삶
자연다큐에서 인상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동물은 늘 배고프다는 것입니다. 특히 육식동물이 그렇습니다. 사자, 호랑이, 표범, 치타 등 강한 어금니와 놀라운 스피드를 자랑하는 육식동물들은 늘 허기져 있다는 것입니다. 늘 먹을 것을 찾아 두리번 거리다가 목표물이 발견되면 몰래 가까이 다가가서 폭발적 스피드로 제압합니다. 그러나 놓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약육강식의 세계라 하지만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야수는 늘 허기져 있습니다.
동물은 늘 배고프고 허기져 있습니다. 그나마 나은 것은 초식동물일 것입니다. 힘들게 다른 동물을 잡아 먹지 않아도 됩니다. 돋아난 풀이나 나무의 잎을 먹으면 됩니다. 그러다 보니 거의 하루 종일 먹습니다. 마치 먹기 위하여 사는 것 같습니다. 소의 경우 먹은 다음 되새김질을 합니다. 위가 여러 개 있어서 되새김질 하는 과정에서 풀만 먹어도 단백질 등 여러가지 영양물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반드시 육식을 해야만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은 늘 허기져 있습니다. 끊임없이 먹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육식동물은 하루 종일 사냥하기 위하여 기회만 엿보고 초식동물은 초지를 찾아 이동합니다. 그러나 식물은 스스로 먹이를 만들어냅니다. 식물은 광합성작용으로 스스로 성장합니다. 동물은 늘 움직이어야하기 때문에 먹이를 찾아 나서지만 식물은 그 자리에서 햇볕에 의존하여 먹이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허기지지 않습니다.
동물과 식물의 차이는 움직임여부로 알 수 있습니다. 동물은 이동가능하지만 식물은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동물과 식물의 차이는 정신능력에 있습니다. 늘 먹을 것을 찾아 다니는 동물은 정신능력이 발달해 있지만 한자리에서 햇볕에 의존하는 식물에게는 정신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식물을 ‘무정물’이라 하고, 동물을 ‘유정물’이라 합니다.
교미로 형성된 것들
불교에서는 유정물이 교화의 대상입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태란습화’를 특징으로 합니다. 그러나 태란습화라는 말은 니까야를 기원으로 합니다. 맛지마니까에 따르면 “사리뿟따여, 이러한 네 갈래 태어남이 있다. 네 갈래란 어떠한 것인가?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이다. (Catasso kho imā sāriputta yoniyo. Katamā catasso? Aṇḍajā yoni, jalābujā yoni, saṃsedajā yoni, opapātikā yoni)”(M12) 라 했습니다. 이를 사생이라 합니다. 모든 유정물은 사생중의 하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연다큐에서 새의 부화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짝짓기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짝짓기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 알을 낳고 부화합니다. 개집에 귀여운 강아지 새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숫케와 암케가 교미를 해서 형성된 것들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려면 부모의 성적교섭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은 인공수정으로도 태어나긴 하지만 대부분 짝짓기에 따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난생과 태생은 모두 암수의 짝짓기 결과물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짐승과 인간은 모두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 없이 먹고 개체를 보전 하기 위해 때가 되면 짝짓기 하여 자손을 늘려 나가는 것입니다.
입과 성기 그리고 식욕과 성욕
자연다큐를 볼 때 마다 늘 느끼는 것은 인간도 축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육체로 이루어진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허천난 사람처럼 늘 먹어야 합니다. 요즘 TV에서 보는 먹방프로가 이를 잘 반영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황제식을 했더라도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배고파 견딜 수 없어 합니다. 또다시 먹거리를 찾아 나섭니다. 매일, 매년, 수십년 반복되는 삶입니다. 늙어 죽을 때 까지 먹어야 살아 갑니다. 마치 먹기 위해서 사는 삶 같습니다.
먹는데 있어서 인간이나 동물이나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잡식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초식도 하지만 육식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먹습니다. 이 세상에 먹지 못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듯합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심지어 ‘인육(人肉)’도 먹을지 모릅니다. 오로지 먹기 위해서만 산다면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삶입니다.
모든 동물은 입과 항문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치 인풋(Input)이 있으면 아웃풋(Output)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끊임 없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바쁘고 또 하나 해야 할 일은 자손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기가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모든 동물의 특징은 입과 항문, 그리고 성기를 특징으로 합니다.
생태하천을 걷다가 애완견을 보았습니다. 몸통에 비하여 다리가 매우 짧습니다. 만일 자연에 내버려 둔다면 생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애완견을 보면 오로지 세 가지 특징, 즉 입과 항문과 성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끊임 없이 먹어야 하고 자손을 남기기 위해서는 잘 발달된 성기는 필수적입니다.
어느 동물이나 인간이든지 식욕과 성욕으로 살아갑니다. 식욕과 성욕으로 살아가는 한 인간도 동물의 범주에 속합니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식욕과 성욕으부터 자유로울 때 일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식욕과 성욕이라는 근본적인 욕망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식탐이 있고 나이가 들어도 성적욕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맛에 대한 갈애
식욕과 성욕으로 살아가는 한 감각적 욕망에 따른 재난을 피해 가기 어렵습니다. 오감이 총동원된 식욕과 성욕에서 자유로운 자는 보기 힘듭니다. 욕망의 세계를 떠난 성인의 경지에 들어 서지 않는 한 오욕락의 노예가 되어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만일 맛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면 “아들고기에 대한 비유를 상기하라.”(Thag.445) 고 했습니다.
아들고기 비유가 있습니다. 황야에서 헤메던 부부가 아들고기를 먹고 살아남은 비극적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고기를 대할 때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은 놀이 삼아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취해서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진수성찬으로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영양을 위해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S12.63)라고 반문 했습니다.
초기경전에 묘사되어 있는 아들고기교훈이야기는 충격적입니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처하면 인육까지 먹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스런 아들을 잡아 고기로 먹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맛에 대한 갈애로 사는 자들에 대한 경고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맛과 관련하여 아들고기의 교훈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초기경전에는 성접교섭과 관련하여 ‘모자근친상간(母子近親相姦)’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모자근친상간(母子近親相姦)이야기
맛에 대한 갈애는 반드시 식욕만 해당되는 것이라 볼 수 없습니다. 성적욕망도 맛에 대한 갈애의 범주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적욕망은 식욕보다 더 무서운 재난을 초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숫따니빠따에 “친밀한 데서 두려움이 생기고, 거처에서 더러운 먼지가 생겨난다. 거처도 두지 않고 친밀한 것도 두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성자의 통찰이다.”(stn207)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이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한 여인이 지아비를 잃고 자식을 출가시키고 자신도 수행녀교단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런 이야기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어머니와 아들의 경(A5.55)’이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어느 수행승이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여기 싸밧티 시에서 어머니와 아들 두 사람이 수행녀와 수행승으로 안거에 들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자주 보기를 원했습니다. 어머니도 아들을 자주 보기를 원했습니다. 아들도 어머니를 자주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자주 본 뒤에 서로 접촉하게 되었고 서로 접촉한 뒤에 친밀해지고 친밀해진 뒤에는 애욕에 빠지고, 애욕에 빠진 뒤에 수행자의 배움을 버리지 않고 타락을 숨기고 성적인 교섭을 했습니다.” (A5.55) 라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경에 따르면 모자는 비구와 비구니가 되어 자주 만났습니다. 서로 자주 만나고 보는 사이에 욕정이 생겨났습니다. 출가신분임에도, 어머니와 아들사이임에도 서로 끌려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비난을 받고 속퇴했습니다. 이와 같은 모자상간 행위는 짐승에게서나 볼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짐승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과 짐승과 다른 것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It.36) 라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원리가 없다면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라고 시설할 수 없을 것이라 했습니다.
“아무와도 말하지 않겠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자에게 있어서 최악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재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맛에 대한 갈애가 일어날 때마다 아들고기의 비유를 생각하라는 말이 있듯이, 성욕에 대한 갈애가 일어날 때 아마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에 실려 있는 강가띠리야와 우빨라반나의 이야기를 떠 올려야 할 것입니다.
강가띠리야와 우빨라반나의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오이디푸스의 신화를 떠 올리게 합니다. 테라가타 강가띠리야 인연담에 따르면, 모자는 서로 모른 상태에서 결혼했습니다. 더구나 강가띠리야에게는 이복여동생도 있어서 삼각 근친상간관계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 강가띠리야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습니다.
Tiṇṇaṃ me tālapattānaṃ
gaṅgātīre kuṭī katā,
Javasittova me patto
paṃsukūlaṃ ca cīvaraṃ.
“세 종려나무 잎으로
나의 집은 갠지스강가에 만들어졌다.
발우는 장의용 단지이고
나의 의복은 분소의이다.” (Thag.127)
Dvinnaṃ antaravassānaṃ
ekā vācā me bhāsitā,
Tatiye antaravassamhi
tamokkhandho padālito.
“두 해 동안에 걸쳐
나는 한 마디 말만 했다.
세 번째 해의 우기에
어둠의 다발이 부수어졌다.”(Thag.128)
테라가타 이련시집에 실려 있는 강가띠리야 존자의 고백입니다. 강가띠리야는 출가하기 전에 어머니와 이복여형제와 근친상간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모르고 지은 죄입니다. 이는 아들 강가띠리야와 어머니 우빨라반나의 기구한 운명에 따른 것입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안 강가띠리야는 몇 해 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강가띠리야 장로 인연담
강가띠리야는 두 해 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게송에 따르면 “나는 한 마디 말만 했다.(ekā vācā me bhāsitā)”라 했습니다. 왜 한마디말만 했을까요? 주석에 따르면 “두 해 동안 거룩한 경지를 얻지 못했을 때에, ‘자매여, 그만하십시오.’라는 말 한마디만 했다.”(ThagA.II.9)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대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다음과 같은 기구한 운명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빠두뭇따라 부처님 당시에 한 훌륭한 가문에 태어나 성년이 되자 가르침에 기쁨을 발견하고 수행승의 참모임에 음료를 보시했다. 그는 그 공덕으로 천상계에 태어나 계속해서 공덕을 짓고 천상계와 인간계를 윤회하다가 고따마 부처님께서 탄생할 무렵, 싸밧티 시의 한 장자의 아들으로 태어나, ‘닷따’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가 나이가 들어 청년이 되자 재가생활을 하면서 안될 것을 모르고 어머니와 이복형제와 근친상간의 죄를 짓고 범해서는 안될 것을 알고 나서는 외경이 생겨나 출가해서는 그 행위를 싫어하여 고행적 삶을 실천하면서 분소의와 해골바가지 모양의 흙발우를 얻어서, 갠지스 강에 세 종려나무 잎으로 초암을 짓고 살았다. 그래서 그는 ‘강가띠리야’라고 알려졌다.
그는 거룩한 경지를 얻지 못하고, ‘아무와도 말하지 않겠다.’라고 결심하고 첫 번째 해를 침묵하면서 말 한마디 없이 지냈다. 두 번째 해에 탁발하러 가다가 한 여자가 ‘혹시 벙어리 아닐까?’라고 조사하려고 발우에 우유를 부었는데, 손을 저었는데도 붓자, ‘자매여, 그만하십시오.’라고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세 번째 해에 안거 중에 용맹정진하여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 (Ap.II.437)
그는 거룩한 경지를 얻고 나서 자신의 예전의 실천에 관해 설명을 통해 궁극적인 앎을 선언하면서 아래의 두 편의 시(Thag.127-128)을 읊었다.
(ThagA.II.7, 테라가타 Thag.127-128 강가띠리야존자 인연담, 전재성님역)
강가띠리야 존자가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근친상간의 죄를 저지르고 출가하여 두 해 동안 한마디도 말하지 지내다가 발우에 우유가 넘치도록 따라주는 여자에 대하여 “자매여, 그만하십시오.”라고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왔음을 말합니다.
강가띠리야는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커서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출가하여 홀로 사는 초막에서 벙어리처럼 몇 해를 보낸 것입니다. 마침내 세 번째 해 우기에 “어둠의 다발이 부수어졌다.”라고 했습니다. 묵언수행의 결과 일체의 번뇌가 남김 없이 사라진 것을 말합니다. 아라한이 된 것입니다.
기구한 운명 우빨라반나 장로니
강가띠리야는 우빨라반나의 아들입니다. 기구한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테리가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테리가타 우빨라반나의 12연 게송이 그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아들 강가띠리야와의 기구한 운명과 극복에 대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Ubho mātā ca dhītā ca
mayaṃ āsuṃ sapattiyo.
Tassā me ahu saṃ vego
abbhuto lomahaṃsano.
“우리 두 사람 어머니와 딸이
한 남자를 남편으로 삼았으니,
그러한 나에게 미증유의
털이 곤두서는 외경이 일어났다.”(Thig.224)
2.
Dhiratthu kāmā asuci
duggandhā bahu kaṇṭakā,
Yattha mātā ca dhītā ca
sabhariyā mayaṃ ahuṃ.
“우리 두 사람 어머니와 딸이
한 남자를 남편으로 삼았으니.
끔찍하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부정한 것, 악취나는 것, 형극이다.” (Thig.225)
3.
Kāmesvādīnavaṃ disvā
nekkhammaṃ daṭṭhu khemato,
Sā pabbaji rājagahe
agārasmānagāriyaṃ.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재난을 보고
여읨에서 오는 견고한 안온으로 보았으니,
라자가하 시에 살던 그러한 나는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였다.” (Thig.226)
4.
Pubbenivāsaṃ jānāmi
dibbacakkhuṃ visodhitaṃ,
Cetopariccañāṇañca
sotadhātu visodhitā.
“나는 전생의 삶을 알게 되었고
하늘눈은 맑아지고,
타인의 마음을 읽는 지혜가 생겨났고
청각세계가 청정해졌다.” (Thig.227)
5.
Iddhīpi me sacchikatā
patto me āsavakkheyo,
Chaḷabhiññā sacchikatā
kataṃ buddhassa sāsanaṃ.
신통이 나에게 깨우쳐졌고
일체번뇌는 부수어졌다.
여섯 가지 곧바른 앎이 이루어졌고
깨달은 님의 교법이 실현되었다.” (Thig.228)
우빨라반나 장로니의 시는 Thig.224에서부터 Thig.235까지 12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위의 5연시는 아들과 근친상간이라는 기구한 운명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어머니와 딸이 한 남자를 남편으로”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남자가 바로 아들 강가띠리야 입니다. 운명의 장난으로 인하여 해서는 안될 행위를 한 것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재난(Kāmesvādīnavaṃā)”라 했습니다. 그러한 감각적 욕망에 대하여 “끔찍하다! 부정한 것, 악취나는 것, 형극이다.”라 했습니다.
우빨라반나에 따르면 감각적 욕망은 끔찍한 것(Dhiratthu)이라 했습니다. 더구나 부정한 것(asuci), 악취나는 것(duggandhā)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부정한 것이라는 뜻의 빠알리어 ‘asuci’는 영어로 ‘dirt; excrement; dung; semen’의 의미입니다.
부정한 것으로 정액(semen)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정액은 악취나는 것으로 묘사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빠알리어 ‘duggandhā’는 ‘bad smell’입니다. 그래서 지난날 감각적 쾌락의 삶에 대하여 “끔찍하다! 부정한 것, 악취나는 것, 형극이다.”라는 성찰이 일어나 출가하게 되었습니다. 출가하여 선정의 즐거움과 열반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Thig.224-226을 읊은 것입니다.
모자지간 근친상간이 된 이유
아들로서 강가띠리야와 어머니로서 우빨라반나는 기구한 운명으로 만났습니다. 때가 되어 관습과 인습에 따라 결혼했지만 모자지간 근친상간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인연담의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싸밧티 시의 한 상인의 아내에게 새벽에 태기가 생겨났다. 그녀는 그것을 몰랐다. 새벽에 상인은 수레에 상품을 싣고 라자가하 시로 떠났다. 그가 가는 동안 태아가 자라나서 성숙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말했다. ‘나의 아들이 오랫동안 출타했는데, 너는 임신을 했다. 너는 사음을 한 것이다.’ 그녀는 ‘저는 당신의 아들 밖에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그것을 듣고도 시어머니는 믿지 못하고 그녀를 꾸짖고 내쫓아 내었다.
그녀는 남편을 차례로 찾아다니면서 라자가하 시에 도착했다. 곧바로 그녀의 산통이 시작되어 길가에 한 회당에 들어가서 출산을 했다. 그녀는 황금빛 빔바 열매와 같은 아들을 출산하고 보호자도 없이 회당에 아이를 눕혀놓고 세정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한 아이가 없는 카라반이 그 길을 가다가 주인 없는 아이를 보고 ‘내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그 아이를 유모의 손에 넘겨 주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세정을 하고 물을 가지고 돌아 왔는데, 아이가 보이지 않자 슬픔에 잠겨 비탄해하면서 라자가하 시로 들어가지 않고 길을 걸었다.
그녀를 어떤 도둑의 우두머리가 도중에 보고 마음이 사로잡혀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그녀는 그의 집에 살면서 딸을 낳았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 날 딸을 데리고 서 있으면서 남편과 말다툼을 하다가, 화가 나서 딸을 침대에 던졌다. 딸의 머리가 조금 깨졌다. 그러자 그녀는 남편이 두려워 라자가하 시로 돌아와서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그녀의 아들이 청년이 되었는데, 어머니를 알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나중에는 그 도둑의 우두머리의 딸을 배다른 형제인 것을 몰라보고 결혼을 하고 자신의 집에 데리고 왔다. 그래서 그 두 여인은 동일한 남편을 두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의 머리타래를 풀고 이를 찾다가 머리에 난 상처를 보고 ‘이 아이가 나의 딸이 틀림없다.’라고 자문하고, 외경이 생겨나 라자가하 시에 수행녀의 처소에 가서 출가하여 먼저 해야 할 의무를 다하고 멀리 여읨의 삶을 살면서 자신이 예전에 행한 일을 성찰하고 그 다음의 시(Thig.225)를 읊었다.
그녀가 말한 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위험을 보여줌으로써 반복한 것이다. 그래서 선정의 즐거움, 경지의 즐거움, 열반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이러한 세 편의 시(Thig.224-226)를 읊은 것이라고 말해진다.
(ThigA.177, 테리가타 Thig.224-235 우빨라반나 인연담, 전재성님역)
인연담을 보면 해피엔딩입니다. 이는 비극적으로 끝나는 오이디푸스의 신화와는 대조적입니다. 오이디푸스신화에서는 어머니는 자살하고 아들인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찔러 소경이 됩니다. 소경이 된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의 사이에 난 딸에 의지하여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외롭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빨라반나와 강가띠리야 인연담에 따르면 둘 다 모두 출가하여 아라한이 됩니다.
게송과 인연담에서는 모두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재난을 경고 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이고 순간적이고 거칠기만한 감각적 욕망보다는 선정의 즐거움, 경지의 즐거움, 열반의 즐거움이 훨씬 더 나음을 말합니다. 비록 운명의 장난으로 인하여 근친상간이라는 엄청난 재난을 겪었지만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알기에 아라한이 되어 괴로움과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식욕과 성욕에 매여 있는 한
욕망의 세계를 살아가는 자들은 식욕과 성욕을 특징으로 합니다. 오로지 먹기만 하고 오로지 번식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래서일까 사람을 포함하여 축생을 보면 먹기 위한 입과 배설하기 위한 항문, 그리고 생식을 위한 성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움직이는 동물들은 늘 배고프다는 사실입니다. 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다른 동물을 잡아 먹어야 합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부끄러움(hiri)과 창피함(ottappa)을 모릅니다. 부모와 새끼간에 근친교배가 이루어지는 것도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양심과 수치심이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만일 인간에게 양심과 수치심이 결여 된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오로지 식욕과 성욕으로 살아 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들고기의 경(S12.63)’에서 음식절제를 이야기했고, ‘어머니와 아들의 경(A5.55)’에서는 감각적 욕망의 거센흐름에 대하여 경계했습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이 세계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같다고 했습니다. 테라가타에서 강가띠리야존자는 운명의 장난으로 인하여 어머니를 아내로 하여 살았지만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알아서 두 해 동안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움막에서 홀로 살았습니다. 어머니 역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알았기 때문에 운명의 장난에 굴하지 않고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기구한 운명을 가진 두 사람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재난을 알아서 욕계를 떠난 것입니다.
식욕과 성욕에 매여 있는 한 욕망의 세계를 영원히 떠날 수 없습니다. 늘 허기져서 먹을 것을 찾아 헤메이는 축생들은 본능적으로 짝짓기를 하여 새끼를 낳습니다. 그 새끼 역시 본능적으로 먹을 것을 찾아 헤메이며 짝짓기를 하여 또 새끼를 낳습니다. 이렇게 새끼 쳐서 종이나 종족이 유지 됩니다. 그러나 감각적 욕망의 재난을 아는 현자들은 식욕과 성욕에서 벗어납니다. 식욕보다 성욕보다 더 즐거운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욕망을 여읜 세계입니다.
Sattisūlūpamā kāmā
khandhāsaṃ adhikuṭṭanā,
Yaṃ tvaṃ kāmaratiṃ
brūsi aratīdāni sā mama.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창칼과 같고,
존재의 다발은 그 형틀과 같다.
그대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라 부르는 것,
이제 나에게는 불쾌한 것이다.”(Thig.234)
2017-05-0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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