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줄 알면
대우받으려거든 대우받는 행위를
아침 일찍 출근합니다. 일인사업자에게 있어서 늦게 가도 그만이지만 이른 아침 부리나케 사무실로 달려 가는 것은 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월이 벌써 십년 째 입니다. 수도권 도시에 작은 사무실이 하나 있습니다. 2007년 11월에 입주했으니 임대로 들어 앉은지 십년 되었습니다. 한자리에서만 십년 보낸 것입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합니다. 그 동안 주변의 스카이라인은 많이 변했습니다. 헌집을 허물고 새로운 집이 속속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인구변동은 거의 없습니다. 복도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작은 사무실이 도열해 있습니다. 지난 십년동안 수 없이 주변 사무실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어느 곳은 육개월이 멀다 하고 바뀌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터줏대감이 되었습니다.
이른 아침 출근하면 늘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청소하는 아줌마입니다. 아니 청소하는 할머니라 해야 할 것입니다. 대개 나이가 든 할머니가 청소합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십년동안 청소하는 사람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청소하는 사람은 인사성이 매우 밝다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 가장 먼저 마주치기 때문일까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말합니다. 이에 똑같이 응대합니다.
직업에 귀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청소하는 자나 고위직에 있는 자나 일하는 데 있어서는 신성한 것입니다. 청소하는 자라 하여 하대하고 고위직에 있는 자라 하요 우대한다면 불공평한 것입니다. 만일 고위직에 있는 자가 낮은 지위에 있는 자에게 하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대우 받지 못할 것입니다. 낮은 지위에 있는 자가 공손하게 인사할 때 대우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하는 말은 “대우받으려거든 대우받는 행위를 하라”가 될 것입니다.
“내가 누군데 감히”
유명하다고 하여 다 훌륭한 사람은 아닙니다.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해서 장로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반짝인다고 하여 모두 금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다 하여 인격도 다 갖추어진 것은 아닙니다. 비록 낮은 지위에 있는 자라도 세상의 이치를 알아 행위를 한다면 훌륭한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청소하는 사람이 이른 아침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인사 했을 때 현명한 사람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거나 나이를 많이 먹은 자들은 좀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대개 고개가 뻣뻣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런 특징은 많이 배운 자에게도, 많이 가진 자에게도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내가 누군데”라는 아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내가 누군데 감히”라는 교만입니다.
아만, 교만, 자만, 모두 같은 말입니다. 모두 자아관념에 따른 아상이 있음을 말합니다. 금강경에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 하여 사상으로 구분하지만 수 많은 상이 없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님에게는 ‘스님상’이 있을 것이고, 학자에게는 ‘학자상’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권위에 대하여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mana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이런 자만은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라한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불이 꺼진 자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탐진치의 소멸은 단계적으로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열반입니다. 열반을 여러가지로 설명하지만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무위상윳따(S43)’에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무위상윳따에서 공통적으로 들어 가는 정형가 있습니다. 무위를 예로 든다면 “수행승들이여, 무위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무위라고 한다.”(S43.1)라 되어 있습니다.
탐, 진, 치의 소멸은 무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반을 표현하는 무위, 무루, 불로, 불사 등 부정적 언표와 진리, 피안, 극묘 등 긍정적 언표에 공통적으로 탐, 진, 치 소멸에 대한 정형구가 들어갑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열반이긴 하지만 그 과정은 탐, 진, 치의 소멸입니다. 설령 궁극의 경지를 맛보았다고 할지라도 단번에 탐, 진, 치가 소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본 것에 대하여 견도(見道)라 한다면 이후에는 수행도(修行道)가 되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무학도(無學道)에 이릅니다. 깨달음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탐, 진, 치의 소멸도 역시 단계적으로 성취됩니다.
무지한 자가 무지한 것을 알면
탐, 진, 치를 삼독이라 합니다. 그런데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소멸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를 무명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Yo bālo maññati bālyaṃ,
paṇḍito vā pi tena so,
Bālo ca paṇḍitamānī
sa ve bālo ti vuccati.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운다.”(Dhp63)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현명한 자라 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줄 모르면 여전히 어리석은 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어리석은 자가 ‘나는 어리석은 자이다.’라고 아는 것은 무지한 자가 자신이 무지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아주 무지한 자는 자신이 무지한 것조차 알지 못한다.” (DhpA.II.30)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인식론적 무지에 대하여
무명은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인식론적 무지라고도 합니다. 이런 인식론적 무지에 대하여 담마빨라는 우다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설명 했습니다.
1) 발견되어서는 안 될 신체적 악행 등이 발견되므로 무명이고,
2) 발견되어야 할 신체적 선행 등은 발견되지 않으므로 무명이다.
3) 사물의 전도되지 않은 본성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무명이고,
4) 끊임 없는 윤회속에서 존재 등에 뛰어 들기 때문에 무명이고,
5)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 속으로 뛰어 들기 때문에 무명이고,
6)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 속으로 뛰어 들기 때문에 무명이고,
7) 앎의 반대이기 때문에 무명이다. (UdA.41)
무명은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일곱번째를 보면 무명에 대하여 “앎의 반대이기 때문에 무명이다.”라 했습니다. 모르는 것이 무명임을 알 수 있습합니다. 불교에서 무명은 다름 아닌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것입니다. 특히 사성제에 대한 무지를 말합니다.
여기 어리석은 자가 있는데
여기 어리석은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는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는 행위는 모두 바르기 때문에 ‘내 뜻대로’ 따라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마구 화를 냅니다.
내 뜻대로 라는 것은 이미 탐욕이 내재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화를 낸다면 성냄에 지배받은 것입니다. 나의 몸과 마음도 내 뜻대로 할 수 없음에도 타인을 내 뜻대로 하겠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발상입니다. 그럼에도 모두 다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세간에서 앎이라는 것은 매우 작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쥐꼬리만한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어리석은 자에게 지식이 생겨난다. 오직 그의 불익을 위해서.”(Dhp.72)라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있어서 앎이라는 것은 아주 하챃고 작은 것입니다. 그 앎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세속적 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속적 지식은 기술이나 권위나 명예나 명성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런 지식을 가진 자가 “내가 누군데” 또는 “내가 누군데 감히”라 합니다. 일종의 자만입니다. 흔히 말하는 가진 자의 자만, 배운 자의 자만, 태생의 자만 같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어리석은 자의 자만입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앎이 생겨나면
어리석은 자에게 앎이 생겨 나는 것은 결국 불행으로 이끌고 맙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기술이나 권위, 권력이 생겨 났을 때 불행으로 끝나게 될 가능성이 높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그것이 그 어리석은 자의 행운을 부수고 그의 머리를 떨어 뜨린다.”(Dhp.72)라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지식은 파괴적으로 작용합니다. 어리석은 자의 앎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운명을 파괴하는 것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에게 지식이나 권위 또는 권력이 생겨난다는 것은 망하는 길로 가게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도 권력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물론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앎이나 지식, 기술이 잘못 활용되면 엄청난 재앙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정권을 잡았을 때 분노하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있어서 앎이라는 것은 재앙입니다.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
어리석은 자에게 지식이 생겨나면 불행해질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일까 선불교에서는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무상사 폴란드 출신 오진법사는 ‘모를 뿐’이라는 말은 그리스 철학자들도 사용하던 말이라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너는 누구냐?(who are you?)”라고 자주 말했다고 합니다. 이에 짓꿋은 제자가 스승에게 당돌하게도 “당신은 누구입니까?(who are you?)”라고 역질문 했다고 합니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누군지 모릅니다.(I don’t know)”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대하여 여러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선불교에서는 ‘오직 모를 뿐’과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제자의 돌발적인 질문에 “그러나 나는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것이 법구경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Dhp.63) 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몰라몰라?
선불교에서 ‘오직 모를 뿐’이라 한 것은 그다지 아는 것이 없음을 말합니다. 이럴 때 차라리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그래서일까 어느 단체에서는 “몰라몰라”라 합니다. 오직 모를 뿐의 새로운 버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몰라몰라 라며 주문 외듯이 말하면 선정삼매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멍때리기’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모른다는 것은 다름 아닌 사성제에 대한 무지를 말합니다.
불교에서 무지는 무명과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무명은 사성제에 대한 무지를 말합니다.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S12.2)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라고 명확하게 정의 하셨습니다.
선불교에서는‘오직 모를 뿐’이라거나 또 어떤 단체에서는 ‘몰라몰라’라 합니다. 일종의 수행의 방편이라 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모른다는 것은 사성제에 대하여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사성제에 대하여 모르는 자가 어리석은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줄 알면
자신이 모른 다는 것을 알면 더 이상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합니다.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안다면 더 이상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리석은 자가 자신은 현명한 자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린다.”라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어리석은 줄 모릅니다. 작은 지식이나 앎을 가지고 자신이 현명한 자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명한 자는 자신이 어리석은 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이미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아는 자는 그 때문에 현명한 자이거나 그와 같은 자이다. ‘나는 어리석다.’라고 아는 자는 다른 현명한 자를 찾아 가서 그와 사귀면서 가르침을 받고 충고를 받아 현명한 자가 된다.”(DhpA.II.30)라 했습니다.
무지한 자들은 자신이 무지한 것 조차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현명한 자를 찾아 가서 배운다면 향상과 성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줄 알면 더 이상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줄 아는 그 순간 현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리운다.”(Dhp63)
2017-09-20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기된 식의 총량이 윤회한다? 논장을 배격한 테라와다빅쿠 (0) | 2017.09.28 |
---|---|
생이지(生而知)는 윤회의 증거,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 (0) | 2017.09.21 |
누구나 불교감별사가 될 수 있다 (0) | 2017.09.19 |
공덕 지을 기회를 포착하는 자 (0) | 2017.09.18 |
“나의 마음이여, 그대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으리”통제불능 마음 길들이기 (0) | 2017.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