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이지(生而知)는 윤회의 증거,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
기억나지 않는 전생
최악의 질병이 치매라 합니다. 치매가 진행되면 기억을 차츰 잊어 버립니다. 대개 가까운 기억부터 잊어 버립니다. 아침에 세수를 하는데 머리를 감았는지 잊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일종의 기억상실일 것입니다. 종종 깜박깜박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난다면 치매가 아니라고 합니다. 치매가 진행되면 될 수록 가까운 기억부터 상실되기 시작하여 먼기억까지 잊게 됩니다. 나중에는 자식의 얼굴도 못 알아 보게 됩니다. 오로지 동물적 본능이라 볼 수 있는 식욕만 남아 생명을 유지해 갈 뿐입니다.
갓난아기는 거의 백지상태나 다름 없습니다. 자아의식이 생기기 전이기 때문에 제로베이스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자아의식이 생겨나면 비로소 기억하게 되고 학습에 따라 말을 배우고 글을 배워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성장해 갑니다. 치매에 걸려 가까운 기억부터 잊기 시작하여 먼 기억까지 잊게 되었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와 같은 상태가 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내세와 윤회를 믿습니다. 그렇다고 죽어서 살아 온 사람이 없기에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내세와 윤회는 합리적 추론으로 입증가능합니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은 내세와 윤회를 부정합니다. 설령 윤회가 참이라고 하더라도 갓난아기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전생에 대하여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내세나 윤회는 무의미할 것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현생에서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또 수행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하고 더구나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설령 내세가 시작 된다고 해도, 갓 태어난 아기가 이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한 내세와 윤회는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됩니다. 갓난아기기억론은 일종의 단멸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
나는 누구일까?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면서부터 최대의문입니다. 그러나 답이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M2)’에서는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이라 했습니다. 답이 없는 것에 의문을 하면 번뇌만 야기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등으로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일으키면 여섯 가지 견해가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자아가 있다.’라든가, ‘나의 자아는 없다.’등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을 말씀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등에 정신활동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지금 당면한 과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괴로움에 대해 마음 기울이라고 했습니다. 발등의 불을 먼저 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성제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괴로움이다.’등 네 가지 진리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라는 것입니다.
답이 없는 주제로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번뇌만 늘어날 뿐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며 의심해 보았자 답이 없습니다. 이런 의심은 세 가지 결박중의 하나입니다. 즉 개체가 있다는 견해, 의심, 규범과 금계에 대한 의심입니다. 그런데 연기법적 사유로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이 세 가지 결박을 끊어 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라 했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함으로 인해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연하게 떠오른 이전생의 기억
‘나는 누구인가?’라며 의문해 보지만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번뇌만 야기할 뿐입니다. 그러나 연기법적으로 사유하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조건발생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주가 있어서 창조한 피조물도 아니고, 원인 없이 우연히 발생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모든 원인과 모든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결과로서 존재한 것이 나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내세와 윤회는 당연히 있는 것이 됩니다. 이전생의 기억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가르침들, 즉 경-응송-수기-게송-감흥어-여시어-전생담-미증유법-교리문답을 배운다. 그는 이러한 가르침을 귀로 듣고, 발음을 따라 익히고, 정신으로 성찰하고, 견해로 꿰뚫는다. 그는 새김을 놓아버리고 죽어서 어떤 신들의 무리에 태어난다. 거기서 행복하게 사는 그에게 가르침의 구절이 우연히 떠오른다. 수행승들이여, 그의 새김은 느리게 일어나지만, 그 뭇삶은 빠르게 최상의 승묘에 이른다.”(A4.191)
앙굿따라니까야 ‘귀로 들음의 경(A4.191)’에 실려 있는 가르침입니다. 경에 따르면 수행승은 죽어서 천상에 태어났습니다. 천상에 화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천상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르침의 한 구절이 떠 올랐습니다. 문득 떠 오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거기서 행복하게 사는 그에게 가르침의 구절이 우연히 떠오른다. (tassa tattha sukhino dhammapadāpilapanti)”라 했습니다. 일종의 전생에 대한 기억이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전생에 배웠던 것들과 외워서 체화된 부처님의 가르침들이 맑은 거울에 영상이 비치듯 나타난다.”(Mrp.III.170)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생이지(生而知)는 윤회의 증거
현생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한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실려 있는 열 가지, 즉 경-응송-수기-게송-감흥어-여시어-전생담-미증유법-교리문답을 배우고 익히고 외우면 그 공덕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생에서 문득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석에서는 마치 거울에 영상이 비추듯이 선명하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설령 윤회가 참이라 하더라도 갓난아기는 이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윤회무용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윤회무용론자에 따르면 이번 생에 공부할 필요도 없고 수행할 필요도 없습니다. 갓난아기로 태어나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윤회무용론을 뒤집는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비록 천상에 화생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에게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그것은 이전생에 닦았던 것들이 계속 유지됨을 말합니다.
전생에 배우고 학습하고 수행했던 것들은 다음 생에도 이어집니다. 이를 생이지(生而知)라 할 수 있습니다. 생이지를 연상케 하는 게송이 상윳따니까야 ‘매듭의 경(S1.23)’에 있습니다. 하늘사람은 세상사람들이 안과 밖으로 묶여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어떻게 풀지 부처님에게 물어 봅니다. 이에 부처님은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S1.23)라 했습니다. 이 짧은 게송 한구절이 생이지를 설명합니다. 지혜를 갖춘 자, 즉 태어날 때 부터 지혜를 갖춘 자가 수행도 할 수 있고 선정에 들 수 있음을 말합니다.
업(業)이 작용하는 원리대로
생이지는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알게 되는 지혜를 말합니다. 생이지야말로 전생이 있고 윤회가 있다는 명백한 증거일 것입니다. 사람 생긴 모습이 각자 다르고 성향 또한 모두 다르듯이, 타고난 능력 또한 모두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지능이 높게 태어났는가 하면 또 어떤 자는 둔하게 태어났습니다. 이에 대하여 업(業) 이외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지은 업대로 세상에 태어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업이 작용하는 원리대로’ 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부처님은 오계를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원리를 갖추면 그 원리가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 (A5.145)라고 말씀했습니다. 업의 원리가 작용하는대로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남을 말합니다.
현생에서 나의 모습은 분명히 이전생의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에서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 하여 업자성정견을 말씀했습니다.
불탐(不貪), 부진(不瞋), 불치(不痴)를 원인으로
생이지는 타고난 지혜를 말합니다. 이는 전생에 지혜수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재생연결을 통해 업에서 생긴 지혜”라 했습니다. 여기서 세 가지 원인은 불탐(不貪), 부진(不瞋), 불치(不痴)를 말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소멸하는 수행을 한 자는 다음 생에 인간 이상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만일 두 가지 원인, 즉 불탐과 부진을 원인으로 태어난다면 지혜수행을 할 수 없을 것이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도 낮은 지위가 될 것이라 합니다. 지혜를 닦지 않았기 때문에 선정수행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세 가지 원인, 즉 불탐, 부진, 불치를 원인을 조건으로 태어나야 이번 생에서 수행도 할 수 있고 선정에 들 수 있을 것이라 합니다. 이는 다름아닌 생이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번 생에 배우고 익히고 외우고 수행하는 것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님을 말합니다.
임종순간에 사띠(sati)를
이번 생에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소멸하는 수행을 하면 다음생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그는 새김을 놓아 버리고 (muṭṭhassati)”(A4.19)라는 말이 나옵니다. 주석에서는 “범부는 죽을 때 새김을 잃어 버린다는 뜻이지, 새김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Mrp.III.170)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늘 사띠를 유지하고 있으면 임종순간에 재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와선할 때 호흡을 관찰하라고 합니다. 잠드는 순간도 사띠하고 잠에서 깨어나서 사띠 하는 연습입니다. 이렇게 사띠 했을 때 재생되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죽는 순간 사띠를 놓쳤을 때 그 즉시 어떤 존재로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대게 범부에 해당됩니다. 아라한이라면 죽는 순간에도 사띠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법문을 듣다가
임종순간에 사띠를 놓쳐서 천상에 재생한 자는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이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설령 자신이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간 자일지라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연히 자신의 전생을 알게 됩니다. 경에서는 “그에게 가르침이 우연히 떠오른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전생의 가르침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는 새김을 놓아버리고 죽어서 어떤 신들의 무리에 태어난다. 그는 거기서 행복하게 사는데 가르침의 구절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신통을 지니고 마음의 자재를 얻은 수행승이 신들의 모임에서 가르침을 설한다. 그러면 그에게 이와 같이 ‘이것이 내가 전생에 청정한 삶을 살 때의 가르침과 계율이다.’라는 생각이 떠오른다.”(A4.191)
전생에서 배웠던 것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경우 들어서 떠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 가르침에 대하여 설하는 것을 들었을 때 가르침이 떠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북소리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북소리에 밝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전생에서도 북을 만졌을 것입니다. 북소리에 밝은 사람이 북소리를 들으면 반응할 것입니다. 북소리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전생에서 가르침을 학습했던 자는 가르침을 들었을 때 가르침을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그것도 거울속의 영상처럼 기억해 낸다고 했습니다. 학이지(學而知)가 생이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여행하다가 우연히
천상에 태어났는데 이전생의 가르침도 기억나지 않고 가르침을 전달하는 자도 없을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어떻게 이전생의 가르침을 기억해 내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소라고동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소라고동소리에 밝은 사람이 있는데, 그가 길을 여행하다가 소라고동소리를 들으면 소라고동소리인지 소라고동소리가 아닌지에 대하여 의심이나 혼란이 없이 소라고동소리를 정확히 판단할 것이다.” (A4.191)
초기경전에서 소라고동소리는 자애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상윳따니까야 ‘소라고동소리의 경’에 따르면 “촌장이여, 예를 들어 강력한 소라고동이 적은 노력으로도 사방으로 들리는 것처럼,”(S42.8)라 되어 있습니다. 자애의 마음을 반복해서 닦은 자는 유한한 업의 세계, 즉 욕계의 세계에서 떠나 미세한 물질의 세계, 즉 색계 세계에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흔히 눈밝은 자가 있다고 합니다.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파악함을 말합니다. 동굴에 벽화를 그리던 자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을 때 다음 생에도 벽화를 그릴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벽화가 있는 동굴에 순례를 간 자가 벽화를 보고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전생과 마찬가지로 다시 붓을 들게 될 것입니다. 경에서는 ‘소리에 밝은 사람’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전생에 판소리 했다면 판소리 가락에 매료 되어 판소리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이전에 했던 것에 눈이 밝거나 귀가 밝은 케이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라고동소리에 밝은 자는 길을 여행하다 소라고동소리를 듣고 자신이 전생에서 가르침을 기억해 냅니다. 그래서 “이것이 내가 전생에 청정한 삶을 살 때에 가르침과 계율이다.”(A4.191)라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생과 똑같이 가르침들, 즉 경, 응송 등 구분교의 가르침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신통으로 전생을 일깨워 주었을 때
마지막으로 전생을 기억해 낼 수 있는 방법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천상에 태어난 존재는 행복하게 살지만 전생에 배웠던 가르침에 대한 구절도 떠오르지 않고, 누군가 가르침을 말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럴 때 먼저 화생한 자가 그에게 “우리는 전생에 청정한 삶을 살았는데, 벗이여, 그대는 기억하는가?”(A4.191)라며 기억을 되살려 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흙장난 예를 들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에 함께 흙장난을 놀던 친구가 언젠가 어느 곳에서 서로 만나면,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이보게, 이것을 기억하는가? 이보게, 이것을 기억하는가?’라고 말하면, 다른 친구는 ‘이보게, 기억하다뿐인가. 이보게, 기억하다뿐인가.’라고 말할 것이다.” (A4.191)
누구나 어렸을 적 기억이 있습니다. 어렸을 적 기억이나 학창시절 기억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치매환자가 최근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렸을 적 일은 잘 기억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래 전의 일은 마치 눈앞에 벌어진 사건처럼 생생하게 떠 오릅니다. 전생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일 전생을 기억하는 자가 있다면 정상적인 삶을 살기가 힘들 것입니다. 좋았던 일 보다 좋지 않았던 일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통을 가진 자들은 전생을 기억합니다. 부처님은 전생의 기억을 잊어 버리고 사는 바까 브라흐마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하느님 바까의 경’에 따르면 하는님(Brahma) 바까는 영원주의자를 대표하는 자입니다. 고작 일겁을 사는 첫 번째 선정의 경지에 태어났지만 너무 오래 산다고 느껴서야일까 영원히 사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이것만이 항상하고, 이것만이 견고하고, 이것만이 완전하고, 이것만이 불변의 진리이다.”(S6.4)라는 삿된 견해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견해는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의 경(D1)’에서 표현 된 것처럼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라는 영원주의 견해입니다.
하는님 바까는 너무 오래 살아서인지 자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착각했습니다. 윤회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린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하느님 바까에게 “그대는 갈증에 신음하고 더위에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물을 주었네. 그것이 그대의 옛 계행과 덕행이라고 잠에서 깨어난 나는 기억하네.”(S6.4)라며 전생의 기억을 되살려 줍니다. 그러자 하느님 바까는 비로소 전생의 일을 기억해 내며 “틀림없이 그대는 나의 생애를 바로 알고 있고”라며 자신이 윤회하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신통으로 전생을 일깨워 주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다음 생에도 수행자로
흔히 하는 말중에 필(feel)이 꼽힌다고 합니다. 또 첫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예사롭지 않은 인연이라 봅니다. 순례여행 하는 자가 동굴에서 벽화를 보고 갑자기 눈이 밝아져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절집에 갔더니 안온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누군가 말을 들었는데 한마디에 감명 받아 인생이 180도 바뀌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인하여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을 때 우연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귀로 들림의 경(A4.191)’에 따르면 전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전생에서 닦았던 것들이 떠 오르게 되어 이 생에서도 계속 그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상윳따니까야 ‘소라고동소리의 경’에 따르면 “누구라도 반복해서 많이 하면 할수록 그만큼 그 때문에 운명이 이끌려진다.”(S42.8)라는 말이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짓는 업은 다음생에 태어나는 조건이 됩니다.
습관적으로 살생하는 자는 업의 원리대로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날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보시하고 지계하는 자는 천상에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생에서 불탐, 부진, 불치의 수행을 한자는 그 과보로 생이지를 얻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생에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소멸시키는 수행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학이지는 다음생의 생이지가 됩니다. 이번 생에 수행자의 삶을 산 자에게는 다음 생에도 수행자로 삶을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2017-09-2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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