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Vs 어떻게 살 것인가?
고교동창 카페에 들어가면 나이 든 친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청소년시절의 앳된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머리가 허옅게 센 나이 든 자들만 보입니다. 이름은 기억하지만 얼굴이 매칭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그 때 그 시절의 눈매 등 모습이 남아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전혀 딴 사람의 얼굴입니다. 대체 청소년기의 사람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청소년기의 나와 현재의 나는 같은 나입니다. 그러나 얼굴을 보면 더 이상 같은 나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나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런 나는 누구일까요?
이것(iti)이 있는데
나는 누구일까? 누구나 한번쯤 고민 해 보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나가 누구인지 고민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나를 찾는 여행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무리 나를 찾으려고 해도 나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수행녀 바지라는 이렇게 게송으로 노래 했습니다.
Yathā hi aṅgasambhārā
hoti saddo rato iti,
Evaṃ khandhesu santesu
hoti sattoti sammuti.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S5.10)
게송에서 수레는 ‘iti’를 말합니다. 빠알리어 ‘iti’는 ‘이것’을 뜻하는데 수레라 번역되어 있습니다. 수레는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말입니다. 수레는 여러 가지 부속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자동차 역시 수 만가지 부속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통용되는 명칭은 수레 또는 자동차라 합니다. 게송에서는 ‘이것(iti)’이라 했습니다.
누군가 ‘이것’이라 했을 때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릅니다.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이것 주세요’라 했을 때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수레라는 명칭이 부여되기 전에는 이것이라 했을 것입니다. 자동차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아이는 “이게 뭐야?’라고 물어 볼 것입니다. 이것은 이름 붙이기 나름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람이 있어서 사람이라 이름 붙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 사람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사람이라는 명칭이 생겨 났습니다. 중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라 했습니다. 여기서 뭇삶은 빠알리어 satta를 뜻하는데 한역으로는 중생이라 합니다. 이것 대신에 중생이니, 뭇삶이니, 사람이니 하는 명칭 등이 부여된 것입니다.
나는 누구일까?
사람들은 자세히 모르면 이것 저것을 말합니다. 가까이 있으면 이것이고 멀리 있으면 저것이 됩니다. 이것 또는 저것은 지시대명사에 불과합니다. 사람을 뜻하는 삿따는 오온에 결합된 것이라 했습니다. 색, 수, 상, 행, 식 오온이 합쳐진 것을 ‘이것’이라 하지 않고 사람, 삿따, 중생 등으로 표현합니다. 나라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릅니다. 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는 누구일까? 최대의 미스터리입니다. 지금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고 나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느낀 감정에 대하여 나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지각하고 있다면 그것을 나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오온을 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온을 나라고 했을 때 몸도 나이고, 느낌도 나이고, 지각도 나이고, 형성도 나이고, 의식도 나입니다.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나꿀라삐따의 경’에서는 네 가지로 표현합니다. 물질에 대한 것을 보면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며,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S22.1)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는 물질을 나(자아)로 여기는 것입니다.
내세울 것이 몸 밖에 없는 자는 몸이 바로 나입니다. 몸짱이라면 몸을 나와 동일시 하는 것입니다. 얼짱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래서 몸을 나로 여기고, 몸 가진 것을 나로 여기고, 나 가운데 몸이 있다고 보고, 몸 가운데 내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네 가지는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에 총 20가지가 됩니다. 이를 20가지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이라 합니다.
나(我)라는 거짓이름이 있는데
상윳따니까야 ‘바지라의 경’에 따르면, 수행녀 바지라는 수레의 비유를 들어 뭇삶(satta)에 대하여 오온이 집적된 것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라 부르는 것 대신 삿따(satta)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런데 삿따에 대하여 “그것은 단순한 형성의 집적이니 거기서 뭇삶을 찾지 못하네. (Suddhasaṅkhārapuñjoyaṃ nayidha sattūpalabbhati)”(S5.10)라 했습니다. 뭇삶(satta)에 대하여 단지 형성이 집적된 것이라 합니다. 따라서 삿따라는 말에서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뭇삶 또는 중생이라고 번역된 빠알리어 삿따(satta)라는 말은 통용되는 명칭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 (hoti sattoti sammuti)” (S5.10)라 했습니다. 뭇삶 또는 중생, 사람 등으로 불리우는 명칭에 대하여 ‘거짓이름’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거짓이름이란 빠알리어 ‘sammuti’를 번역한 것입니다. 빠알리어 ‘sammuti’는 ‘general opinion’의 뜻으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을 말합니다. 초기불전연구원 각묵스님은 ‘sammuti’에 대하여 ‘인습적 표현’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나라고 부르는 명칭 또한 거짓이름이며 인습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 또는 저것이라 부를 수 없어서 하나의 명칭을 부여한 것이 나입니다. 마치 ‘이것이 수레이다’라거나, ‘이것이 자동차이다’라고 명칭을 부여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단지 명칭에 부여된 것에 지나지 않는 ‘나’에 대하여 찾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소나타’라는 자동차 이름을 찾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我)에 대한 15가지 의문
소나타라는 자동차는 단지 부여된 명칭이 불과합니다. 소나타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으로만 존재합니다. 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온이 집적된 나에 대하여 ‘나는 누구인가?’라며 나를 찾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평생 찾아도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를 찾습니다.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에 따르면 나를 찾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ahosiṃ nu kho ahaṃ atītamaddhānaṃ.
Na nu kho ahosiṃ atītamaddhānaṃ.
Kinnu kho ahosiṃ atītamaddhānaṃ.
Kathannu kho ahosiṃ atītamaddhānaṃ.
Kiṃ hutvā kiṃ ahosiṃ nu kho ahaṃ atītamaddhānaṃ.
Bhavissāmi nu kho ahaṃ anāgatamaddhānaṃ.
Na 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ṃ.
Kin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ṃ.
Kathan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ṃ.
Kiṃ hutvā kiṃ bhavissāmi nu kho ahaṃ anāgatamaddhānanti.
Etarahi vā paccuppannaṃ addhānaṃ ajjhattaṃ kathaṃkathī hoti:
ahaṃ nu kho'smi
no nu kho'smi kinnu kho'smi
kathaṃ nu kho'smi
ayaṃ nu kho
satto kuto āgato so kuhiṃ gāmī bhavissatī'ti.
1)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2)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3)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4)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5)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6) 나는 미래세에 있을까?
7) 나는 미래세에 없을까?
8)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9) 나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10)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
또는 현세에 이것에 대해 의심한다.
11) 나는 있는가?
12) 나는 없는가?
13) 나는 무엇인가?
14) 나는 어떻게 있는가?
15)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M2)
모두 15가지에 대하여 의문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은 나(我)입니다. 그런데 나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수레나 자동차, 사람처럼 이름 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나에 대하여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고 의문합니다. 과연 답이 있을까요?
누군가 ‘나는 누구인가?’라며 나를 찾는 여행을 해 보지만 나를 찾을 수 없습니다. 나를 찾아 평생 다녀 보지만 결코 나를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실체는 없고 이름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ayonisomanasikāra)”이라 했습니다.
10가지 사변적 견해가 있는데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번뇌가 생겨납니다. 자아가 있다거나 자아가 없다는 등 15개 항목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은 형이상학적 견해도 해당됩니다.
맛지마니까야 ‘말룽끼야뿟따의 경’에 따르면 “1)세상은 영원하다든가, 2)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든가, 3)세상은 유한하다든가, 4)세상은 유한하지 않다든가, 5)영혼은 육체와 같다든가, 6)영혼은 육체와 다르다든가, 7)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든가, 8)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9)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든가, 10)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든가,”(M63)라는 사변적 견해가 이에 해당됩니다.
부처님은 ‘나는 누구인가’ 등의 15가지 의문과 ‘세상은 영원한가’ 등의 10가지 사변적 견해에 대하여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질문은 다름 아닌 세속철학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철학 로까야따(lokāyata)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에 ‘세속철학의 경(S12.48)’이 있습니다. 세속철학을 신봉하는 바라문이 “모든 것은 존재합니까?”라며 물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첫 번째로 세속철학입니다.”(S12.48)이라 하여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답을 듣지 못한 바라문은 이번에는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까?”라며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 번째로 세속철학입니다.”(S12.48)라며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질문 “모든 것은 하나입니까?”에도, 네 번째 질문 “모든 것은 다양합니까?”에도 세속철학이라 하여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속철학이라는 말은 로까야띠까(lokāyatika)를 번역한 말입니다. 빠알리어 로까야따(lokāyata)는 한역으로 ‘순세파(順世派)’라 합니다. 순세(lokāyata)라는 말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주론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로까야띠까(lokāyatika)에 대하여 ‘세상이치에 능통한 자’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로까야따라는 말은 “세상을 논의의 토대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위대하고 심오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보잘 것 없는 삿된 견해일 뿐이다.”(SA.ii.76)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영원하다’등 10가지 사변적 견해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로까야따(順世派)의 견해입니다. 이와 같은 10가지 사변적 견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속철학은 논의의 대상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세속철학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로까야따(세상이치)라 불리는 것은 [이 이론을 따르면] 세상은 미래의 이로움을 위해서 노력도 하지 않게 되고 향상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이론에 대한 믿음 때문에 중생들은 공덕을 지을 마음조차 내지 못하기에 노력은 까마득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SAT.ii.76)라 했습니다.
복주석에 따르면 로까야따는 유물론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유물론은 허무주의적 견해를 말합니다. 몸이 무너지면 정신도 무너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견해입니다. 이런 견해를 가졌을 때 보시공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또한 청정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답을 하지 않은 이유는?
‘세상은 영원하다’ 등의 사변적 견해를 가졌을 때 허무주의 아니면 영원주의적 견해를 가질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10가지 사변적 견해에 대하여 답을 하지 않았고 그대신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되는 연기법을 설했습니다. 세속철학인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모두 연기법으로 논파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질문같지 않은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며 15가지 의문에 대하여는 번뇌만 야기할 뿐이라 하여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은 영원한가?’등의 10가지 사변적 견해에 대해서는 유물론 등 세속철학으로 간주하고 역시 답을 하지 않고 연기법을 설했습니다. 또 부처님은 “모든 것은 존재합니까?”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도 역시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바라문이여, 이 양극단을 떠나서 여래는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S12.48)라 하시고 십이연기를 설했습니다.
질문이 잘못 되었을 때
어느 수행승이 “세존이시여, 존재가 무엇이고, 존재하는 자는 누구입니까?”(S12.35)라며 물었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은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에서 볼 수 있는 ‘나는 누구인가?’라며 15가지에 대하여 의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질문에 부처님은 “그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S12.35)라 했습니다. 질문이 잘못 되었음을 말합니다. 왜 질문이 잘못된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합니다.
“그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수행승이여, ‘존재가 무엇이고, 존재하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하거나 수행승이여, ‘존재와 존재하는 자가 서로 다르다.’고 한다면, 그 양자는 같은 것이며 표현만 다른 것이다.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라는 견해가 있다면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다도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여래는 이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난다.”(S12.35)
‘나는 누구인가?’등의 15가지 의문과 ‘세상은 영원한가?’ 등의 10가지 사변적 견해는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의로 귀결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십이연기를 설합니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라는 견해는 죽음과 함께 영혼도 단멸한다는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이는 극단입니다.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지면 굳이 청정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팔정도를 닦을 필요도 없습니다. 허무주의자들은 고귀한 길(팔정도)를 통하지 않고서도 윤회를 끝낼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극단은 연기법에 따르면 있을 수 없습니다. 연기의 생성이 관찰 되기 때문입니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라는 견해는 신체만이 파괴되고 영혼은 새가 새장에서 날아 가는 것 같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는 영원주의적 견해입니다. 만약 영혼이 있다면 굳이 팔정도를 닦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견고하고 영원한 영혼이 있다면 고귀한 길(팔정도)를 통하지 않고서도 윤회를 끝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극단 연기법에 따르면 있을 수 없습니다. 연기의 소멸이 관찰되기 때문입니다.
연기의 법칙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나는 누구인가?’ ‘세상은 영원한가?’ 등의 견해는 세속철학이고 사변적 견해입니다. 백인백색이어서 결코 답을 만족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무기하거나 답을 하지 않은 것은 질문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대신 부처님은 “이 양극단을 떠나서 여래는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라 하여 십이연기를 설합니다. 십이연기가 답입니다. 그런데 십이연기는 세속에서 말하는 철학이 모두 논파된다는 사실입니다.
연기의 생성과 소멸을 관찰하면 ‘나는 누구인가?’등의 15가지 의문을 가지지 않습니다. 연기법을 알면 ‘세상은 영원한가?’등의 사변적 견해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의문하는 것 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며 연기법적으로 사유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연기의 법칙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킨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S12.61)
2017-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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