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애를 동반자로 했을 때
어제는 하늘은 높고 흰구름이 하늘 높이 새털처럼 떠 있는 청명한 날씨였습니다. 하루밤 지나고 나니 하늘은 잔뜩 흐려져 있습니다. 아무리 청명한 날씨라도 사흘을 못간다고 하는데 하늘의 구름만큼이나 변화무쌍한 것이 날씨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 이겠지요.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하루에도 수 없이 마음이 변합니다. 좋아했다 싫어했다 기뻐했다 슬퍼했다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고 하고,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 밖에 없다고 합니다. 매순간 마음이 변하는 것은 대상을 받아 들임에 따라 일어납니다. 눈으로, 귀로, 코로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대상을 받아 들일 뿐만 아니라 생각이 치고 들어 왔을 때 마음의 문을 통해서도 대상을 접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대상을 받아 들였을 때, 즉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이 만났을 때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마음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세상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시각을 예로 든다면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35.107)라 했습니다.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이 만났을 때 입니다.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마음이 생겨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만약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상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감각기관이 대상과 접촉이 없다면 세상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이 생겨나는 것은 결국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이 생겨나면 괴로움도
마음이 없으면 세상도 없습니다. 인식하지 못하면 세상도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완전한 열반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대상과 접촉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눈이 있어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고, 귀가 있어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좋고 싫음이 일어납니다. 좋아서 즐거운 느낌이라면 거머 쥐려 하고, 싫어서 괴로운 느낌이라면 밀쳐 내려 할 것입니다.
거머 쥐려 하는 것은 탐욕이고 밀쳐 내려 하는 것은 분노입니다.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만 있기 때문에 탐욕과 분노가 양립할 수 없습니다. 매순간 대상을 접함에 따라 탐욕과 분노로 살아가는 것이 어리석은 일반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생겨나면 괴로움도 동시에 생겨납니다.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이것이 괴로움의 생겨남이다.”(S35.106)라 했습니다. 세상이 생겨나는 원리와 동일합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갈애에서 멈춘 것입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났을 때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갈애를 친구로 했을 때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리가 명확하게 밝혀 졌습니다. 그것은 ‘갈애(taṇhā)’ 때문입니다. 갈애를 친구로 하는 자는 괴로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세생생윤회할 것입니다. 사성제에서도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S56.11)라고 괴로움의 원인이 갈애임을 명확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갈애를 벗으로 하여 오늘도 내일도 살아갑니다.
갈애를 친구로 했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없고 윤회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괴로움과 윤회의 원인이 갈애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이는 부처님의 오도송이라 잘 알려져 있는 법구경의 두 게송에서 알 수 있습니다.
Anekajātisaṃsāraṃ
sandhāvissaṃ anibbisaṃ
Gahakārakaṃ
gavesanto:
dukkhā jāti punappunaṃ.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
그러나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니,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 (Dhp153)
Gahakāraka diṭṭhosi!
Puna gehaṃ na kāhasi:
Sabbā te phāsukā bhaggā,
gahakūṭaṃ visaṅkhitaṃ,
Visaṅkhāragataṃ cittaṃ,
taṇhānaṃ khayam-ajjhagā.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 (Dhp154)
집을 짓는 자는 갈애를 뜻합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세세생생 윤회하는 동력이 되는 것이 ‘갈애’임을 밝혀 냈습니다. 그래서 이띠붓따까에서는 “갈애를 벗으로 삼는 사람은 오랜 세월 윤회하며 이러한 존재 저러한 존재로의 윤회를 벗어나기 어렵다.”(It.109)라 했습니다.
모든 포커스는 갈애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날 때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휘말려 들어갑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윤회입니다. 윤회를 삼사라(saṃsāra)라 하는데 소용돌이 치면서 폭류가 되어 흘러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윤회 (輪廻) 또는 유전(流転)이라 합니다.
집을 짓는 자가 갈애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집을 짓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만든 번뇌라는 서까래와 자아라는 개체의 대들보가 무너졌을 때 더 이상 갈애의 집을 짓지 않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사라짐에 대하여
세상이 생겨나는 것은 갈애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생겨나는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통찰은 초전법륜경에서 꼰당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S56.11)라며 진리의 눈이 생겨난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사리뿟따가 앗사지의 짤막한 연기법송을 듣고서 똑같이 말한 것에서도 확인 됩니다.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말은 다름 아닌 ‘연기법’입니다. 조건발생한 것은 모두 조건소멸함을 말합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조건발생한 세상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수행승이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세상, 세상’이라고 하는데,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세상이라고 합니까?”(S35.82)라며 물어 봅니다. 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수행승이여, 부서는 것이므로 세상이라고 한다. 부서지는 것은 무엇인가? 수행승이여, 시각이 부서지는 것이며 형상이 부서지는 것이며 시각의식이 부서지는 것이며 시각접촉이 부서지는 것이며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부서지는 것이다.”(S35.82)
조건 발생하여 형성된 세상이 부서지지 않는다면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유일신교에서는 창조주가 창조한 세상은 영원히 지속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창조주가 창조한 세상도 창조주가 파괴하기 때문하면 종말이 있기 마련입니다. 눈으로 대상으로 보아 형성된 세상은 갈애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 발생된 세상은 조건이 다하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고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만 일어나기 때문에 조건이 바뀌면 형성된 세상도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매순간 새로 세상이 일어났다가 매순간 세상이 사라집니다. 느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느낌이라도 시각의 대상이 바뀌었을 때 사라집니다. 싫은 느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 마다 늘 지혜로써 관찰하라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입니다.
대상을 접했을 때 즐거운 느낌이나 싫어 하는 느낌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 단계에서 한단계만 더 앞으로 나아 가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갈애를 동반자로 삼았을 때 입니다. 좋으면 ‘죽도록’ 좋아합니다. 한번 싫으면 ‘죽어라’ 실어합니다. 이미 갈애가 실린 것입니다. 그래서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Passati passo passantaṃ,
apassantañca passati;
Apassanto apassantaṃ,
passantañca na passatī.
“보는 자는 보는 자도 보고
보지 못하는 자도 본다.
보지 못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자도 보지 못하고
보는 자도 보지 못한다.” (Thag.61)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보는 자는 현자(賢者)이고 보지 못하는 자는 범부(凡夫)입니다. 그런데 “보는 자는 보는 자도 보고 보지 못하는 자도 본다.”라 했습니다.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본다는 말과 같습니다. 동시에 깨달은 자는 일반범부도 알아 봄을 말합니다. 여기서 ‘본다(Passati)’는 말은 올바른 견해(정견)으로 봄을 말합니다. 주석에서는 ‘부전도성(不顚倒性: aviparīta)’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네 가지 전도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네 가지 전도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실체없음에 대하여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더러운 것에 대하여 청정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A4.49)라 했습니다.
네 가지 전도란 다름아닌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여기는 것,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고 여기는 것, 실체없음에 대하여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 더러운 것에 대하여 청정하다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전도는 지각의 전도(saññāvipallāsā), 마음의 전도(cittavipallāsā), 견해의 전도(diṭṭhivipallāsā)에 따른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총 12가지 전도가 있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은 현상에 대하여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부정(不淨)으로 보지 못함을 말합니다. 보지 못하는 자, 즉 일반범부들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늘 상(常), 락(樂), 아(我), 정(淨)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지 못함입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자도 보지 못하고 보는 자도 보지 못한다.”라 했습니다. 무지에 무지가 쌓인 중층 무지를 가진 맹목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누가 깨달은 자인가
사람들은 눈이 있어 보는 것 같지만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이런 자는 맹인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차이라 볼 수 있습니다. 현자에게 있어서 세상은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는 세상입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있어서 ‘세상은 자아와 세상이 영원하다’거나, ‘몸이 무너지면 정신도 무너져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거나, ‘자아와 세상은 우연이 발생된 것이다’라는 견해를 갖게 됩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 부정으로 본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세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괴로움도 일어나지 않고 거친 소용돌이(輪廻)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자는 해야 할 일을 다한 자입니다.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친 자가 있습니다. 테라가타에서는 “해야 할 일을 행했고, 즐길만한 것을 즐겼으니, 지복은 행복을 따라 왔다.”(Thag.63)라 했습니다. 여기서 ‘해야 할 일(kataṃ kiccaṃ)’은 주석(ThagA.I.155)에 따르면 16가지로 설명됩니다. 즉, 네 가지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知), 버려야 할 것(斷), 깨달아야 할 것(證), 닦아야 할 것(修)을 통해서 열 여섯 가지가 해야 할 일이 됩니다. 그래서 숫따니빠따 ‘셀라의 경(Sn2.7)’에서는 깨달은 자, 즉 붓다에 대하여 이렇게 선언합니다.
Abhiññeyyaṃ abhiññātaṃ
bhāvetabbañca bhāvitaṃ,
Pahātabbaṃ pahīnaṃ me
tasmā buddhosmi brāhmaṇa.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님입니다.”(stn.558)
2017-10-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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