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을 보시(法施)하고, 가르침의 맛(法味)을 알고, 가르침의 즐거움(法悅)을 아는 자
한곡의 아름다운 음악은 치료제와 같습니다. 그가 우울증에 걸렸다면 항우울제약을 먹을 것입니다. 그런데 음악으로 인하여 치유 되었다면 음악이 치유제나 다름없습니다. 경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행시는 치료제
마음이 심란할 때가 있습니다. 또 격정에 휘말릴 때가 있습니다. 욕망과 분노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초기경전을 접하면 훌륭한 치료제가 됩니다. 특히 짤막한 네 구절의 사행시(四行詩)를 접했을 때 마음이 누구러집니다.
사행시를 사구게(四句偈)라고도 합니다. 금강경에서는 사구게에 대하여 “항하의 모래수 만큼이나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를 가지고 그것으로 보시를 한다해도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남을 위해 말해준다면 그 복덕이 앞에서 말한 복덕보다 더 없이 뛰어나리라”라 했습니다. 법보시가 재보시보다 수승함을 말합니다.
사행시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법구경과 숫따니빠따입니다.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1권 ‘시와 함께’편을 보면 1권 전체가 사행시로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상윳따니까야 56개 주제를 사행시로 압축해 놓은 듯 합니다. 그래서일까 남방불교에서는 상윳따니까야 1권이 법구경만큼이나 인기가 좋다고 합니다. 또 사행시로 있는 경전으로서 우다나와 이띠붓따까를 들 수 있습니다. 법구경, 숫따니빠따, 우다나, 이띠붓따까 모두 소부경전이라 불리우는 쿳다까니까야에 속해 있습니다.,
최근 사행시가 있는 경전을 또 접했습니다. 그것은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입니다. 장로게경과 장로니게경이라고도 합니다. 테라가타는 작년 11월 전재성박사가 주석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로 번역했습니다. 교정작업에 참여한 바도 있습니다. 테리가타는 올해 2월에 발간 되었습니다. 두 경전 모두 부처님의 제자들의 오도송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사행시입니다.
사행시로 구성되어 있는 경전을 접하면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우울했던 마음도 격정의 마음도 사행시를 접하는 순간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잔잔한 환희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해탈과 열반의 기쁨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름 아닌 진리입니다.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사행시를 보고서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행시를 남에게 알려 주면 커다란 공덕을 짓는 것이라 했습니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Sabbadānaṃ dhammadānaṃ jināti,
sabbarasaṃ dhammaraso jināti;
Sabbaratiṃ dhammarati jināti,
taṇhakkhayo sabbadukkhaṃ jināti.
“가르침의 보시는 일체의 보시를 이기고
가르침의 맛은 일체를 이긴다.
가르침의 즐거움은 일체의 즐거움을 이기고
갈애의 부숨은 일체의 괴로움을 이긴다.”(Dhp.354)
법구경 ‘갈애의 품(Taṇhāvaggo)’에 실려 있는 게송입니다. 게송은 네 번째 구절의 갈애의 부숨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습니다. 갈애를 부수려면 먼저 가르침을 접해야 할 것입니다. 가르침을 자신만 알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알려 주어야 함을 말하고, 그런 가르침은 결코 질리지 않는 최상의 맛이라는 것이고, 이 세상의 어떤 즐거움도 법열만한 것이 없음을 말합니다.
왜 가르침의 보시(法施)를 해야 하는가?
첫 번째 구절을 보면 “가르침의 보시는 일체의 보시를 이긴다.”라 했습니다. 법보시가 가장 수승함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습니다.
“DhpA.IV.74에 따르면, 하느님의 세계[梵天界]에 이르기까지 전 우주에 널리 있는 부처님들, 연각불들, 거룩한 님들에게 바나나 나무 잎처럼 부드러운 옷을 아낌없이 보시한다고 해도, 그 보시보다는 가르침을 담은 사행시 하나라도 대중 앞에 외우는 것이 더욱 고귀하다. 물질적 보시는 그 게송의 십육분지 일도 되지 못한다. 이처럼 가르침을 선언하고, 외우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부처님들의 승단에 소속된 수많은 수행승들에게 받쳐진 탁발음식들보다, 제호, 기름 등으로 가득 찬 발우들 가운데 받쳐진 의약품들보다, 아나타삔디까가 기증한 승원이나 마하비하라(Mahavihara)와 같은 백천 사원과 황동으로 만든 궁전과 같은 처소의 보시보다도, 가르침을 담은 사행시 하나라도 대중 앞에 외우는 것이 더욱 고귀하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는 자들은 가르침을 듣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 달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듣지 않은 자들은 한숟갈의 죽이나 한 주걱의 밥을 보시할 줄 모른다. 더구나 싸리뿟따와 몇몇 수행승들은 부처님이나 연각불이나 거룩한 님의 도움없이 혼자서 일겁동안 비가 내리면 그 빗방울 숫자도 헤아릴 수 있을 만큼의 통찰을 지녔어도 진리의 흐름에 듦의 경지를 성취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장로 앗싸지와 같은 거룩한 님[阿羅漢]이 선언한 가르침을 듣고 흐름에 듦의 경지를 성취할 수 있었다.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수행자의 경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가르침의 보시가 가장 고귀한 보시이고 가르침의 보시가 다른 모든 보시를 이긴다.”(법구경 1753번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재보시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법보시의 십육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함을 말합니다. 십육분의 일이라는 말은 ‘매우 작음’을 뜻하는 정형구로서 초기경전 도처에 등장합니다. 사행시, 즉 사구게를 외우고 이를 남에게 알려 주주는 공덕이 매우 크다고 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금강경에서도 보입니다. 주석에 실려 있는 내용이나 금강경에서 법보시공덕을 강조하는 내용이나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시공덕 중에서 가장 수승한 공덕이 절을 지어서 승가에 기부하는 것이라 합니다. 부처님 당시 아나타삔디까 존자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절을 지어 바치는 것 보다 더 수승한 공덕이 사구게 하나라도 알려 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금강경에서 수 차례 등장합니다. 그런데 주석에도 똑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주석에서는 ‘마하비하라(Mahavihara)’가 등장합니다. 마하비하라는 한역으로 대사(大寺)라 하는대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에 세워진 불교사원을 말합니다. 붓다고사가 고주석을 기본으로 하여 법구경 주석을 쓸 때 마하비하라에서 머물렀습니다. 5세기의 일입니다.
아나타삔디까가 기증한 승원이나 마하비하라와 같은 사원을 승가에 보시한다고 해도 부처님 가르침의 사행시 하나 알려 주는 공덕이 더 크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이유로서 가르침과의 인연으로 설명합니다.
앗싸지의 연기법송(緣起法頌)
사리뿟따존자가 앗싸지 존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결코 흐름에 경지(豫流者)에 들지 못했을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을까요? 율장대품 ‘싸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이야기(Sariputtamoggallanakatha)’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화내용이 있습니다.
[싸리뿟따]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청결하고 피부색은 맑고 깨끗합니다. 그대는 누구에게 의지하여 출가했고, 그대의 스승은 누구이고, 누구의 가르침을 좋아합니까?
[앗싸지]
“벗이여, 싸끼야 족 출신의 싸끼야의 아들인 위대한 수행자가 있습니다. 나는 그 세존께 의지해서 출가했고, 그 세존께서 나의 스승이고, 나는 세존의 가르침을 좋아합니다.”
[싸리뿟따]
“그런데 존자의 스승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가르칩니까?”
[앗싸지]
“벗이여, 나는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는 새내기입니다. 나는 가르침과 계율에 신참입니다. 저는 상세하게 가르침을 설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간략하게 그 사실을 전하겠습니다.”
그러자 유행자 싸리뿟따는 존자 앗싸지에게 말했다.
[싸리뿟따]
“벗이여, 그렇게 해 주십시오.”
“적거나 많거나 설해주십시오.
그 의미를 나에게 설해주십시오.
나의 바람은 오직 그 의미뿐
많은 문구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러자 존자 앗싸지는 유행자 싸리뿟따에게 이와 같은 법문을 말했다.
[앗싸지]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ṃ hetuṃ tathāgato āha;
Tesañca yo nirodho,
evaṃvādī mahāsamaṇo
“사실들은 원인으로 생겨나며
그 원인을 여래는 설합니다.
그것들이 소멸하는 것 또한
위대한 수행자께서 그대로 설합니다.”
그때 이와 같은 법문을 듣고 유행자 싸리뿟따에게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싸리뿟따]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ṃ taṃ nirodhadhamma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싸리뿟따]
“만약 오로지 이것만이라고 하여도
오히려 이것이 올바른 가르침이니
그대들은 이미 근심 없는 진리를 꿰뚫었으니,
지난 수천억 우주기 중에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율장대품, 싸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이야기(Sariputtamoggallanakatha), 159쪽, 전재성님역)
이것이 싸리뿟따와 앗싸지의 대화입니다. 싸리뿟따는 앗사지가 말한 “사실들을 원인으로 생겨난다.(Ye dhammā hetuppabhavā)”라는 말과 “그것들이 소멸한다 (Tesañca yo nirodho)”라는 말을 듣고 흐름의 경지에 들었습니다. 이를 연기법송(緣起法頌)이라 합니다. 싸리뿟따는 앗사지가 말한 연기의 생멸에 대한 매우 짤막한 법문을 듣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ṃ taṃ nirodhadhamma)”라고 알아 들어 ‘진리의 눈(Dhammacakkhu)’이 생겨났다고 했습니다.
싸리뿟따가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불사의 진리를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설령 싸리뿟따가 “일겁동안 비가 내리면 그 빗방울 숫자도 헤아릴 수 있을 만큼의 통찰”을 지녔다고 해도 연기의 생멸법을 몰랐더라면 결코 흐름의 경지에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주의 빗방울을 센다는 이야기는 화엄경에도 나옵니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따르면 “대천세계의 주인인 마혜수라(摩醯首羅)만은 예외이다. 그는 과거에 닦은 선근의 힘으로 물 한방울까지도 분명히 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5세기 붓다고사는 법구경을 주석할 때 우주의 빗방울을 셀 정도로 통찰을 가졌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지 않은 자는 성자의 흐름에도 들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 우주의 빗방을 셀 수 있을 정도의 통찰력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자는 성자의 근처에도 갈 수 없음을 말합니다.
진정한 보살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줄 조차 모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설령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는 줄 안다고 해도 접하지 않았다면 모르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가르침을 접하지 않은 자들은 욕망의 세계에서 욕망에 충실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욕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욕계를 탈출할 수 있는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 자들은 욕망의 세계를 탈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만 탈출할 것이 아니라 타인도 탈출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행시하나라도 알려 주는 공덕으로 경전 도처에서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르침이 훌륭하다면 자신만 알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짤막한 게송 하나라도 알려 주는 공덕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는 자들은 가르침을 듣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 달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듣지 않은 자들은 한숟갈의 죽이나 한 주걱의 밥을 보시할 줄 모른다.” (DhpA.IV.74)라 했습니다. 가르침을 타인에게 알려 주었을 때 싸리뿟따가 앗싸지에게 들은 사행시 하나로 흐름에 든 경지에 들었듯이, 사행시 하나를 인연으로 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가르침을 타인에게 알려 주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보살행일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침의 보시(法施)는 일체의 보시를 이긴다 (Sabbadānaṃ dhammadānaṃ jināti)”라 했습니다.
가르침의 맛(法味)에 대하여
두 번째 구절을 보면 “가르침의 맛은 일체를 이긴다.”라 했습니다. 가르침에도 맛이 있음을 말합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DhpA.IV.74에 따르면, 먹을 수 있는 식물의 줄기 등과 같은 모든 맛, 심지어 신들이 먹는 감로식[甘露食]과 같은 음식의 맛들은, 사람을 윤회의 세계에 빠뜨리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어떤 고통을 겪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가르침 – 아홉 가지 출세간의 원리[九出世間法]와 서른 일곱 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수행의 원리[三十七菩提分法] – 의 맛만은 고귀하다. 그래서 가르침의 맛은 모든 맛을 이긴다.” (법구경 1754번각주, 전재성님)
맛에 대하여 갈애가 일어나면 윤회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네 가지 식사에 대한 이야기와 맥을 같이합니다. 상윳따니까야 ‘자양분의 경’에 따르면 거칠거나 미세한 자양분(Kabaliṅkāro āhāro oḷāriko), 접촉의 자양분(sukhumo phasso āhāro), 의도의 자양분(manosañcetanā āhāro), 의식의 자양분(viññāṇaṃ āhāro)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식사는 모두 미래 태어나는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자양분은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해 존재한다.”(S12.11)라 했습니다. 세세생생 윤회하려거든 네 가지 식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맛도 부처님 가르침의 맛에 비할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맛은 맛에 대한 갈애로 인하여 윤회하게 만들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의 맛을 접하면 윤회에서 탈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의 맛에 대하여 ‘아홉 가지 출세간의 원리[九出世間法]’와 ‘서른 일곱 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수행의 원리[三十七菩提分法]’라 했습니다. 이 맛 만이 가장 고귀한 맛이라 합니다. 그래서 “가르침의 맛(法味)은 일체를 이긴다. (sabbarasaṃ dhammaraso jināti)”라 했습니다.
모든 즐거움 가운데 가르침의 즐거움(法悅)이
세 번째 구절을 보면 “가르침의 즐거움은 일체의 즐거움을 이긴다.”라 했습니다.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데도 즐거움이 있음을 말합니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DhpA.IV.74-76에 따르면, 아들과 딸들, 재산과 여자, 춤과 노래와 음악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놀이에서 오는 즐거움은 사람을 윤회의 세계에 빠뜨리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어떤 고통을 겪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가르침을 말하고 가르침을 듣는 자에게 일어나는 즐거움은 마음을 고양시키고 정화시켜서 마침내 거룩한 경지에 이르게 하여 윤회를 종식시킨다. 그래서 모든 즐거움 가운데 가르침의 즐거움이 가장 고귀하다. 그래서 가르침의 즐거움이 모든 즐거움을 이긴다.” (법구경 1755번각주, 전재성님)
사람들은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빠알리어 수카에 대한 설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수카는 영어로 ‘pleasant, happy; happiness, pleasure, joy, bliss’등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pleasure, joy’라는 말은 즐김, 쾌락의 뜻입니다. 행복을 뜻하는 수카라는 말은 즐긴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카에 대하여 한자어 사전을 보면 ‘楽, 安楽, 快乐, 幸福’으로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즐기는 것을 행복이라 보는 것 같습니다. 종로3가 지하철환승역에는 “젊은이여 후회한다. 지금 즐겨라”라는 캠페인 문구가 붙어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일까 인생을 마음껏 즐기라고 말합니다. 대개 오욕락을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가르침을 즐기라고 했습니다.
가르침을 즐기면 오욕락 보다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선정삼매의 즐거움에 대하여 “아난다여, 이와 같이 ‘뭇삶이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누린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 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 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세상에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고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윔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든다.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 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은 이런 것이다.”(S36.19)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선정삼매의 즐거움 보다 더 탁월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열반의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법구경에서는“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nibb ānaṃ paramaṃ sukhaṃ)”(Dhp.204)라 했습니다. 그래서 “가르침의 즐거움(法悅)은 일체의 즐거움을 이긴다. (Sabbaratiṃ dhammarati jināti)”라 했습니다.
갈애의 부숨, 모든 것 가운데 최상
마지막 네 번째 구절은 “갈애의 부숨은 일체의 괴로움을 이긴다.”라 했습니다. 갈애가 소멸되면 괴로움도 소멸됨을 말합니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DhpA.IV.76에 따르면, 거룩한 경지[阿羅漢果]에서 갈애의 부숨이 성취된다. 그것으로 윤회의 괴로움을 완전히 극복된 것이므로, 그것이 모든 것 가운데 최상이다. 그래서 갈애의 부숨은 일체의 괴로움을 이긴다.” (법구경 1756번각주, 전재성님)
갈애는 윤회의 원인이 됩니다. 느낌을 알아 차리지 못하면 갈애로 전개되는데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된 것이 집착입니다. 집착 단계가 되면 업으로서 태어남에 이르게 됩니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 가지 않게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쉽게 갈애로 넘어갑니다. 갈애를 친구로 하고 동반자로 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갈애의 경’에 따르면 “갈애를 벗으로 하는 사람은 오랜 세월 유전윤회하며 여기서 생겨나고 저기서 생겨나면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A4.9)라 했습니다.
갈애의 부숨은 사성제에서 멸성제에 해당됩니다. 멸성제에 대한 것을 보면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라 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입니다. 갈애를 부수면 괴로움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갈애의 부숨은 일체의 괴로움을 이긴다.(taṇhakkhayo sabbadukkhaṃ jināti)”라 한 것입니다.
가르침을 보시(法施)하고, 가르침의 맛(法味)을 알고, 가르침의 즐거움(法悅)을 아는 자
장자 아나타삔디까는 승원을 보시했습니다. 그 공덕으로 경전에 이름이 올려져 있고 후대 보시의 귀감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기녀 암바빨리도 몸 팔아서 번 돈으로 원림을 기증했습니다. 나중에 승단에 귀의 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나 보시공덕을 찬탄합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도덕적 삶과 더불어 봉사하는 삶은 크게 장려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보시공덕 보다 더 수승한 것이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사구게를 남에게 알려 주는 것이 삼천대천세계를 보시한 공덕보다 더 크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행시 하나 알려 주는 공덕이 승원을 보시하는 공덕보다 더 클까요? 그것은 다름아니라 깨달음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오늘도 내일도 탐욕으로 분노로 어리석음으로 살아 갈 것입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접한 자들은 이와 반대로 살아 갈 것입니다. 죽 그 길로 각자 가다 보면 종착지는 어디일까요? 탐, 진, 치로 살아 가는 자들은 육체적 죽음과 함께 정신도 죽게 되어 진짜 죽음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와 존재에 대한 갈애, 그리고 비존재에 대한 갈애로 인하여 삼계에 재생하고 말 것입니다.
불탐, 부진, 불치의 삶을 산 자가 있습니다. 그는 육체적 죽음과 함께 더 이상 재생의 마음이 일어 나지 않아 태어남이 없습니다. 이를 불사(不死)라고도 합니다.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은 오온에 대하여 자기 것으로 보기 때문에 오온이 멸함에 따라 오온의 죽음을 맞이 하게 되지만, 현자들은 오온에 대한 자아관념이 없기 때문에 오온이 멸해도 자아가 멸한 것이 아닌 것이 되어 죽음이 시설되지 않습니다.
오온을 자아라고 여기는 범부 자들은 죽지만 오온을 무아라고 여기는 현자들은 죽지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죽지 않는 불사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가르침의 보시는 일체의 보시를 이기고, 가르침의 맛은 일체를 이긴다. 가르침의 즐거움은 일체의 즐거움을 이기고 갈애의 부숨은 일체의 괴로움을 이긴다.”(Dhp.354)라 했습니다. 가르침을 보시(法施)하고, 가르침의 맛(法味)을 알고, 가르침의 즐거움(法悅)을 아는 자는 갈애를 부수어 괴로움을 끝내고 윤회를 종식시킬 것입니다. 인터넷과 정보통신시대에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사행시 하나 알려 주는 것도 큰 공덕 짓는 행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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