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연기된 식의 총량이 윤회한다? 논장을 배격한 테라와다빅쿠

담마다사 이병욱 2017. 9. 28. 12:05


연기된 식의 총량이 윤회한다? 논장을 배격한 테라와다빅쿠

 

 

세상에는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시대라 검색창에서 검색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궁금한 것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윤회 같은 것입니다. 아직까지 죽어서 살아 온 사람이 없기에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마다 이런말 저런말을 합니다. 어느 사람 말을 들어 보면 그럴 듯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믿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견해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경전과 주석에 의지해야 합니다. 수천년동안 전승된 가르침에는 우리들이 궁금해 하던 것들에 대한 해법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 번째 음 억양

 

종종 유튜브에서 A스님의 법문을 듣습니다. 빨강가사를 걸친 테라와다 스님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심한 억양이 있어서 듣기에도 매우 거북합니다. 두번째 음을 올리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다보니 단어 하나하나에 두 번째 음이 올라가서 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듣는데 있어서 인내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법사의 비주얼은 고칠 수 없지만 오디오의 경우 아나운서 수준의 노력은 있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윤회와 관련된 도면을 보면

 

A스님은 윤회의 진실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나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윤회의 진실 세미나에서 윤회는 없습니다. 대신 일상에서 일어나는 순간윤회는 있습니다. 정작 알고 싶은 것은 일생윤회이지만 매순간 일상에서 벌어지는 순간윤회만 언급되어 있을 뿐입니다.

 

윤회없는 윤회의 진실 세미나에서 윤회는 없습니다. 그런데 A스님은 식이 윤회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식은 재생연결식이 아닙니다. 1차와 제2차 결집본을 근거로 하여 설법하는 A스님에게 있어서 논장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논장은 제 3차 결집본에서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A스님이 논장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이론과 상충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윤회의 진실이라 하여 식이 윤회한다고 주장하는 A스님의 이론은 논장에서 언급되어 있는 바왕가와 재생연결식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런 이유로 논장을 배격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을 전개합니다. 이를 삶의 메커니즘이라 하는데 윤회와 관련된 도면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도면은 A스님의 홈페이지에서 가져 온 것입니다. 홈페이지를 보면 교리공부 메뉴가 있고 서브메뉴로 윤회가 있습니다. 관심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도면을 보면 현실의 삶의 과정을 십이연기로 풀어 놓은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죽음이후에 일어나는 윤회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윤회의 진실을 말한다고 하지만 윤회는 보이지 않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것만 도표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연기된 식의 총량이 윤회한다?

 

A스님은 식이 윤회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외도의 견해입니다. 그렇다고 영혼이 주장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삶의 과정에서 증장된 식이 윤회한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아뢰야식을 말하는 것같습니다. A스님이 주장하는 식이 윤회한다라는 말은 현생에서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축적되는 것을 말합니다. 식의 총량이 증가되는데 그 축적된 식이 윤회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연기하는 식이 윤회한다고 합니다. 연기하는 식의 총량이 윤회한다는 것입니다.

 

A스님의 이론은 현생에서나 들어 맞는 것 같습니다. A스님이 연기하는 식이 윤회한다고 했을 때 삶의 과정에서 매순간 행위에 따른 식이 축적되어 그 축적된 식이 윤회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습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음이후에 대한 것입니다.

 

A스님의 연기하는 식 또는 축적된 식이 윤회한다고 했을 때 과연 어떤 식이 윤회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A스님 주장대로 연기하는 식 또는 축적된 식이 윤회하는 것이라면 죽음의 순간 마지막 일어나는 마음이 윤회할 것입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한번 밖에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축적된 식이 윤회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지막 임종순간의 마음이 윤회한다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어릭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마지막 임종순간의 마음이 다음생을 결정한다면 매우 불공평한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임종순간 다음 생을 결정할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과보를 맺는 우선순위에 따른 4가지 업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거운 업(gruka-kamma)

죽음 직전의 업(āsanna-kamma)

습관적인 업(āciṇṇa-kamma)

명시되지 않은 업(kaatta-kamma)

 

 

지은 행위에 따라 내생이 결정됩니다. 가장 무거운 업이 우선순위가 됩니다. 살인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는 너무 강해서 어떤 다른 업도 내생에 그 것의 과보를 멈출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무거운 업은 다음 생에 반드시 과보로서 나타남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5무간업이 이에 해당됩니다.

 

내생을 결정짓는 재생연결식은 무거운 업, 죽음직전의 업, 습관적인 업, 명시되지 않은 업의 순서로 우선순위가 결정됩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습관적인 업이 죽음직전의 업보다 우선순위로 되어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일생에 있어서 가장 무거운 업이 죽음직전에 표상으로 떠 올라 내생의 재생연결식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A스님의 강좌를 들어 보면 이런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2차 결집본인 경장과 율장을 근거로 하다 보니 논장과 주석서는 철저하게 배제된 것입니다.

 

A스님의 주장대로 연기된 축적된 식이 윤회한다면 식의 총량이 윤회하거나 마지막 식이 윤회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식은 모순이 있습니다. 만일 식의 총량이 윤회한다면, 즉 아뢰야식 같은 것이 윤회한다면 이는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 만 일어난다는 법칙에 모순됩니다. 만일 마지막 식이 윤회한다면 살인과 같은 무거운 죄를 지은 자는 악처에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논장을 배제하는 이유는?

 

A스님은 식이 윤회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단지 삶에서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것입다. 일종의 순간윤회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A스님의 연기하는 식의 총량윤회론에 따르면 일생윤회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수 많은 모순이 발생되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A스님은 아비담마논장과 주석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것 같습니다. 아비담마논장을 인정하는 순간 충돌이 일어나 자신의 이론은 설자리를 잃어 버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법인화 불사, 선원건립 불사, 근본불교대학 설립 불사

 

유튜브에는 A스님의 동영상강좌를 볼 수 있습니다. 거의 일이주 간격으로 새로운 동영상이 올라옵니다. 지난 수년간 축적된 동영상은 수 백편에 달합니다. 열의를 가지고 정진하는 모습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런데 홈페이지를 보면 가장 먼저 불사가 눈에 띕니다. 법인화 하는 작업과 선원불사, 그리고 근본불교대학 설립에 대한 불사입니다. 이 세 가지 불사를 후원하고 동참해 달라는 팝업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이에 대하여 보시공덕을 강조합니다. 만일 스님이 아니었다면 이런 불사가 가능할지 의문해 봅니다.

 

불자들은 삭발하고 승복입은 스님들을 존경하고 존중합니다. 신심 깊은 불자들은 지나가는 길에 스님을 만나면 멈추어 서서 반배의 예를 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빨강가사를 입은 스님을 보면 더욱 더 예를 갖춘다는 사실입니다. 남방 테라와다빅쿠들이 계를 잘 지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이 불사한다고 하면 동참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만일 일반재가불자가 선원불사 등 불사를 추진했을 때 흔쾌히 동참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으리라 봅니다. 삭발하고 승복입었기 때문에 불사가 가능한 면도 있습니다. 이를 승복의 권위라 해야 할 것입니다.

 

논장을 배제하면 직무유기

 

유튜브에서 A스님의 동영상 강좌를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경전을 나름대로 독특하게 해석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몇 번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 듣기 힘듭니다. 그래서일까 같은 내용을 몇 번이고 반복합니다. 특히 삶의 메커니즘이라는 도면을 수도 없이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아비담마 논장이나 청정도론, 그리고 주석서를 보면 너무나도 명쾌합니다. 잘 정리된 참고서를 보는 듯 합니다. 특히 마음의 메커니즘과 윤회에 대한 설명을 보면 불교를 종교로 선택하기를 잘했다는 신심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A스님에게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논장을 중시해달라는 것입니다. 2차 결집본이라 하여 경장과 율장만 대상으로 할 것이 아니라 3차 결집본인 논장의 가르침도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만일 경장만 전달하고 도구나 자신이 해석한 방식만 알려 준다면 듣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빠알리삼장이라 하여 논장은 경장과 율장과 함께 삼장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논장을 무시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한 것만 알려준다면 이는 직무유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부처님은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S4.5)라고 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악마의 올가미의 경에 실려 있는 전도선언입니다. 여기서 처음도, 중간도 , 마지막도라는 말은 빠짐 없이 설하라는 말입니다. 경장과 율장 뿐만 아니라 논장도 설해야 함을 말합니다.

 

A스님이 해석한 이론은 논장과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이론과 충돌이 일어난다고 하여 논장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이는 직무유기에 해당됩니다. 빠알리삼장을 근본으로 하는 테라와다빅쿠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이 해석한 방식도 알려 주면서 논장의 가르침도 알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가르침을 빠짐 없이 알려 주어야 합니다.

 

 

2017-09-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