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연기법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
부처님 핵심가르침은 무엇일까? 이구동성으로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부처님이 설한 핵심 교리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잘 읽어 보면 하나로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업(業:kamma)’과 ‘업의 과보(業報: vipaka)’ 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를 줄여서 ‘업보(業報: kammavipāka)’ 또는 ‘업이숙(業異熟)’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이고 또한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가르침이라 봅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한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외도와의 사상논쟁에 대한 것입니다. 외도와 토론하면서 가르침을 설명하는데 그것은 크게 무아(無我)의 가르침으로 귀결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또한 무아가 핵심 가르침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호칭에 대하여
부처님이 외도와 논쟁을 할 때 재미 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부처님 호칭에 대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같은 수행자의 입장에서 “고따마여”라 합니다. 부처님의 성씨를 부르는 것입니다. 마치 김씨, 이씨 또는 “김가야” “이가야” 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라문들 역시 부처님을 부를 때 ‘고따마’라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은 절대 부처님의 성씨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물론 신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신도들은 “바가와 (bhagava)”라 불렀습니다. 번역에서는 “세존이시여”라고 표현됩니다.
오늘날 불자들이 부처님을 호칭할 때 대개 “부처님”이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붓다(Buddha)’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법에 크게 어긋난 것은 아닙니다. 붓다라고 하면 깨달은 자로서의 부처님을 뜻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존칭의 의미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 본 외도들은 한결같이 부처님에 대하여 “고따마여”라며 성씨를 불렀습니다.
맛지마니까야 ‘미간디야의 경(M75)’에 따르면 유행자 미가디야는 부처님을 만났을 때 “존자, 고따마여”라 했습니다. 성씨에 존중하는 의미에서 ‘존자여’라 붙인 것입니다. 외도이기 때문에 이것이 최상의 예우라 보여집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대론 하는 과정에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호칭의 변화에서도 감지됩니다. 외도 유행자 미간디야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난 후에 “세존이시여, 고따마여, 훌륭합니다.”(M75)라 합니다. 아직 부처님의 교단에 귀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수행자로서 성씨를 부르지만 극히 존경하는 의미로 ‘세존이시여’라 했습니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외도들이 부처님에 대하여 성씨 ‘고따마’라 합니다. 또 다른 말로 한다면 “석가여” 또는 “석가야”가 될 것입니다. 마치 동네 아저씨 부르듯이 ‘고따마’ 또는 ‘석가’라 하는 것은 외도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제자들과 신도들은 “바가와”라 하여 극존칭의 의미로 “세존이시여”라 합니다. 오늘날 “부처님”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극존칭을 쓰는 것은 그 만큼 가르침이 훌륭함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핵심가르침도 있지만 외도와 사상논쟁 하는 것을 보면 결국 ‘업(業:kamma)’과 ‘업의 과보(業報: vipaka)’라는 가르침으로 귀결됩니다.
니까야에서 볼 수 있는 교리논쟁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이 외도들과 사상논쟁하는 장면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디가니까야의 경우 ‘하느님의 그물의 경(D1)’ ‘수행자의 삶의 결실의 경(D2)’ 부터 시작 해서 모두 33개의 경중에 대부분이 외도와 사상논쟁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맛지마니까야 의 경우 자이나교도와의 논쟁에 대한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M35)’과 ‘삿짜까에 대한 큰경(M36)’ 그리고 아비지까 교도와 논쟁에 대한 ‘밧차곳따의 큰경(M73)’ 등을 볼 수 있는데, 152개 경중에 외도와 사상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거의 반에 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상윳따니까야의 경우 56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 ‘견해상윳따(S24)’라 하여 외도의 견해에 대하여 모아 놓은 것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앙굿따라니야 도처에서도 외도의 견해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고, 쿳다까니까야의 숫따니빠따나 이띠붓따까 등 에서도 외도의 견해에 대하여 다수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빠알리니까야는 외도의 견해를 소개하고 이를 부수는 가르침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승경전에서는 외도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대승경전이라 볼 수 있는 화엄경, 법화경에서 부처님 당시 부처님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바라문교와 육사외도의 이론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접하다 보니 대승경전에서 볼 수 없었던 교리논쟁에 대한 것을 보고서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메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보게 됩니다.
부처님이 외도와 교리논쟁을 하면 반드시 십이연기가 등장합니다. 부처님은 연기의 가르침으로 외도의 교리를 하나 하나 논파합니다. 그런 외도의 교리는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의입니다. 영원주의는 기득권 세력이자 카스트 최상층부를 구성하고 있었던 바라문교에 대한 것이고, 허무주의는 바라문교에 대항하여 자연스럽게 생겨난 육사외도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대론을 통하여 영원주의와 허무주의가 모두 거짓임을 연기법으로 논파합니다. 그런 연기법은 다름 아닌 업과 업보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핵심은 업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행위(kamma:業)에 대한 문제이다
빠알리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외도사상입니다. 외도사상을 이해해야 부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했는지 그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빠알리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되는 외도와의 논쟁은 부처님 가르침이 가장 뛰어남을 말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의 바탕하에서 사성제와 팔정도 등 부처님 핵심교리가 전개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행위(kamma:業)’에 대한 문제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처음부터 끝까지 꿰뚫고 있는 것 하나를 들라면 단연 업과 업보의 가르침입니다. 행위와 행위에 대한 과보가 언급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부처님 가르침이라 볼 수 없습니다.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을 접하려면 빠알리니까야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유튜브 시대입니다. 유튜브에서는 갖가지 법문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최봉수교수의 강좌가 단연 돋보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 당시 외도사상에 대하여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외도사상을 알아야 부처님이 어떤 말씀하시고자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최봉수 교수는 특유의 입담과 곁들여 매우 명쾌하게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최봉수 교수의 초기불교개론’ 14개 강좌입니다. 이어서 ‘초기불교개론(2)’ 등 여러 강좌가 있습니다.
아지비까(Ajivika) 교도에 대하여
아는 것이 힘입니다. 특히 불교의 교리는 많이 알면 알수록 힘이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초기경전, 구체적으로 빠알리니까야를 접해야 합니다. 여기에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장을 접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이렇게 앎이 탄탄해졌을 때 누가 정법(正法)을 말하는지 구별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온갖 잡것들로 넘쳐나는 유튜브에서 최봉수 교수의 초기불교개론은 여로 모로 불자들에게 유익합니다. 그런데 최근 원담스님이 카페에 외도사상을 요약한 것을 보았습니다. 최봉수교수의 영상강좌가 정리되어 있는 듯합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글로 표현된 것이 영상보다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더구나 상황에 맞는 해설도 곁들여져 있어서 읽는 재미까지 선사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사명외도(邪命外道)라 불리우는 ‘아지비까(Ajivika)’교도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원담스님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⑵아지위카(Ajivika): 영혼을 강조하는 사상.
A(명사 앞에선 강조의 의미)+Jiva(命,영혼)+ika(있다)=Ajivika, 邪命外道사명외도라 흔히 불린다. 마칼리 코살라Makhali Kosala가 아지위카의 대표적 사상가이다.
①영혼(jiva, 비물질적 정신)이 있다.
②地,水,火,風,苦,樂,命 7대 요소설
③영혼에 감정만 있다고 본다. (마음의 구성요소=감정+지성+의지(知情意))
④영혼(감정+지성)은 있는데 의지(선택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가 없다
⑤느끼지만(좋아하고, 싫어하지만) 그걸 어찌할 수 있는 의지가 없다.
⑥인생반조의 질문:
ⓐ너의 인생이 네 뜻대로 되던가? 인생을 길게 보면 결국 네가 의도한 것처럼 이루어진 게 과연 얼마나 되던가? 자유의지, 선택의지를 말하지만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어서 그렇게 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니냐?
ⓑ네가 죽고 싶어서 죽느냐? 네가 늙고 싶어 늙고, 네가 병에 걸리고 싶어서 병에 걸렸느냐? 우리에게 생노병사를 거부할 자유가 있느냐? 생노병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것을 의지대로 산다고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아지위카들은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아지위카는 숙명론이다. 인간은 태어난 대로, 주어진 대로 운명을 받아드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운명대로 살아가라면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귀족으로 태어나 편히 살고, 어떤 사람은 노예로 태어나 고통스럽게 산다면 불평등한 게 아니냐? 아지위카는 여기에 답한다. 한 생만 보면 불평등한 것 같지만, 영원의 눈으로 보면 운명은 평등하다. 돌고 도는 운명의 수레바퀴는 만인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너희 귀족들이 이생에 누리고 살지만 다음 생에는 노예로 떨어질 확률이 높다. 그러니 귀족인 것을 자랑 말고 덕을 베풀라. 너희 노예들이여, 이생이 고달프더라도 노여워 말라. 다음 생에는 귀족으로 태어날 확률이 높으니 억울해 하지 말라. 한 번 높이 올라 누렸으면 다음은 떨어질 확률이 높고, 한 번 낮아져 힘들었다면 다음은 높이 올라 누릴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 이런 논리는 노예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기에 당시의 노예계급에게 인기가 있었다.
*우빠카의 인연: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법을 들을 수행자를 찾아 녹야원으로 향하던 중 이지위까였던 우빠까(Upaka)를 만난다. 그는 진리에 눈 뜬 분을 눈앞에 마주하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린다. 황금 같은 기회가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데도 알지 못한다. 현생에서 다행히 불법을 만난 우리가 부처님이 가르치신 대로 행하고 닦지 아니한다면 우빠까와 다를 게 무엇인가? 눈이 열려 있고 귀가 뚫린 자라면 부처님께 다가와 묻지 않을 수 없으리라.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 모든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무엇에도 더럽혀지지 않고 모든 욕심과 애착에서 해탈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어떤 법을 배웠습니까?”
“스스로 깨달은 자에게는 스승이 없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無等等). 홀로 깨달음을 얻은 나는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진리를 사모하는 수행자라면 바로 이마를 땅에 대고 무릎을 꿇어 법을 청했어야 마땅하리라. “오, 눈 뜬 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시어 저에게 당신의 깨달음을 가르쳐 주소서.” 그러나 자만한 우빠까는 “그럼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라는 멍청한 질문 밖에 할 수 없었다. 우빠까는 왜 부처님을 알아볼 수 없었을까? 왜 설법을 청할 줄 몰랐을까? 부처님과의 만남이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흘려보낸 사람을 무연중생(無緣衆生, 인연이 없는 중생)이라고 한다. 우빠까도 그런 사람일까?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며 가던 길을 재촉해서 가는 우빠까의 모습은 무연중생 같이 보인다. 그런데 경전에 보면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결국 부처님에게로 다시 돌아와 그 분의 제자가 되어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옷깃을 스쳐도 오백생의 인연이 있다고 했는데, 부처님이 설법하러 가시는 길에 최초로 마주친 우빠까에게 법의 인연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원담스님, 2017년10월16일(월) 무신론 비판, 2017-10-17)
아지비까에 대하여 영혼을 강조하는 사상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유물론에서는 영혼이라는 것이 물질에서 파생된 것이라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발효된 누누룩으부터 술의 취하는 성질이 나오듯, 영혼 역시 물질에서 파생된 것이어서 몸이 파괴되면 영혼도 파괴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견해가 유물론입니다.
유물론을 빠알리어로 로까야따(lokayata)라 합니다. 이 견해는 바라문교의 영원주의의 모순을 보고 대항해서 나온 이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지비까의 이론을 보면 로까야따에서 한단계 더 진전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7요소설로 설명됩니다.
로까야따와 아지비까의 치명적인 약점
아지비까의 7요소설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고(苦), 락(樂), 명(命)에 대한 것입니다. 유물론이라 불리우는 로까야따에서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고(苦), 락(樂)까지만 있습니다. 그런데 유물론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정화 경향과 즐거움추구의 상반된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물론 지수화풍 사대에다 고락이 플러스된 것으로 몸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적 견해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 최대한 즐겨라’라 합니다. 그런데 물질은 흩어지면 지극히 안정화 된 상태로 향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엔트로피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영혼은 물질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몸이 무너지면 영혼도 당연히 무너져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살아 있을 때 즐길 수 있는 한 최대한 즐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는 극히 안정화를 지향하는 물질의 성질과는 정반대입니다. 물질은 안정화를 추구하지만 영혼은 즐거움을 추구하여 여기(勵起)된 상태이기 때문에 서로 상충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이 유물론의 치명적인 약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유물론의 약점을 보완한 것이 아지비까입니다. 그것은 몸이 무너져도 죽지 않는 영혼(jiva)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Jiva(命,영혼)+ika(있다)=Ajivika”라 하여 영혼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고(苦), 락(樂), 명(命)이라는 칠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아지비까의 이론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의지라고 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너의 인생이 네 뜻대로 되던가?’와 ‘네가 죽고 싶어서 죽느냐?’로 설명합니다.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
아지비까를 숙명론적 견해라 합니다.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되고 저절로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달리 힘쓸 필요도 없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를 윤회에 적용하면 “예를 들어 실타래를 던지면 풀려질 때까지 굴러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똑같이 그들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다할 때까지 윤회한다.”(S24.8)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아지비까에 현자와 어리석은 자의 구별은 필요 없습니다. 해탈과 열반을 위하여 수행을 하며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버려 두어도 한량 없이 윤회하다 보면 마치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듯이’ 해탈하게 될 것이라 합니다. 이와 같은 아지비까의 7요설을 보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내버려 두어도 때가 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비지까는 ‘도덕부정론’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 것도 서로에게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상태를 야기할 수 없다.”(S24.8) 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한 예를 든다면 “심지어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다른 사람의 목을 벤다고 해도 그 목숨은 빼앗을 수 없고 그 칼은 단지 일곱 요소 사이의 공간을 통과한 것뿐이다.”(S24.8)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살인을 해도 죄가 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런 논리라면 오계를 지키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왜 막칼리 고쌀라의 견해가 최악인가?
부처님은 빠알리니까야 도처에서 외도들의 행태를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막칼리 고쌀라’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것은 막칼리 고쌀라의 견해가 도덕부정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강도로 비판했을까? 부처님은 수 많은 외도의 설법자 가운데 “막칼리 고쌀라의 가르침을 최악이라 한다.”(A3.135)라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수많은 수행자의 설법자의 가르침 가운데 막칼리 고쌀라의 가르침을 최악이라 한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 막칼리는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이와 같이 설하고 이와 같이 보기 때문이다.”(A3.135)
부처님이 아비지까 의 견해를 가진 도덕부정론자 막칼리 고쌀라를 최악으로 본 것은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위에 대한 과보를 인정한다면 살인을 하고 도둑질을 하는 등 오계를 어기는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해야 할 것이 없다고 보는 아비지까 교도들은 무엇이든지 저절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또한 노력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삶에는 수행도 정진도 청정한 삶도 있을 수 없습니다. 내키는 대로 살아도 오계를 어기는 삶을 살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팔만사천 대겁이 있는데, 그 동안 어리석은 자도 슬기로운 자도 유전하고 윤회한 뒤에 괴로움의 종극에 이른다. 그러므로 ‘내가 규범이나 금기나 고행이나 청정행으로 아직 익지 않은 업을 익게 하고 이미 익은 업을 반복적으로 접촉하여 없애겠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미 결정된 윤회의 괴로움이나 즐거움과 괴로움은 끝나거나 증가하거나 감소되거나 더하거나 덜함이 없다.”(S24.8)
아비지까교도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다 이루어져 있고 이미 다 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해야 할 필요성이 없을 때 현자나 어리석은 자나 다 똑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굳이 힘들게 오계를 지키며 수행을 하며 청정하게 살 하등의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규범이나 금기나 고행이나 청정행으로 아직 익지 않은 업을 익게 하고 이미 익은 업을 반복적으로 접촉하여 없애겠다.’(S24.8)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막칼리 고쌀라를 최악이라 한 것은 다름 아닌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한다면 도덕적으로 금하는 그 어떤 것도 서슴없이 범할 것입니다. 돈을 떼 먹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업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현명한 자들이나 어리석은 자들이나 팔만사천 대겁이나 되는, 한량없는 윤회 기간 동안 마치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듯 모두 해탈하게 될 텐데 굳이 지금 여기에서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연기법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
부처님은 육사외도 중에 최악의 가르침을 막칼리 고쌀라의 도덕부정론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무작설(無作說: akiriya)’이라 했습니다. 도덕적 삶을 부정하는 강한 결정론이나 비결정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무작설에 대하여 숙명론, 존우화작론, 무인론 이렇게 세 가지를 들어 설명한 것이 앙굿따라니까야에 있는 ‘이교도의 경(A3.61)’입니다.
무작설은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와 육사외도의 사상이 이에 해당됩니다. 초기경전 도처에서 외도의 견해가 언급되어 있는 것은 업과 업의 과보를 설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스스로 ‘작론자(作論者: kiriyavādin)’라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업과 업의 과보를 설하는 자를 말합니다.
부처님은 업과 업의 과보를 설하는 작론자라 했습니다. 이렇게 작론자라 선언한 것에 대하여 “내가 설한 이러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 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다.”(A3.61)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작론은 다름 아닌 연기법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연기법은 다름아닌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2017-10-2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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