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빠라마수카(parama sukha), 완전한 행복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0. 26. 10:56


빠라마수카(parama sukha), 완전한 행복

 

 

천수경 참회게(懺悔偈)에서

 

천수경을 불교인들의 생활경전이라 합니다. 물론 한국에서 한한 것입니다. 한국의 신심 있는 불자들이 아침저녁으로 낭송하는 천수경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아석소조제악업 (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 (皆由無始貪瞋癡)

종신구의지소생 (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 (一切我今皆懺悔)

 

지난세월 제가지은 모든악업은

옛적부터 탐진치로 말미암아서

몸과말과 생각으로 지었사오니

제가이제 모든죄업 참회합니다.”

(천수경 참회게)

 

 

천수경 참회게입니다. 참회게에서 키워드는 탐진치(貪瞋癡)’신구의(身口意)’입니다. 모든 악업은 가까운 원인으로 신구의삼업이고, 먼 원인으로는 탐진치삼독임을 말합니다. 결국 탐진치로 물들인 행위가 악업으로 나타남을 말합니다.

 

분석적이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이고

 

매일 매순간 업(: kamma)을 짓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을 짓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업에 대하여 행위라고 말하면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행위에 대하여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 그것은 불자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신체적 행위, 언어적 행위, 정신적 행위 이른바 삼행(三行)입니다. 이런 삼행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끊임 없이 업을 짓고 업에 대한 과보를 받아 세세생생 윤회합니다.

 

신구의 삼행은 어느 종교나 사상에서도 볼 수 없는,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에서만 접할 수 있는 불교만의 독특한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구의 삼행은 매우 분석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신구의삼행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매우 분석적이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로 표현한다면 시스터메틱(Systematic)’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나는 분별하여 설한다라 했습니다. 이는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연기를 분별하여 설하겠다. 그것을 잘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S12.2)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분별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위밧자(vibhajja)’를 번역한 말 입니다. 이렇게 분별하여 또는 분석하여 설 하는 부처님에 대하여 분별론자(分別論者, vibhajjavadin)’라 합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에서 바라문 청년이여, 그것에 대해 나는 분별하여 말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 것에 대해 일방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Vibhajjavādo kho ahamettha māava, nāhamettha ekasavādo,)”(M99)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분별론자라 했습니다. 그것은 법을 분석하고 해체해서 보아야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이는 분석을 통한 통찰이 세계의 실상을 여실지견(如實知見)하는 올바른 방법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상윳따3권 해제)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이렇게 분별을 강조했을까? 그것은 잘못된 개념을 타파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이 오온이라는 무더기 또는 다발로 이루어진 것임에도 사람이니 중생이니라 하여 개념화 했을 때 실체도 없는 것에 집착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무아의 가르침을 설하기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분해하고 해체하고 분별하고 분석하여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것이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요약됩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분석적이고 체계적입니다.

 

문지방을 넘어섰을 때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분석하여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그것이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나타납니다. 오온에 대하여 철저하게 분별하고 분석하여 설한 것은 오온이 무상, , 무아임을 드러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포커스는 무아(無我)’로 모아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M22.15)라는 정형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삼특상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상, , 무아를 설명할 때 공통적으로 이 정형문이 사용되는데 이는 부처님 가르침의 포커스가 무아에 집중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무아에 대한 가르침은 오온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온을 내 것이라 여겼을 때 자아에 대한 집착이 일어남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초전법륜경 고성제에서는 오취온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S56.11)라 한 것입니다.

 

오온이 내 것이 아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대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정형구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에 오온을 대입하면 오온은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닙니다. 느낌을 예로 든다면, 느낌은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닌 것이 됩니다. 어느 것 하나 내 것일 수 없다는 것은 오온에 대하여 통제할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몸이 정말 내 것이라면 우리는 늙지도 말고 병들지도 말고 죽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생노병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오온이 내것 같지만 사실은 내것이 아님을 알려 주는 것은 생노병사로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조건에 따라 소멸 되는 것이 오온입니다. 오온 중에 수온(受蘊)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즐거운 느낌도 조건이 다하면 사라집니다. 그럼에도 좋은 느낌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갈애 입니다. 갈애는 느낌을 조건으로 발생합니다. 그런데 갈애가 일어나면 빼도박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문지방을 넘어선 것입니다.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 간 것입니다. 루비콘 강을 건넌것과 같고 위화도 회군 한 것과 같습니다. 이제 거침 없이 앞만 보고 달려 갑니다. 이것이 집착입니다. 집착은 갈애를 조건으로 생겨난 것이긴 하지만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된 것을 집착으로 보고 있습니다.

 

집착단계에 이르면 반드시 업을 짓고 맙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재생을 위한 업입니다. 그래서 십이연기를 보면 집착을 조건으로 업유(業有: bhava), 즉 업으로서의 존재가 생겨납니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 났을 때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문지방을 넘어선 것과 같아서 돌이킬 수 없음을 말합니다.

 

사견(私見: diṭṭhi)에 대하여

 

우리들은 업으로서의 존재입니다. 업을 다른 말로 행위라고도 합니다. 우리들의 행위로 인하여 그 행위에 걸맞는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이 된 것은 오계를 지키는 등 사람으로 형성될 만한 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지옥이나 축생 등 악처에 떨어진 자들은 악처에 떨어질만한 악업을 했기 때문입니다. 천상에 태어난 자는 보시하고 지계하는 과보로 천상에 태어난 것이라 합니다. 이런 행위는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삼행으로 표현 됩니다.

 

신구의 삼업은 구체적으로 십악행으로 표현됩니다. 이를 신구의 삼업으로 분류해보면 신체적인 것으로는 살생, 투도, 사음이고, 언어적인 것으로 망어, 기어, 악구, 양설이고, 정신적인 것으로 탐애, 진애, 치암입니다. 여기서 치암은 초기경전에서는 사견(私見: diṭṭhi)으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사견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명확하게 정의해 놓았습니다. 부처님이 쌀라마을에 갔을 때 장자가 “세존이신 고따마여, 어떠한 원인 어떠한 조건으로 어떠한 뭇 삶들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까? 세존이신 고따마여, 어떠한 원인 어떠한 조건으로 어떠한 뭇 삶들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납니까?”라고 물어 봅니다. 이에 부처님은 사견에 대하여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보시도 없다. 제사도 없다. 공양도 없다. 선악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흘연히 태어나는 뭇삶도 없다.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고 올바로 실천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곧바로 알고 깨달아 가르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라고 전도된 견해를 갖습니다.”(M41)라고 설했습니다.

 

천수경에서는 치암암중죄금일참회(痴暗重罪今日懺悔)’라 하여 단지 어리석은 죄업 지은 것을 참회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치암(痴暗)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단멸론적 허무주의를 말합니다. 몸이 부서지면 정신도 흩어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견해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삿된 견해를 말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부처님이 설한 업과 업의 과보의 법칙에 어긋납니다. 한마디로 연기법에 어긋난 것이 부처님 당시 외도들의 사상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업과 업의 과보에 위배 되는 모든 사상과 종교는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견을 가지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M41)라 했습니다. 부처님의 업과 업의 과보에 어긋나게 말하는 것은 모두 사견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몸은 괴로워하여도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신구의 삼행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현재의 행위가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미래의 운명을 바꾸어 나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에 저지른 행위에 의하여 현재의 과보를 받고 있긴 하지만, 불교가 운명론이나 숙명론일 수 없는 것은 신구의 삼행에 따른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의지입니다. 지금 신구의 삼행에 따라 얼마든지 운명을 바꾸어 나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신구의삼행으로 설명한 것은 우리 몸과 마음을 잘 분석한 것에 따른 것입니다. 마치 오온에 대하여 색, , , , 식 이렇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분석적으로 설명 해 놓았듯이,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의 행위에 대해서도 신체적인 것, 언어적인 것, 정신적인 것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만일 부처님이 세 가지 중에 오로지 하나만 설했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중국조사들의 가르침처럼 분별하지말라라고 언어적인 것 또는 정신적인 것 한가지만 강조했을 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신구의 삼행이라는 세 가지로 설하였기 때문에 하나가 잘못 되더라도 나머지 것이 보완 되어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씀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든다면 상윳따니까야 나꿀리삐따의 경(S22.1)’을 들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중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한 장자 나꿀리삐따에게 그대는 이와 같이 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S22.1)라고 법문을 해 주었습니다. 신체적인 괴로움이 정신적인 괴로움으로 전이 되지 말아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울 때 정신적으로 괴로움을 겪기 때문에 화살을 두 방 맞는다고 합니다. 육체적인 괴로움이 제1의 화살이라면, 정신적인 괴로움은 제2의 화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2의 화살을 맞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신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 장자 나꿀리삐따에게 이런 법문을 해줍니다.

 

 

장자여, 이 세상에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들은 고귀한 님을 보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리고, 참사람을 보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서, 의식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의식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나는 의식이고 의식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의식이고 의식은 나의 것이다.’ 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지만, 그 의식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 의식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장자여, 이렇게 하면 몸은 괴로워하여도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는 것입니다.”(S22.1)

 

 

오온 중에 의식에 대한 것입니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유신견입니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했을 때 신체적인 괴로움이 정신적인 괴로움으로 전이되어 제2의 화살을 맞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제2의 화살을 맞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화살의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사람을 화살로 찌르고 또한 그를 두 번째의 화살로 찔렀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그렇다면 그는 두 개의 화살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수행승들이여, 바로 이와 같이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괴로운 느낌과 접촉하면 우울해지고 피곤해하며 슬퍼하고 통곡하며 미혹에 빠진다. 그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두 가지 종류의 고통을 느낀다.(S36.6)라고 말씀했습니다.

 

부처님은 신구의 삼행이 서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말했습니다. 신구의 삼행이 별개의 것이지만 서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마치 관절이 엮어져 있는 것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신체에 병이 생기면 그 영향으로 정신적으로도 고통을 받을 수 있는데 서로 별개의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영향을 배제할 수도 있다는 가르침이 몸은 괴로워하여도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는다.’라든가 1의 화살은 맞을지언정 제2의 화살은 맞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일 것입니다.

 

우울증에 걸린 자에게

 

우울증에 걸린 자가 있습니다. 이는 정신적인 현상입니다. 우울증에 걸린 자에 대한 치료방법중의 하나는 걷게 하는 것입니다. 밖에 나가서 맑은 공기와 함께 산책하다 보면 우울증은 자연스럽게 나아 질 수 있습니다. 또 우울증에 걸린 자에게 독경을 한다든가 주문을 외게 하면 역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신적인 문제를 신체적인 것 또는 언어적은 것으로 치유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누군가 오로지 신체적인 행위 하나만 이야기한다면 지옥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살생을 한 자가 살생을 했기 때문에 지옥에 갈 것이라 한다면 그는 영원히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신체적 행위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언어적인 행위, 정신적 행위도 동시에 설했습니다. 신체적으로 중병에 걸린 자라도 몸은 괴로워하여도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는다.’라하여 정신적인 행위로 치유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역으로 정신은 괴로워하여도 몸은 괴로워하지 않는다.’라 하여 우울증에 걸린 자가 운동을 통하여 해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구의 삼행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설령 한 쪽이 잘못되어도 다른 것으로 고쳐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나 사상과 달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입니다.

 

조건 발생된 것임에도

 

궁극적으로 신구의삼 업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선업이든 불선업이든 결국 재생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세생생 윤회하려거든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을 지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업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입니다. 행위를 하되 그 행위가 과보로 산출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작용심(作用心: kiriya-citta)’이라 합니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입니다. 어떤 선업이나 불선업도 짓지 않는 마음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라한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행위를 하되 그 행위가 과보를 낳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병실의 경(S36.7)’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방일하지 않고 성실하게 정진할 때에 즐거운 느낌이 생겨나면, 그는 이와 같이 ‘나에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다.’라고 분명하게 안다. 그것은 조건적이지 조건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이 몸을 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이 몸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며 조건적으로 생겨난 이 몸을 원인으로 생겨난 즐거운 느낌이 어떻게 향상할 것인가? 그는 몸에 관하여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한다. 그는 몸에 관하여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하면, 몸에 관한 그리고 즐거움에 느낌에 대한 탐욕의 경향을 버리게 된다.”(S36.7)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입니다. 괴로운 느낌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도 역시 그것은 조건적이지 조건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라고 알아야 할 것입니다. 조건 발생된 것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어 있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은 오래 가지 못함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병이 난 자들은 육체적 괴로움에 괴로움을 자아로 여겨 정신적인 고통을 느낍니다. 하지만 괴로움 그 자체는 조건 발생된 것일 뿐 괴로움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느낌을 관찰하면 탐욕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고 했는데 분노와 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빠라마수카(parama sukha), 완전한 행복

 

경에서는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하라고 했습니다. 괴로움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지금 행복한 자들이 느끼는 이 행복감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발생된 것이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에 지나지 않아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행복은 어떤 것일까요? 어떤 조건에도 구애 받지 않은 영원한 행복은 아마 열반일 것입니다.

 

법구경에서도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 parama sukha)(Dhp.204)라 했습니다. ‘최상의 행복(parama sukha)을 성취하려면 신구의 삼업을 지멸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현생에서도 가능한 것이라 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까마부의 경(S41.6)’에 따르면 “장자여, 들이쉬고 내쉬는 것은 신체적인 것이고 이것들은 몸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들이쉬고 내쉬는 것은 신체적 형성입니다. 장자여, 먼저 사유하고 숙고한 뒤에 언어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사유와 숙고는 언어적 형성입니다. 지각과 느낌은 정신적인 것이고 이것들은 마음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각과 느낌은 정신적 형성입니다.(S41.6)라 했습니다.

 

까마부의 경에 따르면, 신체적 형성은 호흡(ānāpānasati)에 대한 것이고, 언어적 형성은 사유와 숙고(vitakka vicāra) 에 대한 것이고, 정신적 형성은 지각과 느낌(saññā  vedanā)에 대한 것입니다. 모두 선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차례로 지멸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Saññāvedayitanirodha samāpajjantassa kho gahapati bhikkhuno vacīsakhāro pahama nirujjhati, tato kāyasakhāro, tato cittasakhāroti.

 

“장자여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에게는 언어적 형성이 먼저 소멸하고 그 다음에 신체적 형성이 소멸하고 그 다음에 정신적 형성 이 소멸합니다.(S41.6)

 



 

신구의 삼행중에 지멸되는 순서는 언어적, 신체적, 정신적인 것입니다. 언어적인 것은 사유와 숙고에 대한 것으로 2선정에서 없어지고, 신체적인 것은 호흡에 대한 것으로 4선정에서 없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정신적인 것은 지각과 느낌에 대한 것으로 상수멸정에서 없어집니다. 이렇게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히 소멸되었을 때, 이러한 상태에 대하여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nibbāna parama sukha)(Dhp.204)라 했을 것입니다. 빠라마수카(parama sukha), 완전한 행복입니다.

 

 

 

2017-10-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