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중생(無緣衆生) 우빠까(Upaka)는 왜 부처님의 제자가 되지 못했을까?
어떤 모임이나 단체, 회사에 들어가면 “잘 오셨습니다.”라며 환영합니다. 절에서라면 “참 좋은 인연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있어서도 인연을 강조합니다. 접촉이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우연이라기 보다 ‘필연(必然)’으로 보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부부간간의 인연, 부모자식간의 인연, 친구간의 인연, 사제간의 인연 등에 대하여 수 백, 수 천 생의 만남이 작용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연이 선연(善緣)되도록
인연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선연(善緣)도 있지만 악연(惡緣)도 있습니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만났다면 악연이 작용한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라는 말이 있듯이, 꺼리고 싫어하는 대상을 피할 수 없는 곳에서 공교롭게 만날 수 있습니다.
부부사이가 좋지 않다면 전생의 원수이기 쉽상이라고들 말합니다. 전생의 원수갚기 위해서 부부사이의 인연이 맺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모자식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식이 속썩일 때 전생타령하는 것도 악연으로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악연입니다. 반면 아내가 관세음보살처럼 잘 살펴 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또 자식이 효도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은혜갚기 위해서 연을 맺었다고들 말합니다. 선연입니다.
부처님과의 인연
수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살아 갑니다. 이왕 인연을 맺은 것 악연이 아닌 선연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인연 중에서 아마 최고의 인연은 부처님과의 인연이 아닐까합니다. 부처님이 지금 계시지는 않지만 경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빠알리니까야를 접하면 부처님 그분을 면전에서 뵙는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다면 부처님 그분을 친견했을지 모릅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과의 인연 맺는 수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제자와 신도들 뿐만 아니라 외도들도 있고 왕도 있고 일반사람들도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 그분을 뵘으로 인하여 인격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을 180도 바꾸어 새로운 인생을 살아 간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과의 인연이라면 여러 우주기에서 한번 일어날까 말까한 대사건일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과의 큰인연을 놓친 사람이 있습니다. 외도 수행자 우빠까(Upaka)입니다.
사명외도(邪命外道) 우빠까이야기
우빠까는 사명외도(邪命外道)라 불리우는 아지비까(ājivika)교도이었습니다. 사명외도란 ‘잘못된 생활을 영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막칼리 고쌀라가 이끌던 강한 의미의 운명론자이자 결정론자들로서 벌거벗고 다니는 유행자였다고 합니다.
우빠까는 부처님을 처음 만난 사람입니다. 부처님이 성도하고 난 후 이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수행자를 찾아 떠나던 길이었습니다. 우빠까는 부처님을 보고서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맑고 피부색은 청정하다. 벗이여, 그대는 누구를 의지하여 출가하였으며, 그대의 스승은 누구인가, 누구의 가르침을 즐겨배우는가?”(M26)라 물었습니다. 맛지마니까야 ‘고귀한 구함의 경(M26)’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사부니까야에서는 우빠까가 이 경에 딱 한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우빠까이야기는 율장대품에도 병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율장대품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에 대한 이야기’편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사함빠띠의 청원으로 법을 설하기로 결정하고 가장 먼저 스승을 찾아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율장대품에서는 하늘사람이 알려 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늘사람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알랄라 깔라마는 죽은 지 이미 칠일 되었습니다.”(Vin.I.7)라 했고, 웃다까 라마뿟따에 대해서는 “세존이시여, 웃다까 라마뿟따는 지난 밤에 죽었습니다.” (Vin.I.8)라 했습니다.
부처님의 이전 스승들, 즉 알랄라 깔라마와 웃따까 라마뿟따가 살아 있었다면 부처님의 깨달음을 처음 듣는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하늘사람이 죽었다고 다소 신화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 부처님은 방향을 바꾸어 오비구를 찾아 떠납니다. 함께 수행 했기 때문에 심오한 깨달음에 대하여 이해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길을 가는 도중에 외도 우빠까를 만난 것입니다.
아지비까(ājivika)교도들은
우빠까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부처님의 감관이 매우 맑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대의 감관은 맑고 피부색은 청정하다”라 했습니다. 왜 이렇게 말 했을까요? 그것은 사명외도라 불리우는 아지비까 교도의 삶의 방식과 관련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아지비까교도들은 일종의 숙명론자이자 동시에 무인론자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도덕불감증론자들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명외도라 말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명(邪命)이라는 말은 ‘삿된 생활’을 말합니다. 왜 삿된 생활인가?
아지비까교도들은 사명외도라고 비난 받았습니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행위와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무작설(無作說: akiriya) 이라 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A3.61)’에 따르면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무작설이 있습니다.
1) 숙작인설(pubbekatahetūvāda)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sabbaṃ taṃ pubbekatahetū)
2) 존우화작설(issaranimmāṇahetuvāda)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sabbaṃ taṃ issaranimmānahetū)
3) 무인론(ahetuavāda)
그 모든 것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만들어진 것이다.
(sabbaṃ taṃ ahetuappaccayā)
이 세 가지 중에 아지비까에 관계되는 것이 숙작인설과 무인론입니다. 세 가지 대표적인 외도의 견해 중에 두 가지가 포함된 것이 아지비까의 견해입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아지비까교도의 스승이라 볼 수 있는 막칼리 고쌀라에 대하여 “막칼리 고쌀라의 가르침을 최악이라 한다.”(A3.135)라 했습니다. 그 표현이 어느 정도이었냐 하면 “머리털로 만든 옷은 추위 속에서 춥고 더위 속에서 덥고, 추하고 냄새가 나고 거친 감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A3.135)라 하여, 막칼리 고쌀라의 견해를 머리털로 만든 옷으로 비유했는데 이는 매우 혐오스로운 견해임을 말합니다.
아지비까에 대하여 사명외도라고도 하고 도덕부정론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숙명론과 무인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고쌀라의 결정론이 유물론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고쌀라는 모든 사건의 원인과 결과들이 강하게 결정되어 있는 것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모든 사건들이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운명지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운명은 신들의 힘과 권능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노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너무 극단적인 결정론은 무조건적 결정론으로 무인론(無因論, ahetuvada)이며, 결과적으로 무인무연론(無因無緣論)이 될 수 밖에 없었다.”라 했습니다.
숙명론(pubbekatahetūvāda)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에서 보는 숙명론과 무인론은 어떤 것일까? 먼저 숙명론에 대한 것을 보면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A3.61)라 했습니다. 모든 것을 전생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는 자유의지가 없음을 말합니다. 지금 하는 행위 하나 하나가 모두 전생에 지은 업에 따른 것이라면 살인을 저질로도 전생탓으로 돌릴 것입니다. 도둑질을 해도 그렇고 거짓말을 해도 그렇고 음행을 해도 그럴 것입니다. 오계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삶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숙명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정의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들 가운데 한 부류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보는데, 나는 그들에게 접근해서 이와 같이 ‘존자들이여, 그대들이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본다는데, 그것이 사실인가?’라고 말한다. 내가 질문하면 그들은 ‘그렇다’고 동의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존자들이여, 그렇다면 사람들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이간질을 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욕지거리를 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꾸며대는 말을 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탐욕스럽더라도 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분노하더라도 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잘못된 견해를 지니더라도 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전생의 행위가 결정적인 것이라고 고집한다면, 그들에게는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나 정진이 없는 셈이다. 그들에게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진실로 확실히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새김을 잃게 되고 수호를 잃게 되는데, 자신을 수행자라고 칭할 타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A3.61)
부처님은 수행자에 대하여 명확하게 정의했습니다. 수행자라면 해야 할 것은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사정근에 해당됩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노력의 경(A4.69)’에 따르면 제어, 버림, 수행, 수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정근의 요지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생겨나지 않도록 하고(制御), 이미 생겨난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은 버리도록하고(버림), 아직 생겨나지 않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은 생겨나도록 하고(修行), 이미 생겨난 착하고 건전한 것들은 유지(守護)”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숙명론자들에게는 이러한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감관을 수호하지 않고 늘 알아차리지 않는데 수행자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숙명론자들은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모두 전생탓으로 돌리고 맙니다. 경에서와 같이 살인을 해도 전생탓이고 거짓말을 해도 전생탓입니다. 자신의 자유의지라고는 손톱 끝만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두 전생탓으로 돌렸을 때 도덕적 삶은 불가능합니다.
한국불교 신도들 중에서도 전생탓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일이 잘 안풀릴 때 라든가 사고가 났을 때 전생탓이라 합니다. 심지어 사고 난 것에 대하여 “그만하면 다행이지. 액땜 했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말합니다. 한국의 불교인들 상당수가 어쩌면 숙명론을 믿는 아지비까교도들일지 모른다고 생각해봅니다.
아지비까 교도들은 강한숙명론자들입니다. 모든 것이 전생의 행위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볼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극단적인 결정론은 또 한편으로 무인무연론(無因無緣論)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생명을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더라고 전생에서 결정된 것이라면 원인이 없고 조건이 없는 것이 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더라도 전생에서 결정 된 것이라면 역시 원인도 없고 조건이 없는 것이 됩니다. 참으로 무책임한 삶입니다. 오계를 지키지 않는 삶입니다. 오계를 지키지 않는 삶이기 때문에 아지비까에 대하여 ‘도덕부정론’이라 하며 또한 삿된 생활을 영위한다 하여 사명외도(邪命外道)라 합니다.
감관이 맑고 청정한 것을 보고
부처님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이 바로고 원만한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을 얻었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것을 알리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것을 시험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도중에 만난 사람이 우빠까이었습니다.
우빠까는 부처님을 보자 감관이 너무 맑고 청정한 것을 알았습니다. 아지비까교도인 자신과 비교 되었을지 모릅니다. 사명외도 또는 도덕부정론자 소리를 듣는 아지비까 교도들은 말은 수행자라 하지만 수행자라 볼 수 없습니다. 그런 모습이 감관이 맑고 청정해 보이는 부처님과 대비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뜸 묻는다는 말이 ‘그대의 스승은 누구인가?’였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합니다.
“나는 일체를 극복한 자 일체를 아는 자이다.
일체의 사실에 오염되지 않았고
일체가 버려졌고 갈애가 부수어져 해탈되었다.
스스로 곧바로 알았으니 누구를 스승으로 삼으랴?”(M26, Vin.I.8)
부처님은 스승없이 스스로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그와 유사한 것도 없고 천상과 인간의 세계에서 나와 견줄만한 이 없네.” (M26, Vin.I.8)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을 ‘일체를 아는 자(sabbavidū)’라 하여 ‘일체지자(一切知者)’라 합니다. 일체지자로서 부처님은 주석에 따르면 “네 가지 세계의 모든 것들, 즉 세간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欲界), 미세한 물질계(色界), 비물질계(無色界)와 출세간을 이해한다”(Dhp.A.IV.73)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세간의 삼계와 출세간을 모두 아는 일체지자라 했습니다. 이렇게 선언한 부처님에 대하여 우빠까는 “벗이여, 무한승리자가 될만하다고 자인합니까?”리고 묻습니다. 아마 반신반의 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무한승리자 (anantajina)’라는 말은 주석에 따르면 ‘열반을 얻은 자’라는 뜻입니다.
서로 다른 번역을 보고
우빠까는 부처님을 반신반의 했습니다. 겉모습으로 보아서는 감관이 맑고 청정해보이지만 정말 깨달은 자인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중에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을 알아 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명외도 또는 도덕부정론이라는 소리를 듣는 아지비까 교도 우빠까가 보기에 정말 이사람의 말을 믿어야 할지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벗이여, 무한승리자가 될만하다고 자인합니까?”라고 물어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하여 초불연 번역에서는 “도반이여, 그대가 선언한 바와 같이 그대는 무한한 승리자가 되기에 접합합니다.”라 하여 긍정문으로 번역했습니다. 과연 어느 번역이 맞을까요?
관련 구절에 대한 빠알리어는 “ ‘Yathā kho tvaṃ āvuso paṭijānāsi anantajino’ti?”라 되어 있습니다. 원문에는 의문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에 전재성님은 “벗이여, 무한승리자가 될만하다고 자인합니까?”라고 ‘의문문’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초불연 대림스님은 “도반이여, 그대가 선언한 바와 같이 그대는 무한한 승리자가 되기에 접합합니다.”라 하여 ‘긍정문’으로 번역했는데 전재성님의 번역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면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빅쿠보디의 맛지마니까야 번역서를 찾아 보니 “By your claims, friend, you ought to be the Universal Victor”라 되어 있습니다. 번역하면 “친구여, 네가 주장한바에 의하면 너는 우주적 승리자임에 틀림 없다”라는 뜻이 됩니다. 초불연 대림스님역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빠알리원문에는“‘Yathā kho tvaṃ āvuso paṭijānāsi anantajino’ti?”라 되어 있어서 분명히 의문문입니다.
초불연 번역대로 우빠까가 부처님을 일체지자, 승리자, 깨달은 자로 알아 보았다면 부처님에에서 떠나지 말았어여 합니다. 그러나 우빠까는 부처님을 떠나고 맙니다. 부처님이 “번뇌가 부수어지면 그들도 나와 같은 승리자가 되리. 악한 것을 정복하여, 우빠까여, 나는 승리자가 되었네.” (M26, Vin.I.8)라며 다시 한번 확인 시켜 주지만 우빠까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빠까가 마치 부처님을 무한승리자로 추인한 것처럼 번역한 초불연과 빅쿠보디의 번역에는 오류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인연없는 중생은 제도하기 힘들다고 하는데
우빠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빠까가 가르침을 받아 들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봅니다. 삿된 생활을 하는 아지비까교도에게 수행이나 정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사함빠띠가 청원할 때 망설였습니다. 부처님은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차라리 설하지 말아야지.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이해하기 어렵다.” (M26, Vin.I.8)라 했습니다. 아마 우빠까 수준에서는 받아 들여지기 힘들었을지 모릅입니다. 시절인연이 되지 않은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빠까는 “벗이여, 그럴지도 모르겠지요”라고 말하고 머리를 흔들고 샛길로 사라졌다고 경전에서는 묘사되어 있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인연없는 중생은 제도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우빠까가 대표적인 케이스라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처음 만나서 부처님의 제자가 될 절호의 찬스가 될 수 있었으나 인연이 되지 않은 것은 외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차라리 아무런 사상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면 스승으로 모셨을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ye sotavante pamuñcantu saddhaṃ)” (M26, Vin.I.8)라고 했습니다. 이말은 “이문에 들어오려거든 알음알이를 내려 놓아라”는 입차문래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는 문구를 연상하게 합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접하고자 하는 자의 자세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앙이나 사상체계를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빠까는 자신이 신봉하는 아비지까의 견해를 내려 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라며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끄덕 또는 좌우로 흔들며 가던 길을 간 것입니다.
눈 밝은 자는 도인을 알아본다
인연없는 중생을 무연중생(無緣衆生)이라 합니다. 무연중생의 대표주자라면 단연 우빠까를 들 수 있습니다. 이제 막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을 처음 만난 인연을 가졌으나 그 인연을 놓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인연이라도 준비 되어 있지만 인연이 맺어질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것은 사람 보는 안목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눈이 밝은 자는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눈이 밝지 않은 자는 부처님이 앞에 있어도 알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을 못알아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드러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테라가타에서는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 (Thag.501)라 했습니다.
도인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 밝은 자는 도인을 알아 봅니다. 인연없는 중생의 대명사 우빠까는 부처님의 감관을 보고서 몇 가지 물어 보았습니다. 부처님은 이에 당당하게 ‘일체지자’라고 또 ‘무한승리자’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반신반의한 우빠까는 “그럴지도 모르지요”라며 애매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라졌습니다. 정말 우빠까는 부처님과 인연이 없었던 것일까요?
2017-10-2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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