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갈래 깨달음의 길에서
우리는 본래 깨달은 존재라 하는데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끊임 없는 논란거리입니다. 선사들은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 합니다. 본래불(本來佛)사상입니다. 우리는 본래 깨달은 존재인데 깨달은 존재라는 것을 몰라보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본래 우리가 깨달은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깨달음의 과정이라 합니다. 그 과정으로 대신심(大信心), 대의심(大疑心), 대분심(大憤心)을 이야기합니다.
대신심이라는 것은 내가 본래 부처임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선종에서는 정견이라 합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사성제를 아는 것을 정견이라 하지만 선종에서는 자신이 본래 부처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신심이 없다면 다음 단계는 진행될 수 없습니다. 내가 본래 부처라는 믿음이 확고해야만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모든 종교에서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특히 유일신교에서는 무조건적 믿음을 강조합니다.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에 대한 의문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설령 신에 대한 의문이 가더라도 믿어야만 그 다음 단계가 진행됩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본래부처임을 믿는 대신심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흔들림 없이 믿어야 합니다. 다음 단계는 내가 본래 부처임을 증명하는 단계입니다. 이를 대의심과 대분심으로 설명합니다. 대의심은 ‘생각 이전으로’ 돌아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뭐꼬?’, ‘판치생모’ 등 화두를 듭니다. 생각이전으로 되돌아 가기 위한 일종의 말의 도구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숭산선사는 “오직 모를뿐!”이라 했습니다.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의정을 키워 어느 순간 폭발했을 때 돈오적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 합니다. 이를 화두타파라 합니다. 생각 이전의 본래 자신으로 되돌아 가는 것, 자신이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는 것, 자신이 본래 깨달은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말로 개념 지어진 것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라 합니다.
대신심과 대으심, 그리고 대분심을 간화선의 3요체라 합니다. 대분심은 내가 본래 부처임에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본래불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의정을 키워 가지만 확철대오하는 돈오적 깨달음이 오지 않을 때 좌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왜 깨닫지 못하는가?’라는 마음과 함께 용맹정진하는 것에 대하여 대분심이라 합니다.
꼰당냐가 깨달은 순간을 보면
선종에서는 생각이전으로 돌아가 자신이 본래 깨달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이와 다릅니다. 이는 ‘초전법륜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S56.11)’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로 포섭된다는 말이 있듯이, 초전법륜경은 모든 경전을 포섭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성제입니다. 또 다른 말로 연기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콘당냐는 부처님의 사성제에 대한 설법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의 순간을 묘사한 장면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pañcavaggiyā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Imasamiñca pana veyyākaraṇasmiṃ bhaññamāne āyasmato koṇḍaññassa virajaṃ vītamalaṃ dhammacakkhuṃ udapādi: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다섯 명의 수행승들은 세존의 말씀에 환희하고 기뻐했다. 또한 그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S56.11)
꼰당냐가 깨달은 순간입니다. 부처님이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방법에 대하여 설하자 콘당냐에게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고 했습니다. 이는 아는 것과 다릅니다.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입니다. 선종에서는 우리가 깨달은 존재라 하여 깨달은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 깨달음이라 하지만 꼰당냐는 없던 지혜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dhammacakkhuṃ udapādi)”라 한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라는 말입니다.
꼰당냐가 깨달은 것은 생멸법(生滅法)입니다. 달리 말하면 연기법입니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하는 연기법의 이치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는 부처님의 깨달음과 동일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오비구에게 시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의사가 자신의 이론을 임상에 적용한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연기법을 오비구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다섯명 중에 한명에게서 진리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마치 병아리를 부화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미닭이 알을 품어 주지만, 먼저 낳은 알과 관계없이 알 껍질을 먼저 깨고 나온 병아리가 있습니다. 꼰당냐가 그런 케이스에 해당될 것입니다.
왜 돈오돈수(頓悟頓修)라 하는가?
꼰당냐의 깨달음을 일반적으로 견도(見道)라 합니다. 진리의 문에 들어선 것입니다. 궁극적 진리의 맛을 본 것입니다. 이를 수다원단계, 즉 성자의 흐름에 들어선 단계로 봅니다. 그러나 완전한 깨달음의 이르기까지는 여정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남아 있는 번뇌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설령 견도의 단계에서 열반과 같은 궁극적 경지를 맛 보았다고 할지라도 탐욕과 성냄 등 마음의 오염원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런 오염원을 소멸시킬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를 수행도(修行道)라 하여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라 합니다.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은 크게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합니다. 견도, 수행도, 무학도입니다. 이와 같은 단계적인 깨달음은 초기불교의 특징입니다. 돈오는 있지만 돈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오점수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이“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는 점차적인 배움, 점차적인 실천, 점차적인 진보가 있지 궁극적인 앎에 대한 갑작스런 꿰뚫음은 없다.”(Ud.51,A8.19)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돈오점수입니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음을 말합니다. 처음 견도의 단계에서는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 하여 생멸법을 아는 것이지만, 이런 생멸법, 즉 연기법을 알아 남아 있는 번뇌를 모두 소멸 되었을 때 깨달음은 완성됩니다. 그때 다음과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스스로 선언하게 됩니다. 이것을 ‘아라한선언’이라 합니다. 앞서 언급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말에 대해서는 ‘수다원선언’이라고도 합니다.
불교적 깨달음이란?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잘 압니다. 나에게 어느 정도 탐욕이 남아 있는지,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는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깨끗한지 또는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 자신보다 많이 아는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에게 남아 있는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그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았다.”(Sn3.4)라는 정형구로 표현됩니다. 누가 인가해 주지 않아도 자신의 앎(知)과 봄(見)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아라한 선언에서 ‘해야 할 일’은 “네 가지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知), 버려야 할 것(斷), 깨달아야 할 것(證), 닦아야 할 것(修)을 통해서 열 여섯 가지 해야 할 일” (ThagA.I.155)을 말합니다. 결국 해야 할 일은 사성제를 닦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친 자는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음을 분명히 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깨달음이고 가르침의 완성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환영(幻影)이라고?
수 많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삶의 과정에서도 무수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라는 말이 불교의 전매특허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인들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아마 삶의 과정이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하는 말이라 봅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무엇을 깨달음이라 하는 것일까요? 이런 깨달음에 대하여 깨어남, 깨트림, 꿰뚫음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깨어남이란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꿈꾸다가 잠에서 깨어 났을 때 꿈이 꿈인 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깨어남에 대하여 선종에서는 일체가 환영이라 합니다. 우리는 꿈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현실이 환영인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현실이 환영이라거나 환상이라고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엄연하게 현실을 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수중의 연화의 비유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가 물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 물위로 솟아올라 물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라 했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는 세상에서 성장했으나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에 오염되지 않고 지낸다.”(S22.94)라 했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중생계를 말합니다. 부처님은 중생이 사는 곳에서 태어났지만 탐욕과 분노와 성냄을 특징으로 하는 중생계에 물들지 않았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분명하게 현실을 인정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일체유위법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如夢幻泡影)”이라는 금강경 게송이 있듯이, 이 세상이 단지 꿈에 불과하다며 꿈깨듯이 현실을 꿈속의 세상으로 보아 깨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접하는 현실이 모두인식된 것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심지어 오온에서 색온마저 인식된 것이라 합니다. 이런 개념을 적용하면 십이연기에서 명색(名色)에 대하여 ‘이름’과 ‘형태’로 해석합니다. 이는 우파니샤드철학적 해석에 따른 것입니다.
우파니샤드철학적 해석에 따르면, 이 세상은 모두 언어와 문자로 개념지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은 인식된 것에 불과하고 모든 것은 꿈속과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엄연히 현실을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명색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명색에 대하여 “명색이란 무엇인가? 그것에는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이 있으니 이것을 명이라고 부르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 또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에서 파생된 물질을 색이라고 한다.”(S12.2)라고 명색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된 것이라고 정의해 놓았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현실세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오로지 마음으로 인식된 것이긴 하지만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만 일어나기 때문에 다섯 감각기관으로 접하는 현실 세계가 엄연하게 존재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명색에 대하여 우파니샤드적 해석을 하여 이름과 형태로 보아 이 세상에 대하여 언어와 문자로 개념지어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부처님 가르침과 다릅니다.
야타부따 냐나닷사나(yathābhūta ñāṇadassana), 있는 그대로 앎과 봄
깨달음이라는 말과 동의어로서는 깨어남, 깨뜨림, 꿰뚫음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에 대하여 가장 근사치로 표현한 말이 아마도 여실지견(如實知見)일 것입니다. 이 말은 ‘있는 그대로 앎과 봄’이라는 뜻입니다. 빠알리어로는 ‘야타부따 냐나닷사나(yathābhūta ñāṇadassana)’라 합니다. 초전법륜경에서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imesu catusu ariyasaccesu evaṃ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 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suvisuddhaṃ 뫠냐)”(S56.11)라는 구절로 나타납니다.
사성제를 세 번 굴렸다는 것은 세 번 검증 해 보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렇게 세 번 굴리는 것에 대하여 고성제를 예로 든다면 초전은 “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이고, 이전은 “이 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이고, 삼전은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가 됩니다. 이렇게 사성제에 대하여 세 번 굴리면 열 두가지 형태가 되므로 한역으로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이라 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여실지견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현상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앎(知: ñāṇa)과 봄(見: dassana)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앎과 봄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만약 깨달음이 아는 것으로 그친다면 완전한 깨달음이라 볼 수 없습니다. 앎만 있고 봄이 없다면 마치 장님처럼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에서 녹색불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봄만 있고 앎이 없다면 마치 어린 아이처럼 녹색불의 의미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녹색불이 켜지면 건너야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안심하고 건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한가지라도 결여 된다면 사고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앎과 봄이 그렇습니다.
여실지견은 있는 그대로 앎과 봄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는 무엇을 말할까요? 초기경전에서는 ‘있는 그대로(yathābhūta)’ 라는 말이 수 없이 등장합니다. 대체 무엇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본다는 것일까요? 상윳따니까야 ‘깟짜야나곳따의 경’에 따르면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을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 했습니다. 이 말은 영원주의가 성립하지 않음을 연기의 역관적 조건적 형태로 설명한 것입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을 때 자아와 세상이 영원하다고 착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조건 발생한 것은 조건 소멸하기 때문에 자와와 세상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 관찰했을 때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이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을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 했을 때, 이는 연기의 순관적 조건형태로 관찰한 것이기 때문에 단멸론 적 허무주의가 성립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현상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알고 보았을 때 깨달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적 통찰입니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꼰당냐가 부처님의 사성제에 대한 설법을 듣고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며 진리의 눈이 생겨난 것은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앎과 봄이 일어나는 지혜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꼰당냐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선 것입니다.
여실지견을 불지견(佛知見)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S56.11)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오온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지혜가 생겨나서, 오온이 청정해졌을 때 다시는 윤회하지 않게 됨을 알게 됩니다.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단계를 말합니다. 이런 단계가 되었을 때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라 라는 아라한 선언을 하게 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해탈한 것을 스스로 알고 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해탈지견을 불지견 또는 여실지견이라 합니다. 이것이 불교적 깨달음일 것입니다.
두 갈래의 깨달음의 길에서
한국불교에는 두 갈래의 깨달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조사(祖師)의 깨달음이고 또 하나는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조사의 깨달음은 본래 부처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깨달은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깨달은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본래 깨달은 존재라는 대신심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방법으로는 ‘이뭐꼬?’등 알 수 없는 의심을 하여 생각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달은 사성제를 아는 것입니다.
조사의 깨달음과 부처님의 깨달음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 정견도 서로 다릅니다. 조사들의 정견은 본래불(本來佛), 즉 내가 본래부처임을 아는 것이지만, 부처님은 정견에 대하여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출발점부터 다르다 보니 목적지는 당연히 다르게 됩니다. 이에 따라 수행방법도 다릅니다. 당연히 깨달음도 다릅니다. 불교라는 이름을 같이 사용하지만 알고 보면 전혀 다른 종교입니다. 그래서일까 중국조사의 불교를 ‘조교(祖敎)’라 하는지 모릅니다.
한국불교에는 조교와 불교가 혼재하고 있습니다. 현재 조사불교가 다수이며 대세입니다. 그것은 종단이 선종을 표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가 글로벌화 함에 따라 부처님 원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인터넷시대에 따라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화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남방 테라와다 불교와 그 수행법도 접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조교에서는 생각이전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강조합니다. 무념무상인 상태가 가장 이상적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분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절하거나 뇌사상태에 빠지지 않는 한 생각없이 살 수 없습니다. 저절로 일어나는 생각을 멈출 수도 막을 수도 없습니다. 분별하지 말라는 것은 개념화 하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언어나 말이라는 개념에 놀아나지 말고 생각 이전 자리로 돌아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끊임 없이 알아차리라고 말합니다. 사띠하라는 것입니다.
사띠하라는 것은 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라 볼 수 있습니다. 행위를 하면 그 행위가 시절 인연을 만나면, 즉 업이 익으면 과보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 없이 알아차림을 강조하는데 이는 조사들이 말하는 “분별하지 말라”라는 말과 다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아차려야 하는가?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그렇군요, 그렇네요.”라고 ‘그러려니’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작용만 하는 마음 작용심(作用心: kiriya citta)을 말합니다. 이렇게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선업이든 악업이든 어떤 업도 짓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렇네, 그렇구나”라고 알아 차리는 것을 아라한의 마음이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항상 “사띠(Sati) 하라”고 했습니다.
2017-10-3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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