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 하는데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 합니다. 불교인 이라면 지혜롭게 자비롭게 행위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불교적 지혜는 무엇이고 불교적 자비는 어떤 것일까요?
자아와 이 세상이 항상 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또 즐겁지도 않고 내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라고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무상, 고, 무아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이 어제 같지만, 물론 어법에 맞지 않지만 매일 똑같지는 않습니다. 미세한 변화가 있기에 그날이 그날 같지만 지루하지 않게 살아갑니다.
어느 날 화분에 꽃대가 쑥 솟아 난 것도 변화입니다. 날씨가 사흘이 멀다하고 바뀌는 것도 변화입니다. 마음의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도 변화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몸과 마음은 변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세상도 변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가만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아와 세상은 변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무상의 지혜입니다.
지금 행복한가요?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감각적 쾌락에 목숨을 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습니다. 조건이 바뀌면 행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집니다. 감각적 행복은 단지 느낌에 지나지 않습니다. 행복이 아니라 “행복감”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금 죽어도 좋아!”라며 감각적 쾌락에 목숨을 겁니다.
감각적 욕망에 속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조금 있으면 사라지고 말 욕망에 목숨 걸었을 때 남는 것은 고통밖에 없습니다. 특히 나이 든 자가 욕망에 몰두했을 때 얻는 고통은 매우 큽니다. 이럴 때 “짧은 쾌락 긴 고통”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에서는 늘 감각의 대문을 단속하고, 음식절제를 하고, 깨어있음에 전념하라고 했습니다. 항상 싸띠(sati)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라는 겁니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문구로 정형화 되어 있습니다. 이것에 모든 것을 대입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색, 수, 상, 행, 식, 이라는 오온을 대입합니다.
내몸이 내몸 같지만 내몸이 아니라는 것은 내몸에 대하여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몸의 기능이 예전 같지 않을 때 실감합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마음만 앞설 뿐 몸이 따라 주지 않아 넘어지는 것도 내몸에 대한 통제력이 없음을 나타내주는 명백한 증거일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하고 귀도 잘 안들리고 소화기능도 예전 같지 않을 때,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내것이 아님을 실감합니다. 그래서일까 “젊었을 때는 몸을 부리고 살았으나 늙어서는 몸을 모시고 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을 하인처럼 부리며 젊음의 교만과 건강의 교만을 누리던 자들이 나이가 들어 노년에 이르러 몸을 주인처럼 모시고 몸에 끌려 다니는 삶을 살게 됨을 말합니다.
오온이 내것이 아니라면 생각, 느낌, 감정도 내것이 아닐 겁니다. 지금 행복한 느낌도 당연히 내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불행은? 역시 내것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다반사로 발생하는 행복과 불행, 즉 즐거움과 괴로움은 내것이 아닙니다. 단지 느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호불호(好不好)가 명확합니다. 한번 좋으면 “죽어라 좋아!”라 하고, 한번 싫으면 “죽어라 싫어!”하는 것입니다.
오감을 통해서 감각적으로 느끼는 행복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오래 가지 않아 괴롭습니다. 오래 가지 않아 내것이 아닙니다. 자아와 세상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불교적 지혜입니다. 그런데 지혜는 항상 자비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지혜있는 곳에 자비가 있고, 자비있는 곳에 지혜가 있습니다.
그가 지혜로운지 그가 자비로운지는 그의 행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밥 먹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에게 남아 있는 욕망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젓가락 놀리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가 분노하고 있다면 그는 지혜로운 자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모든 것이 무상, 고, 무아임을 아는 자에게 분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온이 내것이라고 여기는 자는 욕망과 분노에 지배당합니다.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불자라면 어느 경우에서라도 지혜롭게 행위하고 자비롭게 행위해야 함을 말합니다. 지혜있는 곳에 자비있고, 자비있는 곳에 지혜있습니다. 욕망과 분노로 사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욕망과 분노가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지혜로은 자입니다. 그가 지혜로운지 자비로운지는 표출된 욕망과 분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세상을 자애와 연민으로 바라봅니다. 그대는 왜 분노하고 하는가?
2017-10-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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