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나는 거리의 탁발승이 좋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0. 3. 08:36


나는 거리의 탁발승이 좋다

 

 

조계종에서는 승가의 위의(威儀)를 훼손한다고 하여 60년대부터 탁발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적 시골에서 탁발승을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어린 눈에 본 탁발승은 위의가 있어 보였습니다. 집 앞에서 목탁을 치며 주문을 외우면 쌀을 한그릇 퍼 줍니다. 바랑에 담고 공손히 합장하는 모습이 청정해 보이는 얼굴과 함께 위의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일까 어느 스님은 탁발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출가 했다는 말을 방송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안양농수산물시장에서

 

안양농수산물시장에서 탁발승을 보았습니다. 커다란 홀에 각종 어패류를 팔고 있는 안양수산시장은 지역에서 최대규모입니다. 추석을 앞두고 북적이는 시장 한좌판 가게 앞에 탁발승이 목탁을 치며 나직이 주문을 외고 있습니다. 목소리와 차림새로 보아 비구니스님인 듯 합니다. 저잣거리에서 탁발승을 종종 보기는 하지만 이렇게 살생의 현장에서 탁발승을 보기는 처음입니다.

 




불과 사오년전 까지만 해도 탁발승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종교사회에서 한국불교를 망신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어쩌면 탁발승이야말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탁발승의 계행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탁발행위 하는 그 자체는 가장 불교다웠습니다.

 

걸인과 걸식자의 차이는?

 

공원에서, 식당에서, 거리에서 수많은 탁발승을 보았습니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보았던 탁발승처럼 위의는 없어 보였지만 어쩌면 가장 스님다워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걸인과 걸식자(乞士)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상윳따니까야 걸식자의 경에 따르면 어느 바라문 걸식자가 부처님에게 존자 고따마여, 저도 걸식자이고 그대도 걸식자입니다. 우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라고 물어 봅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걸식을 한다고

그 때문에 걸식자가 아니니

악취가 나는 가르침을 따른다면

걸식 수행자가 아니네.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영위하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가

그야말로 걸식 수행승이네.(S7:20)

 

 

걸인과 걸식자의 차이는 청정에 있습니다. 걸식자가 걸인처럼 빌어 먹지만 청정한 삶을 추구하면 걸식수행자, 즉 빅쿠라는 것입니다.

 

수산시장에서 본 탁발승이 청정한 삶을 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걸식자라는 것입니다. 비록 가게 앞에서 목탁을 치며 주문을 외고 있지만 빌어 먹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걸식자, 걸사(Bhikkhu)의 자격이 있는 듯합니다.

 

아유 반노 수캉 발랑(āyu vaṇṇo sukha bala)

 

식당에 탁발승이 들어 오면 주인은 아무 말 않고 천원짜리 한장 쥐어서 보냅니다. 실제로 목격한 것입니다. 한창 바쁠 때 문앞에 서서 목탁치며 주문을 외면 영업방해로 생각해서일 것입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탁발하는 행위는 민폐끼치는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탁발승은 보시자에게 축원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한다면 걸인과 같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축원은 아유 반노 수캉 발랑(āyu vaṇṇo sukha bala)”일 것입니다. 우리말로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시기를!”바라는 축원입니다. 신도들이 공경하는 예를 올렸을 때 장로들이 축복해 주는 축원문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근거가 됩니다.

 

 

Abhivādanasīlissa,

nicca vuḍḍhāpacāyino

Cattāro dhammā vaḍḍhanti,

āyu vaṇṇo sukha bala.

 

“예경하는 습관이 있고

항상 장로를 존경하는 자에게

네 가지 사실이 개선되니,

수명과 용모와 안락과 기력이다.(Dhp.109)

 

 

가장 위대한 축원은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좋은 축복은 장수축복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릿차비 왕자의 경(A5.58)’에서도 다섯 종류의 존재들은 존중하고 공경해 주는 자에 대하여 “오래 사시오. 장수를 누리시오. (cira jīva, dighamāyu pālehī)”라며 축원을 해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장수축원을 해 주는 이유는 목숨이 늘어나면, 목숨과 비례해서 다른 특징들도 개선되기 때문입니다. 예경하는 생활 등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선업공덕 쌓을 기회도 동시에 많아 지는 것입니다.

 

보시를 하면 이 보시공덕으로 도와 과를 이루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반사람이나 신도들에게는 장수축원 만한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다 용모축원, 행복축원, 건강축원까지 해 주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욕망이 개입된 합격축원이나 사업번창 축원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시기를! (āyu vaṇṇo sukha bala)”라는 네 가지 축원일 것입니다.

 

청정한 삶(Brahmacariya)을 위하여

 

거리의 탁발승에 대하여 사오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불교의 위의를 손상시키는 혐오스런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180도 바뀌어 그래도 한국불교에 탁발의 전통이 살아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탁발의 전통이 실종된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은 국민들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축원 해 줄 기회도 없습니다. 오로지 개인적 수행만 하는 소승 중의 소승입니다. 천도재 등 각종 기도비와 입장료수입, 국고보조금 수입에 의존하는 스님들은 탁발하지 않아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거리에서 탁발하는 스님이 오히려 부처님 가르침과 가깝게 산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탁발하는 이유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걸식의 경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 탁발이라는 것은 삶의 끝이다. 이 세상에서 '그대는 바루를 들고 유행한다' 는 것은 저주이다. 수행승들이여, 훌륭한 아들들은 '결코 왕이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고 강도가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다.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는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에 떨어졌다. 괴로움에 떨어져 괴로움에 둘러싸여 있다. 적어도 괴로움의 다발들이 종식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라는 타당하고 합목적적인 이유가 있어 그러한 삶을 영위한다.”(S22.80)

 

 

탁발하는 것이 청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라 했습니다. 만일 스님이 소유하는 삶을 산다면 결코 청정한 삶을 산다고 볼 수 없습니다. 무소유와 청정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탁발에 의존하는 삶이 최선임을 말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거리의 탁발승이 소유하고 있는 스님들 보다 낫습니다.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기는 자

 

탁발의 전통이 사라진 한국불교에서 승가는 타락했습니다. 소유로 인하여 승가내부에서도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진정한 스님이 되려면 걸식해야 합니다. 걸식 했을 때 존경할 것입니다. 거리의 탁발승을 보며 한국불교에도 탁발의 전통이 아직까지 살아 있음을 봅니다.

 

탁발하는 자는 떳떳합니다. 그러나 빅쿠임에도 소유하는 자는 도둑이라 볼 수 있습니다.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Tādisa kamma katvāna

bahu duggatigāmina

Phuṭṭho kammavipākena

anao bhuñjāmi bhojana.

“이와 같이 나쁜 곳으로 이끄는

많은 악업을 짓고

아직 그 업보에 맞닥뜨리지만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긴다.(Thag.882)

 

 

이 게송은 맛지마니까야 ‘앙굴리말라의 경(M86)’의 게송과도 병행합니다. 게송에서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긴다.(anao bhuñjāmi bhojana)”라 했습니다. 이 말 뜻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네 가지 즐김이 있다. 1) 도둑질 한 것을 즐김, 2) 빚진 것을 즐김, 3) 유산의 즐김, 4) 자기 것을 즐김이다. 번뇌가 부수어진 즐김은 자기 것을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부채가 없는 음식을 즐기는 것은 바로 자기 것을 즐기는 것이다.(Pps.III.343) 라 되어 있습니다.

 

수행자는 굶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일을 하지 않고 직업을 가지지 않는 수행자는 굶어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 등 누가 보시해도 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정진하지 않는 자나 계행이 엉망인자가 시물을 받아먹었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주석에 따르면 도둑질한 것을 즐김(theyyaparibhogo)’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밥도둑입니다. 밥 먹을 자격이 없음에도 밥을 얻어먹는 것은 음식을 도둑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부처님 유산으로 알고

 

출가하면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잘 곳이 제공되는데 이는 부처님의 유산이라 볼 수 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유산을 향유할 수 있는 자는 아라한을 제외한 일곱 부류의 ‘유학’이 이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청정도론에 따르면 “거룩한 님은 제외로 하더라도 계행을 지키는 수행승들은 지방에서 특별한 음식에 대하여 부처님의 유산이라고 생각하고 먹었다.”라 했습니다.

 

탁발자는 시주가 보시한 음식물에 대하여 부처님 유산으로 알고 수용합니다. 정법(正法)의 큰 유산을 받은 자가 부채 없이 탁발음식을 즐김을 말합니다. 이를 유산의 즐김(dāyajjaparibhogo)’이라 합니다.

 

도와 과를 이루어야만 당당하게 음식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축원할 수 있습니다. 도와 과를 이루기 전에는 모두 빚진 자들입니다. 소유하고 있다면 도둑놈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국불교에는 도둑들이 너무 많습니다. 탁발도 하지 않을뿐더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많은 재산을 가진 스님들은 도둑들입니다. 큰 도둑보다 길거리의 탁발승이 훨씬 더 낫습니다.

 

 

2017-10-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