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좀 불편하게 좀 가난하게 살자, 자본의 폭주를 당장 멈추어야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1. 24. 12:40


좀 불편하게 좀 가난하게 살자, 자본의 폭주를 당장 멈추어야

 

 

이번 주 정의평화불교연대 불교인문학 강좌는 이도흠 교수의 문명의 지속과 불교의 지혜에 대한 것입니다. 원래 눈부처학교 개강 때 강연하려 하던 것이었으나 사정에 의하여 뒤로 밀린 것입니다. 이번 총 11강에 달하는 불교인문학 강좌의 총론적 성격을 띤 것입니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개막과 함께 과연 호모사피엔스가 이룩한 문명이 지속될 수 있는지, 지속될 수 없다면 불교적 해법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고민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인문학 강좌를 즐겨 보는데

 

인문학 강좌를 즐겨 봅니다. 주로 EBS에서 봅니다. 감명 깊게 본 것은 포항공대 이진우 교수가 강연한 니체, 신이 죽은 시대를 말하다입니다. 또 서강대 최진석 교수의 노자강연도 유익했습니다. 요즘은 케이블 채널에서도 종종 보고 있습니다. 유홍준 교수나 설민석님 등 이 시대의 달변가들이 벌이는 말의 향연을 듣고 있다 보면 저절로 상식이 쌓여 가는 것 같습니다. 또 유튜브에서도 볼 거리가 많습니다. 보고 나면 노트를 하고 반드시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립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누구에겐가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공유합니다.

 

인문학 강연을 보고 듣는 것에 대하여 어떤 이는 그거 들어서 뭣에다 써먹게?”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욕락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돈도 되지 않는 강연을 듣고 글을 쓰는 것에 대하여 시간 낭비, 정력낭비라 생각할지 모릅니다. 또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등 따습고 배부르니 할 짓이 없는 모양이다라 말할지 모릅니다.

 

대부분 오욕락을 즐기며 살아 갑니다. 저녁 시간 TV에서 먹방을 본다든가, 한상 거하게 차려 먹고 마시는 것에 낙을 찾는 자들에게 있어서 인문학강좌는 돈도 안되는 일에 올인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도 보고 듣고 쓸 뿐입니다.

 

백만분의 이()의 가능성을 보고

 

문명은 지속될 것인가? 거대한 담론입니다. 마치 말룽끼야뿟따가 우주는 유한한가, 우주는 무한한가?’라며 물어 보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잘 살고 있음에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염려 하는 것에 대하여 돈도 안되는 일에 몰두 한다고 비웃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미래에 걱정하는 자들은 기후변화 등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의 온 정렬을 바쳐 바꾸어 보고자 합니다. 비록 나비의 작은 날개 짓에 불과할지라도 카오스이론에 따르면 하나의 연()이 되어 폭풍우를 몰고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송위지교수에 따르면 자신은 수험생을 위하여 매일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백만분의 이()의 가능성이라 했습니다. 확률적으로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고시생 등 성원정사와 인연 맺은 수험생을 위하여 기도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가능성이라 합니다. 비록 기도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백만분의 이 불과할지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변화를 초래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카오스이론과 같은 것입니다.

 

4차 산업혁명에 자본이 결합 되었을 때

 

정평불 6차눈부처학교 여섯 번째 강좌는 이도흠 교수의 문명의 지속과 불교적 해법에 대한 것입니다. 과연 미래에 인류문명이 지속될 수 있는지에 대한 거대담론입니다. 이런 의문은 4차 산업혁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좋든 싫든 4차 산업혁명시대로 갈 수밖에 없는데 현재와 같은 체제가 유지된다면 인류의 미래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와 같이 자본주의, 그것도 신자유주의 입각한 자본주의가 4차 산업혁명시대에도 계속 된다면 문명의 종말은 물론 인류의 종말로 귀결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도흠 교수에 따르면 4차 산업혁명시대가 신자유주의에 따른 자본주의와 결합 했을 때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라 합니다. 한마디로 지옥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현재 소수의 자본가들이 부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는 1% 99%의 시대입니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가 4차 산업혁명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면 0.1% 99.99%의 시대가 되어 지옥과 같은 삶이 될 것이라 합니다.

 

영화 트렌센던스(Transcendence, 2014)를 보고

 

4차 산업혁명시대는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아무도 막을 수 없을 듯합니다. 여기에 자본이 결합되면 더욱 가속이 붙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요즘 케이블 영화채널을 보면 인공지능에 대한 것을 주제로 하는 영화가 많습니다. 그런 영화 중에 트렌센던스(Transcendence, 2014)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아침에 우연히 보았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채널을 돌리다가 시선이 고정 된 것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류의 장르는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뇌를 스캔하여 컴퓨터로 다운로드 한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죽었지만 기억은 살아 있는 강인공지능이 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네트워크에 연결되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스스로 진화하는 것입니다. 이를 우려한 사람들은 바이러스를 네트워크에 투입하여 무력화를 시도합니다.

 




에이아이(A.I)관련 영화를 보면 미래는 비관적입니다. 강인공지능의 시대가 되었을 때 호모사피엔스는 무력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에너지만 공급되면 영원히 사는 기계와의 대결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미래에는 호모사피엔스시대가 가고 새로운 반인간반기계와 같은 새로운 인류가 출현할 것이라 합니다. 과연 이것이 유토피아일까요 아니면 디스토피아일까요?

 

지금 당장 멈추어야

 

영화에서 보는 미래는 디스토피아입니다. 공통적으로 거대자본의 개입 되어 있습니다. 탐욕의 자본이라 볼 수 있습니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본을 말합니다. 탐욕의 자본가가 마치 봉건 영주시대처럼 로보트를 많이 가지고 있다면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됩니다. 또한 유전자조작 등을 하여 생명을 무기로 갖는 자본가도 탄생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4차 산업혁명시대에도 여전히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가 된다면 디스토피아, 지옥이 될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래서일까 이도흠 교수는 강연에서 여기서 멈추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성찰하고 지속 가능한 실천을 하지 않으면 인류는 머지않아 사멸하거나 인조인간이나 디지털인간으로 대체되는 임계점에 와 있다. 우리는 지금 종점을 내다보며 일단 멈추어서 진지하게 성찰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라 했습니다.

 

멈추면 보입니다. 멈추어서 옆도 보고 뒤도 돌아 보면 잘 보입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멈추라고 했습니다. 연쇄살인마 앙굴리말라에게 앙굴리말라여,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M86)라 했습니다. 오로지 앞만 보고 마치 폭주하는 기관처럼 미쳐 날뛰는 살인마에게 멈추라고 한 것입니다.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멈추었습니다. 부처님이 앙굴리말라여,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 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 (M86)라며 멈추기를 말한 것입니다.

 

폭주하는 자를 쉽게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신통을 행사했습니다. 경에 따르면 그때 세존께서는 초월적인 힘을 행사하여 흉적 앙굴리말라는 온 힘을 다해 달려도 보통 걸음으로 걷고 있는 세존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M86)라고 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을 죽이려고 힘껏 내달렸지만 마치 런닝머신에서 달리기 하듯이 제자리 걸음만 한 것입니다.

 

연쇄살인마 앙굴리말라는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제자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예전의 앙굴리말라가 아니었습니다. 성자가 된 앙굴리말라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예전에는 방일하여도

지금은 방일하지 않는 자,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저질러진 악한 일을

선한 일로 덮으니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차럼.”(M86)

 

 

멈추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잘 보입니다. 앙굴리말라는 멈추고 통찰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이라 했습니다. 멈추어서 대상이 집중 했을 때 지혜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선정을 닦아라.”(Dhp.371)라 했습니다. 선정을 닦으면 지혜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멈추면 보입니다. 보이면 관찰하게 됩니다. 멈춤()과 통찰()입니다. 그것은 생겨나고 사라짐에 대한 관찰입니다. 모든 현상이 무상하고,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고, 무상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라 했습니다.

 

일곱 개의 태양의 출현했을 때

 

미래를 암울하게 하는 것 중에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후변화에 대한 것입니다. 지구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유엔에서는 1994년 모든 온실가스의 인위적 방출을 규제하기 위한 협약이 발효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현재와 같이 화석연료나 원자력 등에 의존하여 마구 에너지를 낭비한다면 지구는 뜨거워져서 인류는 멸망하게 될지 모릅니다. 만일 지금과 같이 미래에도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면 기후변화에 따라 재앙과 재난이 끊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보면 우주가 뜨거워져서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일곱 개의 태양의 출현에 대한 경(A7.66)’이 있습니다. 우주의 괴겁기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괴겁기가 되면 하늘에 태양이 두 개 떠 오르게 됩니다. 당연히 대지는 뜨거워집니다. 그런데 세 개, 네 개, 다섯 개 의 태양이 차례로 떴을 때 물이 말라 버려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립니다.

 

하늘에 여섯 개의 태양이 출현 했을 때 이 세계는 붙타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일곱 개의 태양이 출현했을 때는 이 세상이 소멸되는데 버터나 참기름이 불이 타서 연소되면, 결코 재나 검댕이를 남기지 않듯이” (A7.66)라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포함하여 우주에 대하여 이 산의 제왕인 수미산이 불타서 연소되면, 결코 재나 검댕이를 남기지 않는다.”(A7.66)라고 했습니다. 우주의 종말입니다.

 

형성된 것들은 무상(無常)하기에

 

우주가 괴겁기(壞劫期)가 되면 불꽃이 바람에 날려 하느님 세계에 까지 이른다.” (A7.66)라 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세계는 범천을 말합니다. 전조는 하늘에 두 개위 태양이 뜨면서부터 시작 됩니다. 하늘에 일곱 개의 태양이 떴을 때 우주는 검댕이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색계 3선천 까지 소멸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합니다. 마치 마음이 생주이멸(生住異滅)하고 유정물이 생노병사(生老病死)하듯이, 우주 역시 성주괴공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영원하지 않다는 제행무상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곱 개의 태양의 출현에 대한 경을 설할 때에 수행승들이여,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고, 수행승들이여, 형성된 것들은 견고하지 않고, 수행승들이여, 형성된 것들은 불안정하다.”(A7.66)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우주가 영원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영원히 계속 될 것 같은 우주도 때가 되면 소멸될 것임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은 수행승들이여, 그러한 일체의 형성된 것들에서 싫어하여 떠나야 하며, 사라져야 하며, 해탈해야 한다.”(A7.66)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완전한 열반에 들라는 것입니다. 설령 완전한 열반에 못들더라도 색계 4선천 이상에 태어나면 우주의 성주괴공에서 자유로울 것입니다.

 

삼계 중에 가장 안전한 곳은 색계 4선천 중에서도 아나함, 즉 돌아 오지 않는 자들이 간다는 정거천입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탐욕과 성냄이라는 거친 번뇌가 소멸되어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오하분결)이 풀린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수명대로 살다가 죽으면 완전한 열반에 듭니다.

 

정거천은 삼계 중에 가장 수승한 천상입니다. 무엇 보다 일겁마다 성주괴공하는 우주로 부터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괴겁기가 되면 색계 3선천 까지 모조리 파괴되어 소멸되는데 색계 4선천인 정거천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것은 해탈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무상한 것임을 알아 다시는 나고 죽는 일이 없는 열반에 드는 것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치성했을 때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우주는 일겁을 주기로 생성과 파괴를 거듭합니다. 성겁기가 되면 색계 초선천 천상부터 생겨나 차례로 지옥까지 형성됩니다. 반대로 괴겁기가 되면 지옥부터 소멸되어 차례로 색계 초선천까지 파괴 됩니다. 이렇게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은 오늘날 현대과학의 이론과도 어느 정도 맞습니다.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 되었지만 어느 시점 부터는 수축하여 사라질 것이라 합니다. 이를 빅뱅과는 반대로 빅크런치(Big Crunch)’라 합니다. 또 하나는 엔트로피법칙(Entropy’s law)’입니다. 닫혀진 계 내에서 엔트로피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기 때문에 파국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엔트로피는 비가역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겨난 우주는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젠가 파국을 맞게 됩니다. 이는 생겨난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다라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부처님의 제행무상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빠알리니까야 논서이자 수행지침서라 볼 수 있는 청정도론에 따르면 우주가 파괴 되는 것에 대하여 겁화(劫火)’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치성했을 때 우주가 파괴되는 겁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탐욕이 치성하면 불에 의해 색계 초선천까지 파괴되고, 성냄이 치성하면 물에 의해 색계2선천까지 파괴되고, 어리석음이 치성하면 바람에 의해 색계3선천까지 파괴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환자들이 간다는 색계 4선천은 겁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불교적 해법은 무엇인가?

 

어느 것 하나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4차 산업혁명시대가 되어 현재처럼 자본이 개입 되었을 때 이는 탐욕이 치성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탐욕이 치성하면 겁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불에 의해서 지구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만약 폭주하는 자본주의를 막지 못하면 지구는 뜨거워질 것입니다. 탐욕스런 자본이 이 세상을 지배하면 파국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이도흠 교수는 다음과 같은 해법을 제시합니다.

 

 

첫째, 시민들이 재현의 위기에 현혹되지 않고 여실지견(如實知見)하게 실제 현실을 올바르게 파악하며 권력과 자본에 올곧게 맞서야 한다.

 

둘째, 자본의 논리가 4차 산업혁명의 생산과 분배를 관장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법, 제도, 시스템을 만들거나 자본주의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

 

셋째, 생명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정치에 맞서서 생명을 보듬고 살리는 생명정치를 구현해야 한다.

 

 

탐욕적인 자본이 더 이상 개입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도 자본이 개입 된다면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연대하여 거대 권력과 자본에 맞서야 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해체하여야 함을 말합니다.

 

미래 자본주의 대안이 공동체입니다. 경제적으로는 기본소득제도입이 필수라 합니다. 이는 나누고 베풀고 사는 공동체의 삶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이도흠 교수는 눈부처로 설명합니다. 이는 서로 눈동자에서 눈부처를 바라보고 자신의 동일성을 해체하고 무아와 무상을 진정으로 깨달아 모든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고 그를 섬겨서 부처로 만들 때 비로소 나 또한 부처가 되는 것이다.”로 설명됩니다.

 

좀 불편하게 좀 가난하게 살자

 

인류문명은 지속할 수 있을까? 거대한 담론입니다. 말룽끼야뿟따가 세상은 영원한가 무한한가?’와 같이 고민하는 형이상학적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사는 자들에게는 관심 밖에 이야기일 것입니다. 고단하게 하루 하루 사는 자나 목구멍이 포도청인 자들에게는 속된 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후변화 등 미래의 사회에 대하여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우리들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만 사는 세상이라면 자연이 훼손되든 말든 마구 개발하면 될 것입니다. 또 환경이 오염되든 말든 마구 에너지를 써 버리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후손 들은 형편 없는 조상이 물려준 형편 없는 유산으로 비참하게 살아갈지 모릅니다. 이럴 때 불교적 해법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이번 강연의 목적일 것입니다.

 

좀 불편하게 살 필요가 있습니다. 좀 가난하게 살 필요가 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마구 써 버리고 편리를 위해서 자연을 훼손하기 보다는 좀 더 불편을 감수하며 좀 더 가난하게 살면 후손 들에게는 좀 더 나은 자연과 환경을 물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멈추어야 합니다. 멈추어서 옆도 보고 뒤도 돌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멈추면 보입니다. 멈추면 통찰이 일어납니다. 멈춤과 통찰입니다. 멈추어서 보면 지혜가 생겨납니다.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좋은 생각이 떠 오릅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실제(Real)’를 볼 수 있습니다. 생각과 실재가 일치 했을 때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멈추어야 합니다.

 

 

2017-11-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