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우리에겐 자유의지가 없지만 생체로보트처럼 살 순 없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1. 27. 12:32


우리에겐 자유의지가 없지만 생체로보트처럼 살 순 없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

 

추운 날 아침 일어나기 힘듭니다. 마음속으로는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몸은 쉽게 따라 주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 때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실감합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돈도 연애도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돈을 벌려고 주식투자를 해 보지만 번번히 깨지기만 합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돈을 벌려고 용을 쓰면 쓸수록 통장잔고는 줄어 들 뿐입니다. 저 사람을 나의 애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접근해 보지만 멀리 달아날 뿐입니다. 가까이 가면 더 멀리 도망가는 것을 보고서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음을 실감합니다.

 

이 세상에는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듯합니다. 가장 가까운 배우자도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식도 내 바램 대로 움직여 주지 않습니다. 돈도 내 뜻대로 벌리지 않고 사람도 내 뜻대로 따라 주지 않아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전현수 박사의 마음테라피강연

 

유튜브에서 정신과전문의 전현수박사의 강연을 보았습니다. 수 년 전 불교TV에서 방영한 것인데 시절인연이 되어서일까 유튜브에서도 보게 되었습니다. 이미 두 세 차례 본 바 있는 전현수박사의 마음테라피강연은 매우 유익합니다. 몇 번을 보아도 질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무엇 보다 건질 것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번에 본 자유의지는 과연 있는가?라는 제목의 강연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전현수박사에 따르면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내 생각대로 다 된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자유의지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유의지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의 모든 행위가 나의 의지로 행해졌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내가 선택했다. 내가 의지를 냈다는 것은 좀 지나고 난 뒤에 느슨하게 생각하는 것이다.”라 했습니다.

 

여기 물컵이 있습니다. 목이 마른 자가 컵을 들어 물을 마십니다. 누구나 물컵 든 것에 대하여 내가 선택했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라 합니다. 정말 내가 의지를 냈다면, 내가 먼저 의지를 내고 나서 그 다음 행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행위를 먼저 하고 나중에 안 것입니다.

 

과연 자유의지는 있는가

 

대부분 사람들이 행위에 대하여 대부분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컵을 들려고 했을 때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실행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몸이 먼저 행위를 한 것입니다. 나중에 물컵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행위를 하고 나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물컵의 예로 본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샘 해리스라는 뇌과학자는 자유의지는 착각이다.(Free will is illusion)”라 했습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전에 이미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에 대한 수 많은 실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벤자민 리베트 1986년에 실험을 했습니다. 머리에 전극을 설치하고 행동을 첵크한 것입니다. 손가락을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손가락을 들었을 때 머리에 설치된 전극의 자극이 1초 빨랐다는 것입니다. 손가락을 올리기 1초 전에 이미 뇌 속에서 신호가 일어난 것입니다. 손가락을 자신의 의지대로 올렸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실험은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 갑니다. ‘헤르만 헬름홀츠 1886년 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반응을 실험했습니다. 여러 가지 활동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알아 채기 전에 이미 상당 수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 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뇌에서 일어나는 활동 중 상당수는 앞서 뇌 속에서 무의식중에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요즘 뇌과학자등 자유의지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환상이라 합니다. 뇌가 한 것처럼 느끼지만 그 전에 이미 과정이 있어서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는 아름다운 환상이다.”라든가, “자유의지는 착각이다.”라 하는 것입니다.

 

최근 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나의 의지대로 행위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 합니다. 어느 것 하나 내 의지대로 하는 것이 없음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결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결정론 내지 운명론을 믿는다면 큰 혼란이 올 것입니다. 살인을 하거나 도둑질을 한 자에 대하여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는 여러 가지 실험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스스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물컵의 예를 든 것이 좋은 예입니다. 그런데 실 생활에서도 무수히 겪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의식 중에 하는 행위가 그것입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딴 길을 가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이미 많이 가 본 길입니다. 자주 다니다 보니 길이 난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숙명론인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하는 것은 쇼킹합니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상식이 무너진 듯합니다. 어느 것 하나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없다면 숙명론을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숙명론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현수박사는 내가 말한 것은 순간적인 이야기이다. 순간적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것은 없지만, 순간순간 새로운 조건이 계속 들어 올 때 원인에 따른 결과가 언제나 있는 것이다.”라 했습니다. 행위는 순간적으로 일어남을 말합니다. 그런데 행위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른 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이 말한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마다 선택을 합니다. 선택을 할만한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매순간 선택입니다. 무의식 중에 선택을 하는 것도 그런 선택을 할 만한 조건이 형성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전현수박사는 내가 의지를 냈다는 것은 조건이나 상태가 되서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또 일어난 것은 조건이 되고 외부의 끊임 없는 것들이 조건이 된다.”라 했습니다. 일상에서 일거수일투족은 내가 의지를 내서 행위한 것이 아니라 행위를 낼 만한 여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일 행위만 있고 행위에 대한 과보가 없다면 숙명론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만일 숙명론을 받아 들인다면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살인을 하거나 도둑질을 한 자에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숙명론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A3.61)라 했습니다.

 

숙명론자 내지 운명론자 들은 자신의 모든 행위를 전생탓으로 돌립니다. 살인을 해도 전생의 원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가 숙명론적으로 되면 어느 누구도 오계를 지키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작용만 했을 때

 

학자들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없는 것이라 했습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은 순간적인 이야기를 말합니다. 순간간 새로운 조건이 계속 들어 올 때 순간적 선택에 자유의지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매순간 자유의지가 개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순간 선택에 있어서 자유의지가 없다고 원인에 따른 결과도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것은 없지만, 순간간 새로운 조건이 계속 들어 올 때 원인에 따른 결과는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매순간 보고 듣고 냄새 맡는 등 행위가 조건에 따른 것임을 말합니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인간의 언어와 문자로 인해 번뇌가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인간만이 사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유할 수 있는 인간은 번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을 못하고 문자도 쓰지 못하는 동물은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번뇌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무분별론자에 따르면 언어와 문자는 개념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생이나 윤회이니 하는 말들은 허구라 합니다. 언어와 문자로 분별하는 것을 떠나 무분별지에 이르는 것이 깨달음이라 합니다. 언어와 문자를 쓰지 않고 사유하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동물의 상태 또는 자아개념이 생겨 나지 않은 아기의 상태와 같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본능적 삶입니다. 생각 이전의 행위에 대한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배고픈 것이나 졸린 것은 생각 보다 앞선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동물적인 삶이나 아기와 같은 상태,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프로그램된 대로만 반응하는 생체로보트와 같은 상태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분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본능적으로 작용만 하는 상태가 깨달음이라 한다면 부처님 가르침과 먼 것입니다.

 

인간은 생체로보트인가

 

인간만이 사유할 수 있습니다.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은 정신작용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정신작용이 번뇌를 야기 한다고 하여 무분별지의 동물이나 간난아기를 이상으로 삼는다면 부처님 가르침과 역행합니다. 맛지마니까야 ‘개의 행실을 닦는 자의 경(M57)’와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큰 경(M64)’에서 보는 것처럼, 소처럼 개처럼 아기처럼 사는 자와 다름 없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로보트처럼 사는 자입니다. 인간을 생체로보트라 하여 조건에 따라 반응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유의지가 없는 삶입니다.

 



 

본능대로 산다는 것은 자유의지가 없음을 말합니다. 인간을 생체로보트와 같이 보는 것도 자유의지가 없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신체적 정신적 반응을 보인 것을 나중에 알게 된 것은 문자와 언어에 따른 것입니다. 항상 반응이 먼저이고 뒤이어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의지가 먼저 있어서 행위가 일어나는 것아 아니라 정반대로 행위가 먼저 있고 난 뒤에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합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은 동물적 본능과 같은 것이고 인간은 생체로보트에 지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자유의지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생체로보트임에 틀림 없습니다. 주어진 조건 속에서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자꾸 반응하다 보면 길이 나게 되었습니다. 길을 자주 다니다 보면 큰 길이 되는데 같은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관성이 붙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술에 만취한 자가 집에 찾아 가는 것과 같습니다. 무의식 중에 일어나는 행위는 이전에 많이 해 보던 것입니다. 길이 크게 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해 본 것에 익숙합니다. 늘 다니는 길로 가는 것도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TV에서 보는 생활의 달인들은 눈을 감고도 자신의 일을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도 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 중에 일을 하는 것도 이미 길이 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조건에 따라 반응하는 생체로보트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오온에 통제권이 없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은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전현수박사는 무아상경을 예로 들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통제권이 없음을 말합니다. 상윳따니까야 다섯 명의 경(S22.59)’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S22.59)

 

 

오온 중에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몸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했습니다. 만일 몸이 나의 통제권 안에 있다면, 달리 말하면 몸이 나의 것이라면 나의 몸은 병들지도 말아야 하고 늙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몸은 병들고 늙어 갑니다. 몸을 나의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는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병드는 것과 늙어 가는 것 조차 통제권이 없다면, 더구나 죽음조차 속수무책이라면 어떻게 나의 몸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런 현상은 느낌, 지각, 형성, 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합니다. 이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오온에 대하여 통제권이 없음에도 일체유심조라 말하며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마음 먹는 것 자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오온 중에 의식에 대하여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 (S22.59)라고 말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 먹은 대로 되는 일은 없다고 해도과언이 아닙니다. 물질을 포함하여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증명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인생을 어떻게 개척해야 할까

 

뇌과학자들은 자유의지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부처님도 이천오백년 전에 자유의지는 없다고 했습니다. 오온이 나의 것이라고 여길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조건에 따라 반응하는 생체로보트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소처럼, 개처럼, 아기처럼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유능력이 없는 동물이나 자아개념이 없는 아기는 매순간 주어진 조건 속에서만 반응하는 생체로보트와 다름 없습니다. 언어와 문자가 번뇌를 야기한다고 하여 인간을 단지 생체로보트처럼 무분별을 주장한다면 넌센스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생체로보트처럼 살거나 숙명론자가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인생을 어떻게 개척해야 할까요?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식으로 주어진 조건에 따라 소처럼, 개처럼, 아기처럼, 생체로보트처럼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자유의지가 없다고 하여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현수박사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좋은 조건 속에 있어야 하겠구나, 좋은 말 들으면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것이 새로운 조건이 되어서 좋은 선택을 하게 된다.”라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행위에 대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입니다. 의도적 행위로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의도가 행위라고 말한다

 

자유의지와 의도는 비슷합니다. 의지와 의도는 동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전자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라고 말할 때 사용할 수 있고, 후자는 신구의 삼업 따른 의도적 행위라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새로운 선택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의지가 아닙니다. 매순간 선택을 하지만 나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단지 내가 살아 온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어진 조건에 따라 반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주 하여 익숙하게 되면 무의식 중에도 일어납니다. 이와 같은 의지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명 무아상경이라 일컬어지는 다섯 명의 경(S22.59)’에서와 같이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라. 나의 의식은 이렇게 되지 말라.” (S22.59)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연속적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위를 합니다. 그것은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입니다.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모든 인간은 이렇게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의도(cetanā)라 합니다부처님은 의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Cetanāha, bhikkhave,

kamma vadāmi.

Cetayitvā kamma

karotikāyena vācāya manasā.

 

수행승들이여,

나는 의도가 행위라고 말한다.

의도하고 나서 신체적으로으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행위한다.”(A6.63)

 

 

부처님은 나는 의도가 행위라고 말한다.(Cetanāha kamma vadāmi)”라 했습니다.  의도(cetanā)와 행위(kamma: )를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의도가 실린 것만 업이 됨을 말합니다. 의도하지 않은 것은 업이 되지 않음을 말합니다. 경행하다가 벌레를 밟아 죽였을 때 의도하지 않은 것이라면 업이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kamma)의 소멸에 대하여

 

부처님이 의도가 행위()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행위는 어떻게 발생된 것일까요? 부처님은 접촉이 행위의 원인이다.”(A6.63)라 했습니다. 모든 행위는 접접촉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접촉이 없다면 행위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행위는 매우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경에 따르면 지옥의 경험을 받는 행위()’ 등 이른바 육도로 설명합니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남기는데 세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현세에서 받거나 다음 생에 받거나 먼 후생에 받는다.”(A6.63)고 했습니다. 행위를 하면 과보를 피해 갈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번 생에서 못 받으면 다음 생에서 받고, 다음 생에서 못 받으면 이후 생에서 반드시 받게 됨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의도적인 행위는 반드시 업이 되고, 업은 반드시 과보를 낳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숙명론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행위의 소멸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행위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A6.63)라 했습니다. 행위, 즉 업의 소멸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접촉이 소멸의 행위이다.” (A6.63)라 했습니다. 접촉이 업의 발생 원인도 되지만 동시에 소멸의 원인이 됨을 말합니다. 이는 십이연기의 환멸문에 해당될 것입니다.

 

부처님은 업의 소멸에 이끄는 길도 설했습니다. 그것은 팔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리고 이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행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A6.63)라 했습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를 청정하게 하면 행위에 대한 과보가 생기지 않아 이미 지은 업일지라도 소멸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열반으로 실현으로 가능합니다. 열반이 실현 되었을 때 이미 지은 업이라도 효력을 상실하는 업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체로보트처럼 살 수 없다

 

의도가 업이라 했을 때 이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입니다. 생체로보트처럼 매순간 조건에 반응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신의 의도 실렸다는 것은 크게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에 해당됩니다.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소처럼, 개처럼, 아기처럼 살라는 가르침은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을 생체로보트와 같은 것으로 보아 무분별을 말하는 가르침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업과 업의 과보를 펼치셨습니다. 자신의 지은 행위에 따라 업의 과보를 받게 되는데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삼계와 육도로 전개됩니다.

 

소처럼, 개처럼, 아기처럼 사는 자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매순간 주어진 조건에 반응하는 생체로보트와 같습니다. 언어와 문자로 인한 개념화로 번뇌가 야기 된다고 하여 무분별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산다면 생체로보트와 다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매순간 단 한순간도 생각없이 살 수 없습니다. 식물인간이 되지 않는 한 매 순간 정신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생각이 번뇌를 야기한다고 하여 무생물처럼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네요” “그렇군요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번뇌는 느낌에 따른 것입니다. 배고 고프면 동물적 본능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몸이 밥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몸에서 술을 부를 것입니다. 만일 본능대로 산다면 동물적 삶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막행막식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느낌 단계에서 알아 차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습니다.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인간에게 자아관념에 따른 번뇌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만일 매순간 주어진 조건에 따라 반응한다면 동물적 행위를 할 것입니다. 즐거운 느낌이라면 거머 쥐려 하고 괴로운 느낌이라면 밀쳐 내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탐욕과 성냄의 속성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탐욕과 분노로 살아 갑니다. 단지 느낌 대로 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동물적 삶입니다. 본능대로 살아 간다는 것은 생체로보트와 같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음을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신작용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의도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계를 지키지 않는 것은 악한 의도에 따른 것입니다. 오계를 지키지 않는 자는 단지 동물보다 못한 삶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오계를 어기는 자는 축생보다 더 아래 세상인 지옥에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반면 선한 의도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끕니다. 오계를 지키고 십선행을 하는 자는 선처에 태어난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삶은 의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비담마논장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선심, 불선심, 과보심, 작용심 이렇게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의도에 따라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를 하면 선심 또는 불선심이 생겨나는데, 이들 행위는 반드시 과보를 남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보심입니다. 그런데 어떤 행위를 해도 과보를 남기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작용심(作用心: kiriya citta)입니다.

 

작용심을 아라한의 마음이라 합니다. 아라한은 어떤 행위를 해도 과보를 남기지 않습니다. 아라한은 선심을 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선과보심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선과보심을 낸다면 그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윤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떤 선행을 해도 그 행위가 과보를 내지 않는다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행위에 대하여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끼리야찟따, 작용심이라 합니다.

 

작용심에 대하여 아무 원인 없이 작용만 한다고 하여 무인작용심(無因作用心)이라고 합니다. 단지 대상에 대하여 그렇네요, 그렇군요라 하는 것입니다. 단지 그러려니 하는 것입니다. 아라한은 단지 미소 짓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길을 잘 닦아 놓아야

 

전현수박사에 따르면 부처님이나 아라한이나 우리나 모두 자유의지가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부처가 된 것은 부처가 될만한 여건과 환경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부처가 되기 전에 보살행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길을 잘 닦아 놓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무의식 중에라도 그 길로 들어 서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정에 들고 싶다고 의도를 냈다면 곧바로 선정에 든 것도 길을 잘 냈기 때문이라 합니다.

 

부처님이나 우리에게나 자유의지는 없습니다. 부처님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서 부처가 된 것이 아니고 한량없는 과거생에서 보살행을 통하여 부처가 될 조건을 잘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유의지가 없는 우리들 역시 조건을 잘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않는 것이 공부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 하고자 한다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돈은 내 뜻대로 잘 벌리지 않습니다. 돈을 잘 벌려면 잘 벌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먼저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자꾸만 멀리 도망가는 것도 여건을 만들어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내 마음대로 콘트롤 할 수 없는 것도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는 없지만

 

조건을 만드는 것이 의도라 볼 수 있습니다.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에 따른 것입니다. 좋은 의도를 하면 조건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매순간 느낌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지만 이 느낌을 알아 차리는 것은 의도입니다. 이와 같이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늘 강조하는 것은 알아차림입니다. 그것은 느낌이 갈애로 넘어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거머쥐려 하면 탐욕이고,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밀쳐 내려 하면 성냄입니다. 매순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느낌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마치 생체로보트처럼 사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느낌 단계에서 알아 차립니다. 탐욕과 성냄이 갈애로 전개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의도입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는 없지만 우리를 향상으로 인도하는 의도는 있다는 것입니다.

 

 

2017-11-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