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내면에 향기가 가득한 참사람이 되자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2. 17. 11:54


내면에 향기가 가득한 참사람이 되자

 

 

두 번째 정평법회가 불광산사에서 열렸습니다. 재가활동단체 정의평화불교연대에서 주최하는 재가자 중심의 법회입니다. 그렇다고 스님들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법회입니다. 다만 승단의 개혁에 한계를 느껴 재가자라도 여법하게 가르침을 따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법회입니다.

 




재가자들이 여법하게 법회를 봉행 했을 때 승단은 되돌아 보게 될 것입니다. 승가보다 더 여법하게 가르침을 따랐을 때 사부대중을 각성시키는 효과도 있을 것입니다. 재가자들이 여법하게 법회를 봉행하고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을 때, 승가내부에서도 여법하게 가르침을 따르는 새로운 승가가 출현하는 계기를 이끈다면 법회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계율이 없는 불교는 사상누각

 

한국불교는 여법하지 않습니다. 승가는 계행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으로 변질 된 듯합니다. 진주선원 원담스님은 카페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나라가 일제에 의해 침탈될 당시 한국불교는 거의 전멸 상태에 있었다. 교학과 수행이 미미하게 전해져왔으며 계율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교학이란 것도 한문경전의 해석이 전부라 체계적인 불교를 이해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였다. 수행이란 것도 중국에서 전해진 참선이 전부인데다 그것조차도 전승이 희미해졌다. 계율은 아예 언급할 정도도 아니라 수계하는 계단자체가 불완전했다.

 

우리에게는 선각자 스님들이 없었는가? 일부 몇 스님이 있었다. 그러나 미얀마의 큰 스승처럼 교학과 수행을 다 갖추고 국민적 지지를 받은 분이 하나도 없었다. 용성스님이나 만해스님, 석전스님과 같은 분들이 있어 세계불교의 동향을 조금 눈치 채긴 했지만 몸소 해외로 나가 남방불교나 티베트 불교를 접하지 못했다. 그들이 사용했던 언어의 장벽을 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유의 폭도 한자문화권을 넘지 못했다.

 

한국불교는 스스로의 힘으로 승가를 재건하지 못했고, 불교의 전통을 중흥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일본불교의 국가주의적, 세속적인 대처불교에 물들고 말았다. 제일 아쉬운 점은 율장에 의거한 여법한 계단을 확립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한국불교는 계율이 없다. 있다고 주장한다 해도 유명무실하다. 그러니 한국에서 불교를 중흥하자, 불교를 정화하자, 승가를 청정하게 하자고 주장해도 모두 사상누각이다. 왜냐? 계율이 지켜지지 않으니까. 국민적 지지와 감시아래 승가가 율장대로 재건되고 운영되지 않는 한 한국불교는 계정혜 삼학에서 다리가 부러진 절름발이 불교를 면치 못할 것이다.” (원담스님, 섭세일기 2017 가을-8, 2017-11-26)

 

 

원담스님에 따르면 한국불교에는 계율이 없다고 했습니다. 계율이 없는 불교는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억불숭유정책 영향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여법하게 전승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봅니다. 가르침대로만 산다면 계행은 지켜 질 것입니다.

 

한국이라는 좁은 울타리속에서 그것도 한자문화권을 벗어나지 못한 한국불교에서 계율이 없는 불교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비구승들의 행태를 보면 승인지 속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한국불교는 사실상 반승반속입니다. 반승반속은 승에서도 배척받고 승에서도 배척받습니다. 마치 화장터에서 타다만 나무토막처럼 악취가 나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습니다.

 

한국불교가 중흥하려면 먼저 계단부터 새워야 합니다. 출가자들이 먼저 계행부터 지키는 것입니다. 계학이 굳건해야 그 다음 단계로 정학과 혜학으로 나아갑니다. 계행이 없는 불교는 무늬만 불교일 뿐 불교가 아닙니다. 스님들은 부처님의 일생부터 다시 공부해야 합니다. 부처님 그 분이 누구인지, 부처님이 그 분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포대기에 아기가 보이지 않듯이, 한국불교에는 부처님 가르침이 없습니다.

 

재가자들이 여법(如法)하게


승단에 실망하여 재가자들이 여법하게 봉행하는 법회가 정평법회입니다.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정의평화가 키워드입니다. 정의라는 말은 법답게’ ‘여법하게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평화라는 말은 광의로 열반이라는 말입니다. 법답게 살아서 열반을 실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가르침을 실천하여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일까 이번 정평법회의 주제는 이고득락(離苦得樂)’입니다.

 

정평법회에서는 재가자가 법문합니다. 법문은 스님이 하거나 법사 자격이 있는 자가 하는 것이라는 상식을 깨고 있습니다. 누구나 법상에 앉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삼배의 예를 갖추는 것이 아닙니다. 합장하고 반배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매달 셋 째 주 토요일에 열리는 정평법회입니다. 12 17일에 열린 두 번째 정평법회에서는 이도흠교수가 법상에 앉았습니다.

 




이도흠교수는 준비된 자료에 모두를 위한 이고득락의 길라는 제목으로 법문을 실었습니다. 작은 글씨로 빼곡히 3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입니다. 대개 스님들 법문을 보면 자료 없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도 주제와 관련이 없는 신변이야기 등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아서 받아 적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준비된 법문의 경우 받아 적기에 바쁩니다.

 

이도흠교수는 법문할 때 자료를 보지 않고 말 했습니다. 준비된 자료를 읽는 식이라면 그다지 전달력이 약할 것입니다. 글로서 정리 하기 위해 자료를 읽어 보았습니다. 크게 보면 자비에 대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주변으로 눈을 돌림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으로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깨닫고 난 다음 중생구제하는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아는 만큼 능력 껏 알려 주는 것도 하화중생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인터비커밍(inter-becoming)에 대하여

 

이도흠교수의 법문 중에 눈의 띄는 말이 상호생성자(inter-becoming)’입니다. 이 말은 존재(being)와 대응되는 말입니다. 나혼자만 잘 살려 한다면 자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자아에 기반을 둔 감각을 즐기는 자도 해당됩니다. 그러나 욕망은 추구하면 할수록 갈증만 난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대상에 집착하여 마치 스토커처럼 달라 붙어 욕망을 채웠다면 , 별거 아니네라며 또 다른 욕망의 대상을 향해 갈 것입니다.

 

욕망의 속성을 아는 자는 욕망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아에 기반한 자의 욕망은 신기루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환영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감각을 위하여 목숨을 걸 듯 살아갑니다. 오로지 오감에 따른 감각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남는 것은 ()’()’일 것입니다.

 

갈애는 아무리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감각에 목숨을 걸 듯 살아갑니다. 그러나 욕망을 잠시 내려 놓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부자 되겠다는 욕심하나만 내려 놓아도 이 세상 살아가기가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옆도 보고 뒤도 되돌아 보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자비의 마음도 생겨 나게 됩니다. 욕망을 내려 놓으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도흠교수는 비잉(being)과 인터비커밍(inter-becoming)을 말했습니다. 비잉에는 서양의 실체론적 사고에서 인간이 이 세계를 바라보고 의미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정태적인(static) 존재로 파악합니다. 반면에 인터비커밍은 인 간존재를 연기론이거나 관계론적 사고에서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서로 깊은 연관관계 및 인과관계를 맺고서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주는 역동적(dynamuc) 존재로 파악합니다. 나와 너가 서로 한 몸처럼 생성하는 존재라면 우리는 타인에 대해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게 됩니다. 특히 인터비커밍에 대해서는 찰나의 순간에도 서로를 생성하는 상호생성자라 했고 이를 눈부처라 했습니다. 눈부처란 서로 눈을 바라 보았을 때 서로의 눈에 상대방이 비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나홀로 욕망만을 추구하며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임을 말합니다.

 

인터비커밍은 연기적 관계라 볼 수 있습니다. 서로의 눈에서 서로를 보듯이 어느 것 하나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말합니다. 이는 연기를 뜻하는 빠알리어 빠띳짜사뭅빠다(paiccasamuppāda: 緣起)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paicca+samuppāda’의 합성어입니다. 빠띳짜는 ‘concerning’의 뜻으로 조건을 뜻하고, 사뭅빠다는 ‘arising’의 뜻으로 함께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연기라 하고 영어로는 간단히 ‘arising’이라 합니다.

 

인터비커밍은 어라이징(arising)’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비잉이라 하면 고정적인 존재라는 뜻이고, 어라이징이라 하면 연기적 존재라 볼 수 있습니다. 비잉은 서양에서 생겨난 것으로 명사적개념이고, 어라이징은 동사적개념으로 동양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서구적 사고 방식을 가진 자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대체로 이기적이라 볼 수 있고, 동양적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은 전체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대체로 이타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타적 성향에 대하여 이도흠 교수는 불과 삼사십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었던 까치밥개다리소반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거울신경세포체계(mirror neuron system)에 대하여

 

인간은 이기적이면서도 동시에 이타적입니다. 마치 인간은 동물이면서도 영적존재와 같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양면을 갖는 인간은 때로 이기적이며 때로 이타적이기도 합니다. 리차드 도킨스가 말한 것처럼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공감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도흠교수는 거울신경세포체계(mirror neuron system)’으로 설명합니다.

 

거울신경세포이론이 발견 된 것은 1998년이라 합니다. 이전에는 인간의 뇌도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으나 동물에게는 없는 공감능력이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런 공감능력은 다른 아닌 자비심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자비심을 낼 수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자신의 고통처럼 받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도흠교수에 따르면 세친의 불성론에서 지혜로 말미암아 열반을 버리지 않고, 자비로 말미암아 생사를 버리지 않는다.”라 했습니다. 이는 욕망의 달성이 행복인 사실과 욕망의 지멸이 열반에 이르는 길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길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통받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있기에 나만의 행복과 열반을 추구하지 않고 고통 속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나의 열반을 미루고 그들을 구제하는 실천을 행함을 말합니다. 원효대사의 진속불이와 같은 말입니다. 유마경에서 중생이 아프면 보살이 아프다.’라 했는데 역시 같은 맥락이라 봅니다.

 

초기경전에는 거울신경세포시스템을 연상케 하는 자비의 가르침으로 가득합니다. 가장 공평한 자비의 가르침은 아마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불행의 경에서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도 우리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S15.11)라고 했습니다.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은 좋지만 자칫 자만이 되기 쉽습니다.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베푸는 식이 된다면 진정한 자비가 될 수 없습니다. 주어도 티내지 말고 주라는 무주상보시야말로 최상의 보시라 합니다. 한편에서는 우월감으로 주고 또 한편에서는 열등감으로 받는 다면 자비의 마음은 반감됩니다. 진정한 자비는 주는 자나 받는 자나 모두 평등해야 합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불행과 가난에 대하여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나긴 윤회의 여정에서 나도 언젠가 저 사람들처럼 불행하고 가난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윤회하는 중에 나도 언젠가는 저 사람들처럼 행복하고 부유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이번에는 행복의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도 우리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S15.11)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공평합니다. 불행하고 가난한 자에 대하여 우월감을 갖지 않고, 행복하고 부유한 자에 대하여 열등감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이고득락,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 유래한 이 말은 불교가 지향하는 목표를 잘 말해줍니다. 그렇다고 감각적 즐거움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감각적 즐거움 보다 더 즐거운 것은 이타적 행위를 했을 때 입니다. 봉사활동을 하고 귀가하는 자의 마음에는 잔잔한 행복이 꽤 오래 지속됩니다. 감각적 욕망을 채우고 나서 얻는 일시적 거친 행복이나 허무감에 비할 바 아닙니다.

 

이도흠 교수는 법문 말미에 바람처럼 지나가는 행복을 잡으려는 데서 고통은 시작됩니다.”라 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행복이든 불행이든, 쾌락이든 불쾌든 모든 것은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무상한 것을 무상한 것이라고 아는 것은 큰 지혜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자비로운 자입니다. 지혜와 자비는 항상 함께 합니다. 그래서일까 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에서는 학습계율을 갖추는 것 보다,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라 했습니다. 또 무상과 관련하여 “학습계율을 갖추는 것이나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 것보다,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라 했습니다.

 

안등(岸藤)의 비유

 

두 번째 열린 정평법회에 50여명 가량 참석했습니다. 승단에 실망하여 승단에 각성시키고자 열린 열립법회가 정평법회입니다. 또 그 이름에 걸맞게 정의롭게 평화롭게 사는 법회가 정평법회입니다.

 

정평법회는 시종 여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승가보다 더 여법한 법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일 것입니다. 이도흠교수의 법문이 끝나고 박경준교수의 입보리행론 강의가 짤막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게송은 부처님들과 보살님들, 모든 예경의 대상인 분들께 예경 드리오며 경전에 따라 보살님들의 수행법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로 시작되는 일종의 삼보예찬 게송입니다.

 

박경준 교수는 삼보에 대하여 피난처와 보배로 설명했습니다. 삼보는 단순하게 귀의처 또는 의지처라기 보다는 구원에 이르는 피난처라는 것입니다. 그런 삼보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배와 같습니다. 이처럼 피난처로서의 삼보, 그리고 보배로서의 삼보에 대하여 안등(岸藤)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불자라면 한번쯤 들어 보았을 안등의 비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나그네가 광야를 거닐다가 코끼리를 만나 도망치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 눈빛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고 있다. 마을은 아득하고 나무 위건 돌 틈이건 안전한 곳은 없다. 숨을 곳을 찾아 사방으로 내달리다 겨우 발견한 곳이 바닥이 말라버린 우물이다.

 

저곳이면 그래도 괜찮겠지, 우물 곁 등나무 뿌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다가 그는 다시 소스라치게 놀랐다. 컴컴한 바닥에 시커먼 독룡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서야 먹잇감을 노리며 사방에서 혀를 널름거리는 네 마리의 독사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위로 올라가야 할까, 그는 하얗게 질려버렸다. 쫓아온 코끼리가 코를 높이 치켜들고 포효하고 있었다. 올라오기만 하면 밟아버릴 태세다.

 

믿을 것이라고는 가느다란 등나무 뿌리 한 줄기뿐이다. 그러나 그 뿌리마저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 번갈아가며 갉아먹고 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얼굴 위로 무언가 떨어져 입으로 흘러들었다. 꿀이었다. 등나무 덩굴 위에 벌집이 있었던 것이다. , , , , , 다섯 방울의 달콤함과 감미로움에 취해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바람에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벌들이 쏟아져 나와 온몸을 쏘아대고, 두 마리 쥐가 쉬지 않고 뿌리를 갉아먹고, 사방에서 독사들이 쉭쉭거리고, 사나운 들불이 일어나 광야를 태우는 데도 그는 눈을 꼭 감고 바람이 다시 불기만 기다렸다. 다섯 방울의 꿀맛만 기억하고, 그 맛을 다시 볼 순간만 기약한 채 그는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잊고 있었다. 나의 삶도 이 나그네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안등의 비유를 안수정등(岸樹井藤)이라고 합니다. 이 비유는 조계종 교육원에서 만든 부처님생애에 실려 있습니다. 박경준 교수에 따르면, 이 비유를 넣자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채택된 것이라 합니다.

 

안등의 비유를 처음 들은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입니다. 그때 당시 불교선생님, 요즘 말로 교법사 선생님에게 들은 것입니다. 조용길선생님이었습니다.

 

연지동에 있었던 동대부중에 배정받았습니다. 교법사선생님으로부터 불교를 처음 접했습니다. 선생님은 칠판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안등의 비유를 실감나게 설명했습니다. 그 기억이 너무 생생하게 지금까지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등나무 넝쿨에 매달린 자의 신세가 너무나도 구구절절하게 다가 왔습니다. 앞으로 갈수도 없고 뒤로 갈수도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마치 내가 그 상황에 직면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무엇이든지 처음 경험한 것은 강렬합니다. 그리고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두 번째, 세 번 째 것은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중학교 때 접한 불교가 그랬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접한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율장대품 야사의 출가이야기에 따르면 마치 청정하여 반점이 없는 천이 올바로 색깔을 받아들이는 것처럼”(Vin.I.16)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열 네 살 중학교 1학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면에 향기가 가득한 참사람이 되자

 

정평법회가 끝났습니다. 토요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장충동 불광산사를 빌어 열린 법회입니다. 이제 시작단계에 불과하지만 점차 가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비록 50여명 밖에 되지 않는 숫자이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불교지성들과 실천하는 활동가들, 그리고 여법하게 사는 불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서로 베풀고 나누는 행위는 훌륭한 삶입니다. 모두 안락을 추구하는 시대에 자발적으로 시간을 내어서 그것도 후원금까지 내며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는 것을 아는 만큼 알려 주고, 할 수 있는 한 능력껏 행하는 아름다운 보살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향내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꽃이 피면 향기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꽃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널리 퍼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향내 나는 사람은 바람을 거슬러 사방팔방으로 널리널리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도 꽃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못한다. 전단향도 따가라향도 말리까향도, 그러나 참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니 참사람의 향기는 모든 방향으로 퍼져 나간다.”(Dhp.54)라 했습니다.

 






한사람의 도인이 출현하면 향내가 나고 세상이 청정해집니다. 향기가 나면 나비가 오듯이, 내면에 향기가 가득한 참사람에게 사람들이 모여 듭니다.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했을 때 가르침에 목마른 자들이 찾을 것입니다.

 

 

2017-12-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