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사이가, 상대방 마음을 움직이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17. 12. 23. 11:44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사이가, 상대방 마음을 움직이려면

 

 

정평불 6기눈부처학교의 열 번째 강좌는 유승무교수의 마음의 소통과 마음사회의 사회학입니다. 제목만큼이나 어려운 주제인 것 같습니다. 사회학에 문외한인 입장에서 마음이라는 키워드와 사회라는 핵심어가 어떻게 결합하는지 궁금합니다.

 

2017 12 21일 목요일 저녁 7시 한양대 인문관 317호실에서 유승무교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지난 10 10 1강을 시작으로 단 한번만 빠지고 모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후기를 남겼습니다. ‘문명의 지속과 불교의 지혜라는 대주제를 가지고 열린 이번 눈부처학교 6기 강좌는 총 11강입니다. 한국불교에서 내로라하는 지성들이 벌이는 불교인문학의 향연입니다. 블로그 수행-신행-봉사방에 모두 저장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페이스북과 관련 카톡방에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에 대하여

 

유승무교수는 중앙승가대교수입니다. 승가대에서만 28년째라 합니다. 사회학이 전공입니다. 이번 강연에서는 마음의 소통과 마음의 사회학에 대한 것입니다. 공통적으로 마음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먼저 서구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대하여 비판합니다.

 

서구에서는 마음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대한 믿음을 더 중요시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성적 믿음은 고대 그리스시대 때부터 시작하여 근대에 이르기 까지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이성적 믿음이 서구의 특수성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성을 강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분법적 사고는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동일율, 모순율, 배중률 등이 있지만 이분법은 사실상 흑백논리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서구의 이분법적 논리에 대하여 유승무 교수는 폭력성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심지어 제국주의적 사고관이라고도 했습니다.

 

유승무교수에 따르면 서구의 이성관은 서구에서 발생한 특수한 것에 지나지 않아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서구의 이성관은 이분법적이고 흑백논리적이고 폭력적이고 반사회성적이고 제국주의적 성격까지 띠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성관은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대안이 불교의 연기법이라 했습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사이

 

불교의 연기법은 이분법이나 흑백논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사이가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하나의 완충지대가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색깔 스펙트럼에서 중간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존재한다는 연기법에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의 상호관계성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고로 연기송은 다음과 같이 표현 됩니다.

 

 

imasmi sati ida hoti.                 이띠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

Imassuppādā ida uppajjati.             이맛숩빠다 이당 웁빳자띠

Imasmi asati ida na hoti.            이마스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룻자띠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약유차즉유피 (若有此卽有彼)

약생차즉생피 (若生此卽生彼)

약무차즉무피 (若無此卽無彼)

약멸차즉멸피 (若無此卽滅彼)

 

when this is present, this comes to be,

when this arises, this arises.

When this is not present, this does not come to be,

when this does not arise, this does not arise.

  

 

상윳따니까야 열 가지 힘의 경(S12.21)’에 실려 있는 연기송(緣起頌)입니다. 이와 같은 짤막한 게송으로 부처님의 가장 핵심적인 연기의 가르침을 압축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법의 특징은 상호의존조건발생입니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된다라는 것은 이것과 저것이 상호의존하고 있음을 말하고,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고 하는 것은 이것과 저것이 조건하여 발생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연기법은 조건발생뿐만 아니라 조건소멸도 늘 함께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조건발생하는 생멸만 있다고 하면 우리는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조건소멸하는 법도 있기 때문에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은 네 구절로 되어 있는 연기송이 확장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이분법이나 흑백논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소위 유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 단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을 연결시켜 주는 그 무엇이 있음을 말합니다. 연기법에 따르면 조건(paccaya:)’이라 볼 수 있습니다. 조건이 있기 때문에 이것과 저것이 연결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상호작용입니다.

 

이분법적 흑백논리는 극복되어야

 

유승무교수는 이것과 저것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세 가지를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태극을 예로 듭니다. 태극을 보면 음과 양이라는 이분법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 틈새가 있는 것입니다. 태극이라는 하나의 단위 안에 두개의 성질이 있는 것에 대하여 연결성으로 설명합니다.

 

세발솥이 있습니다. 발이 세 개인 솥을 말합니다. 발이 세 개인 것이 가장 안정상태라 합니다. 발이 네 개인 것이 안정된 것 같이 보이지만 세 발처럼 안정적인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 발로 선 것에 대하여 정립(鼎立)’이라 합니다. 정립은 가장 균형되고 안정된 상태입니다. 만약 두 극단만 있다면 싸움이 그칠날이 없을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와 진보라는 두 거대 정당만 있다면 사활을 건 싸움이 끊일 날이 없을 것입니다. 3의 정당이 있어서 어느 쪽도 독주를 하지 못하게 한다면 정치와 사회는 안정될 것입니다. 이분법적 흑백논리만 있다면 사회는 각박해질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자신과 타자사이에 아무 것도 없다면 늘 대립하고 반목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서구의 사고방식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자아와 타자로 구분되는 이분법적 서구의 특수한 사고방식이 전인류에게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 들여지도록 강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서세동점이라는 제국주의로 나타났습니다.

 

이분법적 흑백논리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서구의 특수한 사고방식으로는 극복되지 않습니다. 그 대안은 동양의 사고방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태극이라든가, 세발로 서는 것(鼎立) 것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사상적으로는 연기법입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이분법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은 상호의존과 조건발생, 조건소멸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연기법에 양극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든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무양극단은 연기법적으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영원히 변치 않는 자아를 말했을 때 연기법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고정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연기의 조건소멸에 따르면 영원히 변치 않는 영혼이나 자아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은 단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따라서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단멸을 주장한다면 이는 거짓입니다. 누구든지 행위를 하는 한 행위에 대한 과보가 따르기 때문에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연기의 조건발생에 따라 재생의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코드와 사회의 코드가 결합 했을 때

 

이성을 중시의 서구의 사조에 따르면 자아와 타자로 구분되는 이분법이 됩니다. 문제는 이분법은 필연적으로 흑백논리를 수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흑백논리로 일관하면 싸움이 그칠날이 없어서 각박해집니다. 대안은 동양적 사고방식입니다. 자아와 타자사이에 완충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유승무교수는 마음사회학으로 설명합니다. 마치 음양이 어우러진 태극을 연상케 하는 도면을 하나 제시했습니다. 이를 마음의 코드와 사회의 코드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타자와 관계를 맺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코드와 사회의 코드가 결합되었을 때 다양한 경우의 수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음의 코드에는 탐욕이 있으면 금욕이 있고, 사회의 코드에는 지불이 있으면 비지불이 있습니다. 만일 개인의 탐욕과 사회의 지불이 결합되면 과소비가 됩니다. 금욕과 비지불이 결합되면 절제가 됩니다. 이처럼 마음의 코드와 사회의 코드는 상호침투해서 결합된다는 사실입니다.

 

유승무교수의 마음의 코드와 사회의 코드의 결합이론에 따르면, 자아와 타자가 이분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연결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중중무진의 결합에 대하여 유승무교수는 서구이론 전체를 갈아 엎는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이를 사이이론으로 설명합니다.

 

유승무교수의 사이이론

 

유승무교수가 준비한 자료는 도표를 포함하여 모두 13페이지에 달합니다. 이 많은 자료를 다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하여 설명하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마음과 사회를 결합한 새로운 시도에 대한 글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사(際事)’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이 말은 유승무교수가 만들어낸 신조어입니다. 이를 사이이론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제사라는 말은 양자사이에서 찰라생 찰라멸 하는 사건이나 사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나아 타자 사이에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작동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서구의 소통이론은 자아와 타자의 절대적 이분법적 분리에 근거하고 있는 반면에 동양사상은 자아와 타자의 불가분의 관계에 기초하여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 왔다. 실제로 동양사상의 경우, 연기법이 이것이 실체가 아니라 저것의 지시체이고 저것이 이것의 지시체이듯, 타자(인간이든, 사물이든, 사건이든, 사회이든), 타자와의 관계, 타자경험 등은 자아의 존재기반이다. 또한 동양사상의 경우, 이것과 저것의 사이의 작동에서 법계연기의 실상이 드러나듯, 자아와 타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동 즉 제사(際事)야말로 지금 여기의 실상을 의미한다.”(유승무교수, 마음의 소통과 마음사회의 사회학)

 

 

유승무교수에 따르면 중간영역은 있다라 했습니다. 자아와 타자사이에 이분법적이고 흑백논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중중무진연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치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는 상호의존의 법계연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타자는 내 존재의 조건이 되는데, 이와 같은 타자성에 대하여 소셜(social)’을 만들어 가는 능력이라 했습니다.

 

언어보다 마음으로 말할 때

 

요즘은 문자로 소통하는 시대입니다.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카톡이 대표적입니다. 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문자로 소통합니다. 그런데 문자로 소통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자를 보냈는데 답신을 하지 않을 경우 오해 하기 쉽습니다. 침묵도 대화라 하는데 침묵이 길어질 때 흔히 하는 말이 씹는다또는 쌩깐다라 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무시입니다. 답신을 제때에 하지 않았을 때 무시한다고 오해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와 문자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언어 이전에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으로도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함께 앉아 있을 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도 통하는 것입니다. 석영중 교수의 인문학 강좌‘톨스토이 불륜을 말하다’에 따르면, 안나와 브론스키의 불륜커플은 사랑을 확인하기 위하여 끊임 없이 말을 하며 사랑을 확인하지만, 레빈과 키티의 성장커플은 눈으로 말합니다. 말보다 눈빛이 더 진실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마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문자로서 다 소통할 수 없습니다. 또 말로 다 소통할 수 없습니다. 문자와 말을 넘어서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의 영역입니다. 자신타 타인 사이에는 단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통하는 매개체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마음의 전달물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분위기일 것입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어떤 사람과 함께 있으면 편안합니다. 반대로 불편한 사람도 있습니다. 말로로서는 설명이 안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대체로 착하고 건전한 생각을 가진 자와 함께 하면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을 가진 자와 함께 있으면 분위기가 무겁습니다. 언어 이전에 마음이 먼저 아는 것입니다.

 

나와 타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그 사람을 잡으려면 말보다는 마음입니다.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조건입니다. 연기법에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원리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 조건은 공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 됩니다. 그리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사섭법에서 말하는 동사(同事)’입니다.

 

동사는 고락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동등한 배려를 뜻합니다. 마치 아이에게 눈높이를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겸청했을 때, 즉 겸손하게 들어 주었을 때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것입니다. 마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나와 타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습니다. 유승무교수의 강연을 듣고 시를 하나 써 보았습니다.

 

 

나와 네 사이에 사이가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공간이 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내가 있으므로 네가 있고

네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

너와 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파장이 있다.

육육법에 따라 호와 불호,

쾌와 불쾌가 일어난다.

지은 업이 무겁고 더러우면

사이가 왜곡되어 뒤틀린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의 행위로 파장이 일어난다.

촘촘한 관계 그물망에

파장이 일면 우주가 재편된다.

 

나는 네게 가벼운 존재인가

무거운 존재인가.

함께해서 즐거운 존재인가

괴로운 존재인가.

 

절대적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업의 무게에 따라

시간이 달리 흐른다.

 

나의 운명은 네 운명이다.

나의 사소한 행위가

네 운명을 가른다.

나와 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

 

 

2017-12-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