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초기경전이 있는 곳이 바로 절이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8. 5. 22. 10:27

 

초기경전이 있는 곳이 바로 절이다



 부처님오신날에

 

오늘은 부처님오신날입니다. 불자들은 원찰에 가서 등을 달고 법문을 듣고 비빔밥을 먹는 것으로 해야 할 일을 다하는 듯합니다. 불자들은 한 곳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있는 절을 찾아 이날 하루에 두 곳 또는 세 곳을 순례합니다. 그 이상 가는 불자들도 있고 집에서 조용히 쉬는 불자들도 있습니다.

 

불자들이 절에 가면 자신과 가족을 위한 기원을 합니다. 건강, 학업, 사업, 치유  이른바 사대기도를 합니다. 이밖에 다양한 소원을 불보살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 그분이 어떤 분이고,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아는 것입니다.

 

가르침은 잘 설해져 있습니다. 오늘날 전승된 경전이 이를 말합니다. 그중에서도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부처님 그분이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 주고자 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맛지마니까야, 디가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와 같이 이른바 사대니까야와 함께 담마빠다(법구경), 숫따니빠따 등과 같은 쿳다까니까야를 포함하면 오부니까야가 됩니다. 어느 것을 열어 보아도 하나도 틀림 없는 부처님 말씀입니다.

 

경전을 매일 열어 보아야

 

경전을 매일 열어 보아야 합니다. 하루라도 경전을 보지 않는다면 탐, , 치에 물들어 마음이 거칠어집니다. 어느 경전이라도 좋습니다. 서가에 꼽혀 있는 아무 경전이나 펼쳐서 단 몇 줄이라도 읽는 순간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오염된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보립니다.

 

살아 가면서 보기 싫은 것도 들어야 하고 듣기 싫은 것도 들어야 합니다. 눈이 있어서 보아야 하고 귀가 있어서 들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눈감고 귀막고 살 수 없습니다. 보긴 보되 지혜로써 보아야 하고 듣긴 듣되 지혜로써 들어야 합니다. 초기경전에는 지혜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합니다.

 

매일 청정도론을 보는데

 

부처님 가르침은 쉽지 않습니다. 알면 알수록 오묘하고 심오해서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설했지만 깊게 사유하지 않으면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럴 경우 주석서가 필요합니다.

 

초기경전만을 읽어서는 그 깊은 뜻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각주를 참고하면 이해하기 훨씬 수월합니다. 부처님의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주석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 체계적이고 이해하기 쉽게 써 놓은 것이 논서입니다. 청정도론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 매일 청정도론을 보고 있습니다. 교정작업중이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1600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내용을 일일이 빠짐없이 샅샅이 훝어 보아야 합니다. 벌써 두 번째 보고 있습니다. 생업도 바쁘고 재가불교활동도 해야 하고 글도 매일 써야 하는 입장에서 매일 몇 페이지씩이라도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청정도론을 보다 보니 내용이 너무 좋습니다. 메모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읽고 있는 중에 청정도론요약노트를 만들었는데 백페이지가 훌쩍 넘었습니다. 나중에 글 쓸 때 참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보아서 내것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청정도론에서 본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두 번째 보는 청정도론에서 제15장 감역의 세계에서 좋은 문구가 보였습니다. 메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글로 남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열두 감역, 12처에 대하여 소견의 관점에서 일체의 조건지어진 유위의 감역은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다.”(Vism.15.15)라 했습니다. 여기서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마치 대승경전 잡아함경에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잡아함 13 335)에서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느니라 (有業報而無作者)”라는 문구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들은 생성 이전에는 어디에서도 오지 않고, 소멸 이후에는 어디로 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성 이전에는 아직 고유한 본성이 획득된 것이 아니고, 소멸이후에는 고유한 본성이 완전히 부수어진 것이고, 전제와 후제의 중간에는 조건에 의지해서 작용하기 때문에 자재가 없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활동을 행하지도 않는다.”(Vism.15.15)

 

 

청정도론은 5세기에 붓다고사가 앗타깟타(aṭṭhakathā)라는 고주석에 근거하여 쓰여진 것입니다. 비록 5세기에 쓰여진 것이라 해도 고주석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오래된 논서라 볼 수 있습니다. 한역 잡아함경에 실려 있는 제일공경은 빠알리니까야에서 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한역대승경전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제일공경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云何第一義空經諸比丘眼生時無有來處滅時無有去處如是眼不實而生生已盡滅有業報而無作者此陰滅已異陰相續除俗數法意亦如是說

 

어떤 것을 제일의공경이라고 하는가? 모든 비구들이여, 눈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에도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눈은 진실이 아니건만 생겨나고, 그렇게 생겼다가는 다시 다 소멸하고 마나니,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느니라. 이 음()이 소멸하고 나면 다른 음이 이어진다. 다만 세속의 수법(數法)은 제외된다. 귀·코·혀·몸·뜻도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하겠으나, 단 세속의 수법은 제외된다.” (위키백과, 제일의공경)

 

 

제일공경을 보면 눈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에도 가는 곳이 없다.”라 했습니다. 이 말은 청정도론에서 12처를 설명할 때 유위의 감역은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다.” (Vism.15.15)라 한 것과 똑 같은 말입니다. 이런 말은 니까야에서 볼 수 없고 오로지 논서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잡아함경에 실려 있는 제일공경은 논서에 있어야 할 내용이 경전이라는 이름으로 유포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식은 자재없이 일어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시각의식이나 청각의식 등 의식은 자재없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자유자재로 의식을 일아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조건발생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는 것도 아니거 가는 것도 아니라 했습니다. 한번 발생한 것으로 끝입니다. 다만 조건 발생일 따름입니다. 이어지는 문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시각과 형상등은 이와 같이 ! 우리의 화합에 의해서 의식이라는 것이 생겨날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감관의 문으로서나 토대로서나 대상으로서나 의식의 생성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고 활동을 행하지도 않는다. 시각과 형상 등이 화합할 때에 시각의식 등이 발생하는 것은 그 법성일뿐이다. 그러므로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고 활동을 행하지도 않는다고 볼 수 있다.” (Vism.15.15)

 

 

청정도론에서는 법성(法性)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법의 성품이라는 뜻입니다. 법성은 빠알리어로 담마따(Dhammatā)라 하는데 일반적으로‘a general rule; nature’의 뜻입니다. 대승에서 말하는 불성도 법성의 범주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런데 법의 성품이라는 것은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고 활동을 행하지도 않는다.”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의 이치대로 작용할 뿐입니다. 다만 불교에서는 조건발생에 따른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S35;107)” 라고 한 것에 대하여 ! 우리의 화합에 의해서 의식이라는 것이 생겨날 것이다.” (Vism.15.15)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각의 문을 수호하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 가르침 중에 늘 새겨 들어야 할 것 중에 수 많은 것이 있지만 늘 새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계행을 갖추는 것과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 (A4.37)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를 네 가지 불퇴전의 원리라고도 합니다. 이 중에서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indriyesu guttadvāro)이 여섯 감역(六處: āyatana)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습니다. 육처에는 내적감역과 외적감역이 있는데 주와 객으로 분리할 수 없는 대등한 관계로 봅니다.

 

감각의 문을 수호하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내적 감역은 항상하고, 아름답고, 안락하고, 실체가 있는 상태가 없는 까닭에 텅 빈 집과 같고, 외적감역은 마을을 약탈하는 강도처럼 볼 수 있다.”(Vism.15.16)라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상윳따니까야 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S35.238)’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또한 내적감역에 대하여 여섯 가지 동물과 같고, 외적감역에 대해서는 그것들의 행경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상윳따니까야 여섯 가지 동물의 경(S35.247)’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왜 강도의 비유와 동물의 비유를 들어 육처를 설명했을까? 그것은 마음의 제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마음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것은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시각능력의 문을 수호하지 못했을 때 수행승들이여, 시각은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마음에 들고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상들 때문에 약탈된다.”(S35.238)라고 설한 가르침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어하지 못함에 대하여 이렇게 설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수행승들이라도 몸에 대하여 바른 새김을 수행하지 않고, 익히지 않으면, 시각은 마음에 드는 형상들 안쪽으로 끌어당겨지고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상들이라고 배척한다. 수행승들이여, 제어하지 못함이란 이와 같다.”(S35.247)

 

 

결국 새김(sati)입니다. 알아차리지 못하면 강도에게 약탈당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늘 깨어있음에 전념(jāgariya anuyutto)하라고 했습니다. 음식절제를 하는 것(bhojane mattaññū)도 알아차림을 유지했을 때 가능합니다. 이 모든 것은 계행을 갖추는 것(sīlasampanno)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라면 반드시 네 가지 원리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계행을 갖추는 것과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 원리를 갖추면 수행승은 열반을 앞에 두고 있는 것이므로 퇴전할 수 없다.”(A4.37)라 했습니다.

 

초기경전이 있는 곳이 바로 절이다

 

오늘은 부처님오신날입니다. 북방불교에서는 탄생만을 기리지만 일주일 후에 치루어지는 베삭에서는 탄생, 성도, 열반 이렇게 세 가지를 기념합니다. 부처님오신날이라 하여 법문듣고 등달고 비빔밥 먹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생활화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경전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불자들은 심산유곡에 있는 절을 찾아 갑니다. 그러나 절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초기경전이 있는 곳이 바로 절입니다. 경전을 열면 얼마든지 가르침을 접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 내가 있는 곳이 절입니다. 부처님오신날 경전을 열어 보고 삼보의 공덕을 새겨 보는 것은 커다란 선업 쌓는 것이 됩니다.

 



 

2018-05-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