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상태에 정복되지 않으려면
싸밋디의 경에서
초기경전을 읽다 보면 이해가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해 부족에 따른 것입니다. 초기경전은 잘 설해진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부분만 읽어서는 제대로 파악하기 힘듭니다. 전체적인 맥락을 보아야 합니다. 단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문맥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더 좋은 것은 오부니까야를 꿰고 있으면 가장 이상적입니다. 한가지 주제에 대하여 이곳 저곳 도처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니까야에서는 자세하게 설해진 경우도 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싸밋디의 경에서 본 게송이 대표적입니다. 상윳따니까야 ‘싸밋디의 경(S1.20)’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하늘사람]
“수행승이여, 그대는 향락없이 걸식하네.
향락을 누리고 나서 걸식하지 않네.
수행승이여, 시절이 그대를 지나치지 않도록
향락을 누리고 나서 걸식하시오.”(S1.20)
하늘사람은 젊은 수행승을 유혹합니다. 젊은 나이에 출가한 수행승에게 젊었을 때 감각적 욕망을 마음껏 즐기라고 말합니다. 좋은 시절은 한번 지나가면 오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절이 그대를 지나치지 않도록”이라 합니다. 여기서 시절은 ‘kālo’를 말하는데 이는 ‘Time; right time’의 뜻입니다. 그런데 하늘사람이 말하는 시절과 수행승이 생각하는 시절이 다릅니다. 수행승은 이렇게 답송합니다.
[싸밋디]
“그대가 말하는 시절을 나는 모르네.
그 시간은 감춰져 있고 볼 수도 없으니,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나는 향락 없이 걸식하며 사네.”(S1.20)
여기서 싸밋디는 수행승의 이름입니다. 수행승이 생각하는 시절은 주석에 따르면 ‘죽음의 시간(maranakāla)’입니다. 하늘사람이 말하는 시절은 ‘청춘의 시절(yobbanakāla)’입니다. 서로 시절에 대한 핀트가 다른 것입니다.
하늘사람은 젊은 수행승을 가엽게 보아 청춘의 시절의 감각적 욕망을 마음껏 즐기라고 말하는데, 반면 수행승은 죽음의 시절을 지나치게 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죽음을 맞지 않겠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다름 아닌 불사입니다. 열반을 이루어서 나고 죽는 일이 없는 불사의 경지에 이루고자 함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온의 죽음을 극복해야 합니다.
가장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상윳따니까야 싸밋디의 경에서 가장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늘사람은 젊은 수행승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에 있습니다.
[하늘사람]
“수행승이여, 그대는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수행승이여,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십시오.”(S1.20)
여기에서 이해 가지 않는 문장이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십시오. (Mā sandiṭṭhikaṃ hitvā kālikaṃ anudhāvīti.)”라는 말입니다. 초불연에서는 “목전에 분명한 것을 제쳐두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하지 마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두 번역은 ‘시간에 매인 것’과 ‘시간이 걸리는 것’의 차이입니다. 이는 ‘kālika’를 번역한 것인데 영어로 ‘belonging to time, in time’의 뜻입니다. 그러나 단어자체의 해석만으로 문장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에 수행승은 “벗이여, 나는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에 매인 것(kālika)’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 말은 현재와 관련이 있습니다.
청정도론에서 발견한 문구
수행승은 목적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가르침을 실천하여 열반에 이르기 위함입니다. 그런 목적이 없다면 굳이 출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들처럼 젊은 시절을 즐기며 살아 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머리가 칠흑처럼 검은 나이에 출가한 것은 괴로움과 생사윤회를 끝내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악마의 유혹도 물리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문구가 맛지마니까야 ‘마하 깟싸빠와 한밤의 슬기로운님의 경(M133)’에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은 청정도론 제13장 곧바른 앎을 읽다가 발견한 것입니다.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한밤의 슬기로운 님의 경’에서 “벗들이여, 정신과 사실들 그 양자는 현재 생겨난 것인데, 의식이 그 현재 생겨난 것들에 대한 욕망과 탐욕에 묶이고, 의식이 욕망과 탐욕에 묶이기 때문에 그것에 즐거워합니다. 그것에 즐거워하면, 사람은 현재의 상태에 정복된다.”라고 설한 것이다.”(Vism.13.114)
청정도론에서는 경전문구를 인용하여 ‘타자의 마음을 꿰뚫는 앎(他心通)’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용문에서 핵심문구는 “현재의 상태에 정복된다.”라는 말입니다. 이말은 싸밋디의 경에서 ‘시간에 매인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시간에 정복되는 것과 시간에 매이는 것을 같은 의미로 보는 것입니다. 시간에 정복된다는 것은 ‘욕망과 탐욕에 묶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시각, 청각 등 여섯 감각기능에 현재가 묶여 있으면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이는 또한 시간에 정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 욕망에 대한 것입니다.
맛지마니까야에 유사한 문구가
보는 것, 듣는 것에 마음을 둔다면 대상에 묶이게 되고 시간에 매이게 되어 현재가 정복되어 버리고 말게 됩니다. 수행승 싸밋디는 하늘사람이 지금 여기에서 감각적 욕망을 즐기라고 했을 때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욕망의 대상을 즐기게 되었을 때 시간에 매이게 됩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수행승은 “나는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S1.20)라 했습니다.
현재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감각적 욕망에 대상에 묶이지 않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게송에서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M133)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항상 현재에 두고 있을 때, 즉 늘 싸띠(sati)를 유지하고 있을 때 감각적 욕망의 포로가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확인 됩니다.
“벗들이여,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람이 현재의 상태에 정복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현재 나의 시각은 이와 같고 그 형상들은 이와 같다.’라고 생각하면서 의식이 그것에 대한 욕망과 탐욕에 묶이지 않고, 의식이 욕망과 탐욕에 묶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즐거워하지 않으면, 사람은 현재의 상태에 정복되지 않습니다.”(M133)
이 문장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 이렇게 여섯 감각능력에서 시각에 대한 것입니다. 경에서 핵심문구는 “어떻게 하면, 사람이 현재의 상태에 정복되지 않습니까?’라는 구절입니다. 이 말은 싸밋디의 경에서 “나는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S1.20)와 같은 맥락입니다.
죽음의 시간이 나에게 다가 오기 전에
감각대상에 욕망과 탐욕으로 묶이지 않았을 때 시간이 매인 것이 아닌 것이 되고 현재를 사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살았을 때 죽음의 신도 눈치 채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승은 “그대가 말하는 시절을 나는 모르네. 그 시간은 감춰져 있고 볼 수도 없으니, 시절이 나를 지나치지 않도록 나는 향락 없이 걸식하며 사네.”(S1.20)라 한 것입니다.
수행승은 청춘의 시간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즐기는 시간에 관심 없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죽음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죽음은 감추어져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날이 오늘밤일 수도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면 절박한 것입니다. 머리에 불이 나도록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승은 죽음의 시간이 나에게 다가 오기 전에 열심히 수행하여 불사에 이르겠다는 다짐과 결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스터메틱(Systematic)한 빠알리니까야
두 개의 경을 언급해 보았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초기경전이 서로 연결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 게송으로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빠알리니까야는 ‘시스터메틱(Systematic)’하다고 말합니다.
2018-05-1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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