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참여불교, 2018년 7월 정평법회에서
자타가 이익되는 삶
사람들은 이익이 되지 않으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절대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매우 바람직합니다. 부처님도 이익되는 일을 장려 했습니다.
가장 먼저 자신에게 이익 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자애수행을 보면 가장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남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타인의 이익만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도하게 종교에 집착하는 행위도 해당됩니다. 대표적으로 길거리 전도사가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또한 과도하게 사회적 현상에 관심보이는 사람도 해당됩니다. 평생 운동만 하는 사람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이익은 등한시 한 채 타인의 이익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신만의 이익만을 위해 사는 사람보다 못하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자타가 이익되는 삶입니다. 자신도 이익이 되고 타인도 이익이 된다는 것은 자애의 실천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자가 남도 사랑할 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는 것이다.”(A5.20)라 했습니다.
정평법회는?
7월 정평법회가 장충동에 있는 불광산사에서 열렸습니다. 법당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법당을 빌려서 법회를 본 것입니다. 자체 법당이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법당을 가져야만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설령 법당을 갖추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매일 풀가동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일주일에 고작 몇 번 사용하고자 거액을 들이고 매일 상당한 비용의 임대료가 발생한다면 손실입니다. 법당을 공유하여 사용하는 것도 이 시대가 요청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정평법회는 2017년 11월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승가위주의 불교현실에서 한계를 느낀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승가에서 못하는 것을 재가에서 실천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평불에서는 이미 눈부처학교를 통하여 사회적 실천을 해 왔습니다. 강사를 초빙하여 강연을 듣고 토론하는 형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매년 한철에 그쳤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간 것이 정평법회입니다.
정평법회는 매월 한차례 열립니다. 이와 별도로 매월 한차례는 사회적 실천을 합니다. 최소한 한달에 두 번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실천적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철저하게 자신과 타인의 이익이 되는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타의 이익이 되는 삶의 실천에 정평법회가 있습니다.
정평법회는 정평불의 얼굴이자 정체성과 같습니다. 온라인에서 교류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오프라인 교류도 중요합니다. 최소한 한달에 두번은 모여서 사회적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법회를 연지 이제 9개월 째입니다.
법회는 여법하게
명종과 함께 법회는 여법하게 진행됩니다. 삼귀의 할 때에는 ‘불보, 법보, 승보’라 합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승보개념 문제를 불식시키기 위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 하지 않고, 그 대신에 “거룩한 승보님께 귀의합니다.”라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승보가 상가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또한 운율을 맞추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불보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법보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승보님께 귀의합니다.”라 합니다.
어느 법회이든지 입정이 있습니다. 대개 입정시간은 짧습니다. 그러나 입정시간은 최소한 5분 이상은 되어야 합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선정에 들 수는 없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충분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마음을 안정시켜 놓으면 집중할 수 있습니다.
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7월 정평법회 주제는 참여불교에 대한 것입니다. 동국대 불교대 박경준 교수가 ‘지구촌, 참여불교가 대세다.’라는 제목으로 법문했습니다.
참여불교에 대하여
참여라는 말은 익숙합니다. 아마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가 연상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여불교라는 말이 있습니다. 걷기명상으로 유명한 베트남 출신 틱낫한 스님이 최초로 사용한 말이라 합니다. 영어로는 ‘Engaged Buddhism’라 합니다.
참여불교라는 말은 실천불교, 민중불교 등과 동의어입니다. 공통적으로 ‘불교’라는말이 들어 있는데 이는 불교를 통하여 사회개혁을 하기 위한 실천운동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교사회개혁운동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현실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기복의 극복을 위하여
현실적 실천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기복의 극복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건강, 학업, 사업, 치유 목적으로 기도했을 때 기복적 불교로 변질 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가미니의 경’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 이교도들은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는 천도재와 유사한 행위를 했습니다. 경에 따르면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을 들어올려 이름을 부르고 하늘나라로 인도합니다.”(S42.6)라 했습니다. 이런 행위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촌장이여,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커다란 큰 돌을 깊은 호수에 던져 넣었다고 합시다.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그것을 두고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라고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한다면 촌장이여,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커다란 큰돌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합장하고 찬탄하고 순례한 까닭에 물 속에서 떠오르거나 땅위로 올라올 것입니까?” (S42.6)
여기서 큰돌은 악행을 하여 악업 지은 것을 말합니다. 오계를 지키지 않아 악처에 태어날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도한다고 하여 선처에 태어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반면 선업을 지었다면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버터나 기름처럼 물위에 떠 오를 것입니다. 오계를 지키는 생활을 하여 선처에 태어날 것임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저주하는 기도를 하여 악처로 떨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이유로 죽은 자에 대하여 천도재를 지내 주는 것이 의미 없음을 말합니다.
기복을 극복하는 것이 현실적 실천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까르마(Karma)입니다.”라 했습니다. 초월적이고 절대적 존재에 의존하여 기도의 힘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로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업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업자성정견(kammassakatādiṭṭhi)’을 말씀했습니다.
경전에서 본 참여불교
다음으로 사회적 실천입니다. 그런데 사회적 실천은 개인의 현실적 실천의 바탕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자가 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자를 구해 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스스로 진흙에 빠진 사람이 다른 진흙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M8)라는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킨 사람만이 참으로 다른 사람을 제어하고 수련시키고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다.” (M8)라 했습니다.
박경준 교수는 사회적 실천의 예로서 초기경전을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자애경에서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바쳐 구하듯, 이와 같이 모든 님들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Stn.149)라는 문구를 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자애의 마음은 가장 먼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자만이 가능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타인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행복한 자가 타인도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이는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사는 것이나 가까이 사는 것이나, 이미 생겨난 것이나 생겨날 것이나, 모든 님들은 행복하여지이다.”(Stn.147)라는 구절로도 표현됩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 “모든 님들은 행복하여지이다.(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가 자애실천의 핵심입니다.
박경준 교수는 또 사회적 실천으로 부처님의 탄생게를 들었습니다. 한역탄생게를보면 “천상천하유아독족 삼계개고아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 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여기서 삼계개고아당안지라는 말은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말이 강력한 사회적 실천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 사회적 실천으로 부처님의 전도선언을 들었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S4.5)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초기경전에는 개인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의 가르침으로 가득합니다. 팃낫한 스님이 참여불교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이미 부처님은 강력한 참여불교를 말씀 했습니다. 틱낫한스님의 주장한 참여불교라는 말이 처음이 아니고 또한 실천불교나 민중불교라는 용어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양문회의 거사불교운동
시대는 참여불교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80년대 유행하던 민중불교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개인적 수행으로 어느 정도 공부가 되었다면 현실에 참여해야 합니다. 마치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거사림 불교가 활성화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박경준 교수는 현실참여 불교의 예로서 근대 중국불교를 예로 들었습니다. 박경준 교수는 법문에서 두 사람의 참여불교를 실천한 자를 예로 들었는데 청말민국초의 양문회와 태허스님입니다.
양문회(1837-1911)의 경우 거사불교운동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양문회에 대하여 중국불학의 중흥조 또는 중국불교 부흥의 아버지라 합니다. 그것은 잠자는 불교를 일깨웠기 때문입니다. 불법이 가장 타락한 시기에 불경을 유포하여 대중들을 각성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경전에 바탕을 둔 거사불교운동은 각지에서 일어나 거사림불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중국의 대륙불교는 승가와 재가의 두 개의 불교 축이 있어서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견재하며 발전해 왔습니다. 공부가 된 자들의 현실참여의 결과일 것입니다.
오늘날 대만불교 활발발한 것은
참여불교를 실천한 자로서 태허스님(1889-1947)이 있습니다. 태허스님은 중국대륙에서 거사불교에 자극받아 승가를 개혁한 스님입니다. 박경준 교수에 따르면 태허스님은 ‘인생불학’을 주창했다고 합니다. 일종의 인생불교라고 볼 수 있는데 현실의 인생을 중시하고, 과학적 방법에 의거하고, 조직을 통해 대중의 역량을 결집하여 시대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활용한 것입니다.
태허스님의 참여불교는 양문회 등의 거사불교운동이 승가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거사불교운동 주창자들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첫째, 오직 출가자만 승려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둘째, 거사를 승려의 부류가 아니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셋째, 거사를 전적으로 속인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넷째, 거사를 복전(福田)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다섯째, 재가자 중에 스승의 전범이 없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여섯째, 백의의 일반인은 설법을 맡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일곱째, 재가자는 출가자의 계본(戒本)을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덟째, 출가자는 거사에게 가서 배우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홉째, 출가자는 (재가자에게) 절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열 번째, 출가자는 거사와 서열을 논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불교평론, 중국불교는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이와 같은 거사불교운동은 결국 출가자의 공분을 샀습니다. 그리고 승가에서는 위기를 느꼈습니다. 이에 태허스님 등 개혁의지에 불타는 스님들은 승가를 바꾸어 나갔습니다. 그 결과 승가는 개혁되었는데 오늘날 대만불교에서 결과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만불교에서 태허스님의 승가불교 전통이 살아 있습니다. 태허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자재공덕회를 창립한 증엄스님과 불광산사를 창립한 성운스님 등이 대만불교의 주축입니다.
오늘날 대만불교가 이렇게 활발발한 것은 청말민국초의 양문회 등의 거사불교운동이 영향을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국대륙에서 거사불교운동은 승가를 각성시켜 결국 불교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참여불교
정평법회 7월 주재는 참여불교에 대한 것입니다. 결국 두 가지 참여가 있습니다.개인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입니다. 이는 개인적 실천으로 자기를 완성하고 사회적 실천으로 사회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여라는 말은 이미 부처님 가르침에 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참여불교입니다.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을 정의롭고 평화로롭게 만드는 것이 참여불교이고 이는 다름 아닌 가르침의 실천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고,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을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현재 한국불교는 극심하게 타락해 있습니다. 현재 25일째 이어지고 있는 설조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도 한국불교 타락을 저지하고 바꾸어 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습니다. 재가불자들이 깨어나지 않는 한 승가의 타락은 지속될 것이고 결국의 쇠망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재가불자들이 깨어나면 한국불교는 자연스럽게 개혁이 됩니다. 재가불자들이 스님들 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실천한다면 승가에 자극을 줄 것입니다. 중국대륙에서 거사불교운동이 결국 승가를 각성시켜 중국불교를 살려냈듯이, 한국에서 거사불교운동이 활성화 된다면 자동적으로 승가개혁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선봉에 정의평화불교연대가 있습니다.
2018-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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