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불교연대

한국불교가 죽어야 한국불교가 살아난다, 민중불교마저 비판한 휴암스님-9월 졍평법회

담마다사 이병욱 2018. 9. 16. 17:01

 

한국불교가 죽어야 한국불교가 살아난다, 민중불교마저 비판한 휴암스님-9월 졍평법회

 

 

그 스님은 모든 것을 부정했습니다.” 정의평화불교연대의 9월 정평법회에서 박종린 선생이 한 말입니다. 박종린 선생에 따르면, 휴암스님은 한 사람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철스님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휴암스님의 비판에 단 한사람도 살아 남은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정의평화불교연대 9월법회는 휴암스님의 장군죽비를 주제로 동국대 불교대학 박경준 교수의 법문이 있었습니다. 정평법회는 우리함께빌딩’ 6층에 있는 우리는 선우법당입니다. 매월 셋째주 토요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열립니다.

 

 




 

9월정평법회에서 휴암스님의 개혁사상에 관해 법문한 것은 요즘 한국불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적폐청산운동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년전에도, 십년전에도, 이십년 전에도, 아니 더 오래 전에도 늘 제기되었던 문제입니다.

 

한국불교가 문제 있다는 것은 누구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매번 똑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휴암스님이 활약하던 80년대와 90년대의 문제와 오늘날 문제되고 있는 것은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전면 부정한 휴암스님은 어떤 것을 주장했을까?

 




민중불교마저 비판한 휴암스님

 

휴암스님의 불교개혁론에 따르면 불교의 근본및 정체성회복, 숙명론적 인과사상의 혁파, 호국불교비판, 민중불교비판, 불교교육발전방안에 대한 것입니다. 한국불교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스님 답게 호국불교를 비판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80년대 새롭게 탄생한 민중불교를 비판한 것은 의외의 일입니다.

 

휴암스님은 왜 민중불교마저 비판의 대상으로 보았을까? 이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불교의 내적동기와 원칙에 근거한 사회참여 운동이 아니다.”라 하여 비판했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 80년대 사회적 분위기와 시류에 편승된 불교운동으로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휴암스님은 1967년에 출가했습니다. 그리고 1997년 파로호에서 입적했습니다. 휴암스님은 불꽃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출가한 이후 청담스님, 성철스님, 전강스님 등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선방에서는 무()자화두를 들었다고 합니다.

 

휴암스님이 한국불교를 전면 부정하고 심지어 성철스님 등 기라성 같은 스님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시대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휴암스님은 오로지 산중에서만 사는 은둔불교, 기복적이고 미신적인 불교, 권력의 하수인이 된 호국불교, 문중에 따른 파벌주의, 그리고 새롭게 대두된 민중불교를 비판했습니다. 이런 무차별적 비판에 대하여 모든 것을 전면 부정한다라고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활화산 같은 뜨거운 열기로

 

9월 정평법회에 처음 참석한 박종린 법사는 눈부처바라보기 시간에 휴암스님을 회상했습니다. 박종린 선생이 정평법회에 참석한 것은 휴암스님과의 개인적인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9월 정평법회를 알리기 위해 카페, 블로그, 페이스북, 밴드 등 이곳저곳에 올렸습니다. 그 중의 한곳이 재가결사 카톡방입니다. 박종린 선생은 재가결서 카톡방에 휴암스님과 개인적 인연을 다음과 같이 써 놓았습니다.

 

 

“70년대 중후반 구도회

청년대학생부 활동 시절에

큰 감명을 주신 분이

휴암스님입니다.

활화산 같은 뜨거운 열기로

저희 청년 여래들을 몰아치던

그 모습이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눈에 선합니다.

저를 개혁성향의 불자가

되게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신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휴암스님의 비판정신이

한국불교 현실에 온전히

적용될 때 새로운 활로가

열리게 되리라 믿습니다.

휴암스님의 각령이 이 땅에

원력 보살로 나투시길

부처님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발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나무아미타불 _(())_”

 


 


박종린 선생은 최근 삭발했습니다. 불력회 법사이기도 한 선생은 8 21일 전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에 대한 검찰의 공개수사를 촉구하며 삭발했습니다. 전통사찰방재시스템 구축에 국민혈세 2천억원이 배정됐는데 이를 알고서도 검찰이 수사를 진행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하여 항의차원에서 삭발한 것입니다.

 

박종린 선생에 따르면 70년대 중후반 휴암스님과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준 스님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고 회상합니다. 가까이 오면 모두 타버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름 있는 스님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생사해탈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휴암스님이 한국의 불교현실을 전면 비판한 것은 한국불교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박경준 교수는 불교평론에 발표된 [휴암 (休庵)]불교의 세속화, 기복화를 막아라’(2012-02-10)라는 자신의 논문을 인용하여 휴암스님의 불교개혁사상을 설명했습니다.

 

휴암스님이 활화산 같은 열정으로 가까이 오면 데일 정도로 정렬을 가졌던 것은 깨달음을 위한 삶을 추구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사해탈입니다.

 

생사해탈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한국불교는 문제투성이 이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기복불교는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여기에다 1985년에 출범한 민중불교마저 생사해탈 측면에서 본다면 시류에 편승된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민중불교마저 비판한 것은 박종린 선생의 말대로 한국불교의 모든 것을 부정했고, 한사람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입니다.

 

부처님의 혁명적 선언

 

휴암스님은 가까이 오면 데일 것 같은 사람이었고, 훨훨 타오르는 활화산 같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생사해탈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한국불교는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불교에 대하여 전면 비판했고, 이것이 전면 부정으로 까지 비추어졌는데, 이는 다름 아닌 자기부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기자신이 죽어야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자신에 대한 전면 부정은 자신에 대한 전면 긍정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부처님 가르침에서도 확인됩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M22)

 

 

여기서 ‘나의 것’은 갈애이고,‘나’는 자만이고, ‘나의 자아’는 유신견(有身見)을 말합니다. 특히 세 번째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자신에 대한 전면 부정입니다. 누구나 견고한 자아를 바탕으로 두고 사는데 부처님은 자아가 나의 것이 아니라고 혁명적인 선언을 한 것입니다.

 

정신-물질의 과정에 지나지 않은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부정했습니다. 오온에 집착한 것에 대하여 유신견이라 했습니다. 몸을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대하여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S22.99)라 했습니다. 느낌도, 지각도, 형성도, 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온은 내것이 아니라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하는  정신-물질적 과정에 지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을 전면 부정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자신이라 믿고 있었던 오온이 사실은 연기적으로 생멸하는 정신-물질 과정에 지나지 않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경전 도처에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M22)라고 했습니다. 유아를 버리고 무아의 삶을 살았을 때 새롭게 거듭 태어날 것이라 합니다.

 




고귀한 삶으로 거듭 나려거든

 

앙굴리말라는 연쇄살인자였습니다. 부처님을 만나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앙굴리말라의 경에서는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86)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이라는 말은 이전의 자신은 죽고 새롭게 태어난 자신을 말합니다. 유아에서 무아로 거듭 태어남입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려면 유신견을 타파 해야 합니다. 자아를 죽이지 않으면 새롭게 태어날 수 없습니다. 오온을 전면 부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장자여, 이 세상에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들은 고귀한 님을 보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리고, 참사람을 보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서, 의식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의식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나는 의식이고 의식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의식이고 의식은 나의 것이다.’ 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지만, 그 의식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 의식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장자여, 이렇게 하면 몸은 괴로워하여도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는 것입니다.(S22.1)

 

 



오온 중에서 의식에 대한 것입니다. 의식이 나의 것이 아님에 대하여 의식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라 했습니다. 몸도, 느낌도, 지각도, 형성도,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은 자신에 대한 전면부정입니다.

 

한국불교가 환골탈태하려면

 

휴암스님은 활화산 같은 열정으로 한국불교 현실을 비판했습니다. 그것은 생사해탈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전면 부정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이렇게 전면 부정했을 때 전면 긍정으로 전환 될 것입니다. 마치 몸과 마음이 자신의 것이라 여겼는데 이를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M22)라고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전면 부정했을 때 자아라는 속박에서 벗어납니다. 자아를 부수었을 때 무아(無我)가 되어 대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불교가 환골탈태하려면 기복불교, 미신불교 등 지금 여기에서 비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비판하고, 또한 부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할 것입니다.

 

휴암스님은 모든 것을 부정했습니다. 당대의 고승 성철스님마저 부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 한사람 부처님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되돌아 갔을 때 한국불교는 새롭게 거듭 태어날 것입니다. 한국불교가 죽어야 한국불교가 살아납니다.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을 만나 거듭 태어난 것처럼.

 

 

2018-09-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