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어떻게 해야 업(業)을 짓지 않을까? 멸진청정(滅盡淸淨)에 이르는 길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0. 1. 10:30

 

어떻게 해야 업()을 짓지 않을까? 멸진청정(滅盡淸淨)에 이르는 길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이 있는데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윤회는 인도의 전통사상일 뿐이라 합니다. 특히 힌두교의 사상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은 윤회를 말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과연 초기경전을 읽어 보고서나 하는 말인지 의문입니다. 초기경전을 한번만이라도 확인 했다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온라인상에서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체로 중도론에 입각하여 말합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의 논리입니다. 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 부정됩니다. 훼불행위도 이런 훼불행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의 공의 논리는 저 언덕으로 건너간 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현실에서는 여전히 윤회하며 사는 중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윤회가 힌두교 교리라 주장하는 것은 환생(還生: reincarnation)의 의미로서의 윤회를 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변치 않는 영원한 자아, 즉 아뜨만을 인정하는 힌두교에서는 영혼이 성장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티벳불교에서 말하는 환생과도 같은 개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는 조건발생하는 윤회입니다. 이에 대하여 우유가 요구르트가 되고, 씨앗이 나무가 되는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이전 것과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생(再生: rebirth)이라 합니다. 이와 같은 조건발생 윤회는 십이연기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자이나교도들의 윤회관과 해탈관

 

윤회는 인도사상 전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에서도 윤회를 이야기했고 자이나교도들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조건발생하는 윤회가 아니라 개체적인 자아를 가진 변치 않는 영혼이 윤회하는 것이라 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니간타의 경에 따르면 자이나교도들의 윤회관과 해탈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릿차비족 아바야가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 봅니다.

 

 

존자여, 니간타 나타뿟따는 이와 같이 걷고 있거나 잠자고 있거나 깨어 있거나, 항상 지속적으로 앎과 봄이 현전한다.’라고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고 일체의 경우에 대하여 앎과 봄을 선언합니다. 그는 고행을 통해 과거세의 모든 업의 파괴를 시설하고 부작을 통해 새로운 업의 다리를 파괴할 것을 가르칩니다.”(A3.74)

 

 

이 문장과 관련하여 전재성박사는 각주에서 ‘MN.71경을 참조하라라고 했습니다. 찾아 보니 맛지나니까야 세 가지 명지와 밧차고따의 경’(M71)입니다. 경에 따르면 걷고 있거나 잠자고 있거나 깨어 있거나, 항상 지속적으로 앎과 봄이 현전한다.’라는 말은 자이나교의 스승 니간타 나타뿟따가 주장하는 전지성(全知性)이라 합니다. 외도 유행자 밧차곳따가 부처님에게 부처님에게도 전지성이 있는지 물어봅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부처님을 비난하는 말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했을까?

 

부처님은 일체지자(sabbaññū)’입니다. 주석에 따르면 모든 것을 알고 보는 자라는 것이지만 과도한 것은 앎과 봄이 지속적으로 현전한다는 주장이다.”(Pps.III.195)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이 전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동시에 알 수는 없는 것이라 합니다. 접근 될 수 있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때 알 수 있는 것이라 합니다. 그럼에도 니간타 나타뿟따는 전지성뿐만 아니라 동시에 모든 것을 알고 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니간타 나타뿟따는 모든 것을 알고 보고 동시에 모든 것을 알고 본다고 선언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고행을 통해서 업장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업이 부수어지면, 괴로움이 부수어지고, 괴로움이 부수어지면, 느낌이 부수어지고 느낌이 부수어지면 일체의 괴로움이 정복될 것입니다.”(A3.74)라 했습니다. 여기서 업을 부순다고 하는 것은 고행으로 해탈함을 말합니다. 이는 영혼이 육체의 속박에서 풀려남을 의미합니다.

 

자이나교의 교리는 영혼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영혼은 육체에 속박 되어 있어서 육체의 속박으로 벗어나야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이를 해탈이라 하는데 육체의 고행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이나교도의 해탈론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고행에 대하여 극단이라 했습니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S56.11)라며 고행을 통한 해탈을 부정했습니다. 그 대신 양극단을 떠난 중도로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다름 아닌 팔정도입니다.

 

어떻게 해야 업()을 짓지 않을까?

 

자이나교도들은 고행을 통해 영혼이 해탈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팔정도를 통해서 해탈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팔정도는 계학, 정학, 혜학 삼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해탈하는데도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계학과 관련해서는 학습계율을 완성하고, 정학과 관련해서는 네 가지 선정을 성취하고, 혜학과 관련해서는 사성제를 이루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단계적 성취는 팔정도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이 후렴구처럼 들어갑니다.

 

 

그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과거의 업에 접촉할 때마다 그것을 부숩니다. 이것이야말로 멸진으로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A3.74)

 



 

여기서 핵심문구는 그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과거의 업에 접촉할 때마다 그것을 부숩니다. (So navañca kamma na karoti. Purāañca kamma phussa phussa vyantīkaroti.)”라는 말입니다. 초불연에서는 그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오래된 업을 닿는 족족 끝을 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번역에서 닿는 족족 끝을 낸다라 하여 다소 우스꽝스럽게 번역했습니다. 이는 ‘phussa phussa vyantīkaroti’를 번역한 것입니다.  

 

빅쿠보디는 “He does not create any new kamma and he terminates the old kamma having contacted it again and again.”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그가 지은 과거의 업이 자신에게 작용할 때 마다 그것을 없앤다.”(Mrp.II.3330라는 뜻이라 합니다.

 

새로운 업을 짓지 않음을 무엇을 말할까?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늘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라는 말입니다. 느낌이 갈애로 넘어가면 업을 짓는 것이 됩니다. 느낌에 대하여 좋고 싫음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면 집착하게 됩니다. 집착하게 되면 업으로서 존재가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 새로운 태어남을 유발하는 업을 짓는 것이 되어 윤회하게 됩니다.

 

과거에 지은 업을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을까? 아비담마 논장에 따르면 단지 작용하는 마음(作用心: kiriya citta)’만 내라고 합니다. 마음의 문(意門)을 통해 치고 들어 오는 생각을 단지 그렇네라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과보를 산출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작용만 하는 마음을 아라한의 마음이라 합니다. 번뇌 다한 아라한은 범부들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살지만 늘 알아차림을 유지하기 때문에 업을 짓지 않습니다.

 

고행에 집착하는 것은

 

자이나교도의 스승 니간타 나타뿟따는 고행으로 멸진청정(滅盡淸淨: nijjara visuddhi)에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고행이 아니라 계, , 혜 삼학을 닦아서 멸진청정에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멸진청정에 대한 방법론이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니간타 나타뿟따나 부처님이나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업(kamma)에 대한 것입니다.

 

업이라 번역된 깜마는 행위에 대한 것입니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는 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누군가 고행을 통해 과거의 업을 소멸하고 새로운 업을 짓지 않아 멸진청정에 이른다고 말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고행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십이연기에서 집착의 고리가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집착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집착, 즉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 실체의 이론에 대한 집착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집착이라고 한다.(S12.2)라 했습니다. 여기서 고행은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sīlabbata-upādāna)’이라 볼 수 있습니다.

 

멸진청정(nijjara visuddhi)에 이르려면

 

고행에 대하여 집착하는 자들은 초기경전에 따르면 개처럼, 소처럼 살아갑니다. 고행자들은 동물처럼 발가벗고, 먹고, 똥을 누고, 네발로 기어다니고, 맨땅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악업이 정화되고 새로운 업이 생기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이나교도들의 고행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고행대신 계정혜 삼학으로 멸진청정에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팔만사천법문을 한단어로 축약한다면 팔정도라 할 것입니다. 그런 팔정도는 계, , 혜 삼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팔정도에서 가장 선두에 있는 정견은 사성제입니다. 정견이 바로 서야 바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성제는 팔정도로 완성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성제와 팔정도는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 가는 것처럼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조건발생하는 윤회를 끝내려면 사성제를 알아 팔정도를 닦아야 합니다.

 

 

Catunna ariyasaccāna

yathābhūta adassanā,

Sasara dīghamaddhāna

tāsu tāsveva jātisu.

 

Tāni etāni diṭṭhāni

bhavanetti samuhatā,

Ucchinna mūla dukkhassa

natthidāni punabbhavoti.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

 

이들 진리를 보았으니

존재의 통로는 부수어졌고

괴로움의 뿌리는 끊어졌고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어졌네.” (D16, S56.21)

 

 

2018-10-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