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바보처럼 벙어리처럼 살라는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0. 17. 08:57

 

바보처럼 벙어리처럼 살라는 것은

 

 

바보처럼, 벙어리처럼

자신을 드러내야 하리.

현자는 참모임 가운데 있어도

때가 아니면, 말하지 말아야 하리.”(Thag.582)

 



 

테라가타에서 부처님 제자는 바보처럼 벙어리처럼 살자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입다물고 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때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꼭 말해야 할 때 침묵한다면 정말 바보이고 벙어리와 같을 것입니다.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하여

 

요즘 시대는 자신을 드러내는 세상입니다. 정보통신산업과 인터넷의 발달로 인하여 누구나 접속만 하면 자신을 알릴 수 있습니다. 블로그나 카페처럼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듯한 매체가 있는가 하면, 최근에는 카톡이나 밴드 그리고 페이스북과 같은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적 통신망에 글이나 자료 사진, 동영상 등을 올리는 행위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고 과시하는 것입니다. 좀 더 다르게 표현하면 잘난체 하는 것이고 자랑질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 거의 없었습니다. 신문이나 잡지 등이 있지만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자의 영역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일반사람이 논문을 쓰고 책을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남의 쓴 것을 보고 읽는 것 정도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스마트폰 시대에 누구나 자신을 과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존재감입니다.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하여 매체에 글을 올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문자메세지 하나만큼은

 

어떤 이는 실시간 소통의 대명사 카톡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카톡 울리는 소리가 거슬리기도 할 것입니다. 무음으로 해 놓는다고 해도 불이 들어오면 열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문자메세지하나만은 허용할 것입니다. 그것 마저 차단한다면 나홀로 고립되어 사는 것과 다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전달하고자 할 때는 주로 문자메세지를 이용합니다.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카톡이나 페이스북 등 실시간 통신을 하지 않습니다. 전달하고자 할 때는 문자메세지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답신을 하지 않으면 보았는지 보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메시지에는 반드시 답신을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예의일 것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알릴 때는 주로 문자메세지를 활용합니다. 이것 하나만큼은 열어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글을 올릴 때 순서가 있다

 

요즘은 블로그 뿐만 아니라 카페, 페이스북, 밴드, 카톡 등 거의 전사회적 통신망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 떠 올랐을 때 이를 문자화 하여 스스로 만족했을 때 가장 먼저 페이스북에 올립니다.

 

본래 페이스북은 아는 사이의 실시간 통신망이지만 요즘 페이스북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이나 다름 없습니다. 블로그와 달리 실시간 통신이 가능하다는 것이 최대의 장점입니다.

 

페이스북이 불특정 다수이긴 하지만 좋아요추천이나 댓글로 인하여 친한 사이가 됩니다.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글로서는 어느 정도 성향이 파악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글 쓰는데 영향을 줍니다. 그럼에도 마구 올리는 것은 강한 익명성에 바탕을 둔 것이라 봅니다.

 

페이스북에 먼저 올리고 난 다음에 밴드에 올립니다. 밴드 역시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는 사이라면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글이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 대하여 한번 더 생각해봅니다. 그 다음으로 카톡에 올립니다.

 

카톡에 올릴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한번 올린 것은 수정불가이고 삭제불가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3분이내로 삭제하면 삭제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삭제 했다는 흔적은 남습니다. 일종의 카톡의 진화라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블로그에 올립니다.

 

블로그에 올릴 때는 컴퓨터를 이용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오랜 습관입니다. 모바일에서 올릴 수 있지만 이제까지 써 온 형식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블로그를 찾는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이유로 올린 글은 최후로 블로그가 됩니다.

 

블로그는 전자책(電子冊)

 

블로그에 올린 글은 축적됩니다. 2005년 블로그를 개설하고 2006년부터 쓰기 시작 했으니 12년째 입니다. 그동안 축적된 글은 수천개에 달합니다. 거의 매일 하나씩 쓰다시피 했습니다.

 

실시간 소통매체가 발달한 요즘은 짧은 글과 중간글, 긴글 포함해서 하루에 두 세 번 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블로그는 철저하게 개인공간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일기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답글을 거의 하지 못합니다. 그대신 매일 새로운 글을 올리는 것으로 대신하겠다고 독자들에게 약속한 바 있습니다.

 

블로그에 올려진 글은 보통불자가 그날그날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일종의 개인사라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축적된 것을 책으로 내면 수십권에 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책을 내지 않습니다.

 

책을 내지 않는 것은 책을 낼 만한 역량 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굳이 책 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블로그가 다름 아닌 책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전자책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시공간을 구애 받지 않는 책입니다. 또한 블로그는 저장창고와 같습니다. 블로그 안에 있는 검색창을 이용하여 자료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진지한 글쓰기를 지향하며

 

살아가면서 기록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기록합니다. 이런 습관은 회사 다니던 시절 업무노트에 기록한 것이 시발입니다. 회의나 실험데이터, 심지어 그때 생각 등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버리지 않고 모아 두니 수십권에 달합니다. 누구도 알아 주지 않는 자료입니다. 그러나 인터넷에 올린 글은 이와 다릅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공개됩니다. 공개된다는 것은 공유가 가능함을 말합니다. 자기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알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책을 쓰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인터넷에 공개하지 않습니다. 논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신의 시간과 돈과 정력을 들인 글을 인터넷에 공개하는 사람은 매우 드문현상입니다. 그럼에도 공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류시화시인입니다.

 

페이스북에서 류시화 시인의 글을 읽었습니다. 시인은 책을 내기 전에 인터넷에 공개합니다. 인터넷에 공개한 것을 책으로 엮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책을 판매 하는 것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책이 더 잘 팔린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모든 것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불리한 내용도 공개합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릴 때는 책을 쓴다는 마음자세로 임합니다. 묶으면 한권의 책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함부로 글을 쓰지 않습니다. 이른바 진지한 글쓰기를 지향합니다.

 

글쓰기는 자기과시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행위는 구업(口業)입니다. 구업은 선업일수도 있고 불선업일수도 있습니다. 블로그나 카페, 그리고 카톡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 글을 올리는 행위는 모두 구업 짓는 행위입니다. 구업을 짓지 않으려면 침묵해야 할 것입니다.

 

글이 유익하면 다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글로 인하여 불편과 불쾌를 초래하면 불선업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인터넷에 글 올리는 행위는 자기과시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잘난체하는 것이고 자랑질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만입니다..

 

잘난체와 자랑질로 점철된 것이 에스엔에스입니다. 아무리 좋은 글을 올린다고 해도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되기 때문에 결국 잘난체와 자랑질로 귀결됩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었던 옛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바보처럼 벙어리처럼 살라는 것은

 

옛날에도 말이 많은 자는  자기과시하는 것으로 비추어졌을 것입니다. 결국 잘난체가 되고 자랑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테라가타에서는 바보처럼, 벙어리처럼 자신을 드러내야 하리.”(Thag.582)라 했을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바보가 아니고 벙어리가 아니지만, 바보처럼 벙어리처럼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자만을 끊자는 것입니다.

 

배운자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우월적 자만에 따른 것입니다. 배운자의 자만뿐만 아니라 부자의 자만과 태생의 자만도 있습니다. 큰집과 큰차를 타고 다니는 것도 부를 과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월적 자만이고, 삭발을 하고 승복 입는 것도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보통사람들과 달라.”라는 우월적 자만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들은 입이 있어도 함부로 얘기 하지 않았고 들어도 못들은 척 했습니다. 바보처럼 벙어리처럼 살라는 것은 자만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자만은 오상분결 중의 하나로서 아라한이 되어야만 사라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보처럼, 벙어리처럼, 눈먼 자처럼 살라고 했습니다.

 

 

“귀로 모든 것을 듣고

눈으로 모든 것을 본다.

슬기로운 자라면 본 것, 들은 것,

모든 것을 믿어서는 안된다. (Thag.499)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

생각건대 의취가 성취되었을 때

죽음의 침상에 누워야 하기 때문이다. (Thag.500)

 

 

2018-10-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