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즐기는 삶을 살면 악처에 떨어진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1. 22. 13:59

 

즐기는 삶을 살면 악처에 떨어진다

 

 

삶은 고통이다.”이 말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설령 그가 지금 행복한 상태라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한 고통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고통스런 자는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고, 지금 행복한 자는 천상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습니다.

 

천상의 삶을 살고 있는 자가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온갖 편의와 안락을 누리는 자는 천상이 부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예외 없이 늙고 병들어 마침내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게 됩니다. 그동안 안락한 생활은 지나 갔습니다. 병들고 늙고 추한 모습만 남아 있습니다.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색계와 무색계천신은 죽어서 어디로 갈까?

 

앙굿따라니까야에 무한세계의 경’(A3.114)이 있습니다. 공무변처, 식무변처,무소유처에 사는 천신입니다. 이곳에 사는 천신은 임종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왜 그런가?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일반사람들은 거기서 신들의 수명의 한계만큼 머물다가 그 수명이 모두 다하면,그들 신들은 모든 수명을 다 살고 지옥에도 가고, 축생에도 가고, 아귀계에도 간다.”(A3.114)

 

 

경에 따르면 공무변처의 존재는 수명이 2만겁입니다. 식무변처는 4만겁, 무소유처는 6만겁입니다. 일겁에 우주가 성주괴공하므로, 공무변처의 존재는 우주가 만 번 성주괴공할 때까지 오래 삽니다. 그런데 수명대로 살다가 죽을 때에는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경에서는 무색계의 중생이 갈 수 있는 곳은 지옥, 축생, 아귀계 중의 하나일 것이라 했습니다. 인간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수 만겁 선정의 행복을 누린 천신이 갈 곳이라는 악처뿐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천신이 악처에 떨어지는 경우는 무색계의 존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차이의 경’(A4.123)에 따르면 색계천신도 해당됩니다. 1겁을 사는 대범천, 2겁을 사는 소광천, 64겁을 사는 변정천, 500겁을 사는 광과천의 존재도 역시 지옥에도 가고, 축생에도 가고, 아귀계에도 간다.”(A4.123)라고 했습니다.

 

무색계이든 색계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지 않아 성자의 흐름에 들지 않았다면 윤회할 수밖에 없는 중생입니다. 그런데 천상락을 누리는 존재들이 복과 수명이 다 했을 때 가야 할 곳은 지옥, 축생, 아귀와 같은 악처라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즐기는 삶을 살면 악처에 떨어진다

 

천상의 존재들은 복과 수명을 보장 받습니다. 인간과 인간 이하 존재들은 수명이 보장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존재들에 대한 수명은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복과 수명이 보장된 것은 전생에 지은 공덕에 대한 선과보라 볼 수 있습니다.

 

선과보가 다 하면 남는 것은 악과보 뿐일 것입니다. 윤회하면서 선과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과보도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천상의 존재들은 선과보가 다 했을 때 남은 것은 악과보 뿐이라 악처에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한평생 즐거움만 누리고 산 사람들은 천상락을 누리고 산 사람들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신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듯, 오로지 쾌락만 누린 사람들 역시 죽음을 두려워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는 이런 즐거움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로지 쾌락에 빠져 살았다면 전생에 지은 공덕을 모두 까 먹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전에 지은 악업에 대한 과보만 남았습니다. 천상의 존재들이 임종을 맞이 하여 떠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것은 초기경전에 언급된 것처럼 모든 수명을 다 살고 지옥에도 가고, 축생에도 가고, 아귀계에도 간다.”(A3.114)라는 말일 것입니다.

 

천신이 죽을 때 징조가

 

천상락을 누린 존재들이 가야 할 곳은 악처입니다. 즐기기만 할 뿐 더 이상 선업공덕을 쌓지 않았을 때 전생의 악업과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천상의 존재에 대하여 이띠붓다까 주석을 보면 천상에 태어나면, 인간의 경우와는 달리 여래의 가르침에 거의 귀를 기우릴 수가 없다.”(ItA.II.78-79)라 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있는 인간에 태어나야만 존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천상의 존재는 무색계와 색계 뿐만 아니라 욕계도 있습니다. 무색계와 색계의 존재가 죽으면 악처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오로지 쾌락만 즐기는 욕계천상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천신이 죽을 때 징조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띠붓따까 징조의 경에 따르면 그의 화환이 시들고, 그의 의복이 바래고, 그의 겨드랑이에서 땀이 흐르고, 그의 몸이 추악해지고, 자신의 하늘보좌를 더 이상 기뻐하지 않는다.” (It.76)라 하여 다섯 가지 징조가 나타날 것이라 했습니다.

 

천신들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고 있습니다. 천신들은 인간의 계산으로 7일 후에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몸이 추해지는 등 죽음에 두려움에 떠는 것입니다. 마치 쾌락만을 즐기다 죽음을 맞는 부자들도 마찬가지 심정일 것입니다. 죽어서 어디로 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선업공덕은 다 찾아 먹었기 때문에 남은 것은 악업에 대한 과보입니다. 그래서 악처에 태어날 것이라 합니다.

 

삼십삼천 환희동산(nandanavana)

 

천상에는 어떤 즐거움이 있을까? 상윳따니까야 환희의 경’(S1.11)을 보면 환희동산(nandanavana)’이 있습니다. 삼십삼천에 있는 환락의 동산입니다. 그곳에서는 앗차라(accharā : 압사라)라 불리우는 무희들의 시중을 받으며 천상락을 즐기는 곳입니다.

 

경의 게송에서는 영예로운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하늘사람들이 살고 있는 환희의 동산을 보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알지 못하네. (S1.11)라 했습니다. 환희동산을 말하지 않고서는 행복이라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인간의 행복과는 비교되지 않는 행복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앙굿따라니까야 여덟 고리의 포살에 대한 상세의 경에서는 인간의 왕권은 천상의 행복에 비해 보잘 것이 없다.” (A8.42)라 했습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왕권의 행복을 누려도 천상에 비하면 십육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재벌의 행복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누구나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업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천상을 대하는 극과 극의 태도

 

어떤 존재라도 과거생에 한번쯤 선업공덕 쌓아 보지 않은 사람 없을 것입니다. 선업도 쌓고 악업도 쌓는 것이 범부들입니다. 그런데 요행히 천상에 태어난 경우도 있습니다. 청정도론에서 보는 개구리 만두까(maṇḍūka)이야기’(Vism.7.51)입니다.

 

청정도론 7장 여섯 가지 새김에 따르면 개구리 만두까가 삼십삼천에 태어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앙가국의 각가라 연못 언덕에서 짬빠시에 사는 주민을 대상으로 법문할 때 입니다. 한 개구리가 부처님의 목소리에 인상을 파악했습니다. 개구리는 부처님의 설법을 알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목소리만 들은 것입니다.

 

그때 한 목동이 지팡이에 의지해 있었는데 개구리가 있는 것도 모르고 짓이겨 죽였습니다. 그런데 개구리는 죽어서 곧바로 삼십삼천 천상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개구리라는 축생일지라도 과거전생에 선업이 과보가 익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목소리에 표상을 취한 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에 곧바로 천상에 태어났습니다.

 

개구리는 임종순간에 지은 업에 따라 행운이 주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구리는 즉각적으로 삼십삼천 천신이 되었습니다. 환희동산에서 무희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개구리 만두까는 ! 내가 여기에 태어나다니. 내가 어떠한 업을 지었는가?” (Vism.7.51)라며 자신을 의문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임종순간에 부처님 목소리에 표상을 추한 것 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 목소리에 충만한 마음이 되었을 때 목동의 지팡이 찔려 죽은 것입니다.

 

삼십삼천 환희동산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쾌락을 넘어 선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태어난 것을 불쾌하게 생각한 자도 있었습니다. 상윳따니까야 요정의 경에 따르면 요정들의 노래가 메아리치고 유령들이 출몰하는 숲은 무명의 숲이라 불리는데, 어떻게 그곳에서 벗어나랴?”(S1.45)라 했습니다. 환희동산을 유령의 숲이라 하고 앗차라와 같은 무희들에 대하여 유령같다고 했습니다. 개구리 만두까가 생각하는 것과 극과 극입니다. 이는 수행승이 죽어서 환희동산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한수행승이 있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그는 잠자는 것이나 음식 먹는 것을 무시하고 고행을 했습니다. 아마 고행주의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숲속에서 고행중에 풍병(風病)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뇌졸증 같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삼십삼천 환희동산에서 무희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마치 꿈속에서 장면이 바뀌듯이 순식간에 천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환락이 있는 천상은 자신이 바라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환락의 동산에 대하여 무명의 숲이라 하고 앗차라 무희들을 유령과도 같이 본 것입니다.

 

즐거움이 다하면 괴로운 과보만

 

천상이 좋은 곳이라 하지만 수명이 있습니다. 천년만년 영원히 천상에 머물러 있다면 사실상 지옥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공덕에 따라 수명을 달리하는데 경전적 근거가 있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여덟 고리의 포살에 대한 상세한 경에서는 욕계천상에 대한 수명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대왕천에 대해서는 인간의 오십 년이 네 위대한 왕의 하늘나라 신들의 하루 밤낮이고”(A8.42)라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색계천상에 대해서는 앙굿따라니까야 차이의 경에서 표현 되어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두 번째 선정과 관련 있는 극광천에 대해서는 빛이 흐르는 하느님 세계의 신들의 수명의 한계는 이 겁이다.”(A4.123)라 했습니다. 무색계 천상의 수명에 대해서는 앙굿따라니까야 무한한 세계의 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경에 따르면 공무변처천에 대해서는 공간이 무한한 세계에 속하는 하느님나라의 신들의 수명은 이만 겁이다.”(A3.114)라 했습니다.

 

수명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운명보다는 훨씬 나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무려 육만겁을 사는 무소유처의 존재도 수명이 다하면 두려움에 떤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에 따르면 지옥이나 축생, 아귀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 했습니다. 색계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논리에 따른다면 욕계천상의 존재도 말할 나위 없습니다. 즐거움이 다하면 괴로운 과보만 남은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야 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천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다음 생이 악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 개의 경전 차이의 경’(A4.123)무한한 세계의 경’(A3.114)에서 확인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비담마논장에서 다음 생에 받는 업과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는 업 등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청정도론에서는 후대의 생에서 과보를 받는 업이 없이 윤회 가운데 유전하는 뭇삶은 없기 때문이다.”(Vism.13.35)라 했습니다. 어떤 업이든지 지으면 과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과보를 받을 조건이 형성되었을 때 어떤 존재로든지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설령 선정수행공덕으로 색계나 무새계에 태어났다고 하여도 전생에 조금이라도 악업을 지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익었을 때 악처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에 따르면 천상에 태어났어도 악처로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Bhagavato pana sāvako tattha yāvatāyuka hatvā yāvataka tesa devāna āyuppamāa, ta sabba khepetvā tasmiyeva bhave parinibbāyati.

Aya kho bhikkhave viseso, aya adhippāyo, ida nānākaraa sutavato ariyasāvakassa assutavatā puthujjanena yadida gatiyā upapattiyā sati.

 

그러나 세존의 제자는 그곳에 수명이 있는 동안 살고, 그들 모든 신들은 모든 수명을 다 살다가 그 존재 가운데 완전한 열반에 든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은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과 배운 고귀한 제자와의 사이에 존재로 가는 것의 차이이자 차별이자 특성이다.”(A3.114)

 



 


앙굿따라니까야 무한한 세계의 경’(A3.114)에 실려 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에 대하여 배운 고귀한 제자(sutavato ariyasāvaka)’라 했습니다. 고귀한 제자 (ariyasāvaka)는 아라한을 제외한 사쌍팔배의 성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문맥상  불환자입니다. 이는 이띠붓따까 주석에서 범부와 흐름에 든 님(預流者)과 한번 돌아 오는 님(一來者)의 세 종류의 뭇삶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멍에와 존재의 멍에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윤회, 생사 가운데로 들어간다.”(ItA.II.123)라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예류자와 일래자는 한번 이상 윤회하지만 불환자는 색계나 무색계 천상에 태어나 그곳에서 수명대로 살다가 열반에 드는 것으로 봅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차이의 경’(A4.123)에도 위와 똑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빠알리문구는 똑 같은 번역에 있어서 윤회와 재생의 관점에서 바로 이러한 차별이 있고 이러한 차이가 있다.”라 달리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래 이 말은 아무리 천하고 고생스럽게 살더라도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낫다는 말입니다. 천상이 아무리 좋아도 인간만 못합니다.

 

천상에는 오로지 즐거움만 있을 뿐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정법이 살아 있는 인간세계에서는 가르침을 접할 수 있어서 윤회의 세상을 탈출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띠붓따까에서 죽음을 앞둔 천신들이 존자여, 여기서 가라. 인간의 동료가 되어 좋은 곳으로 인간이 되어 올바른 가르침에 위없는 믿음을 성취하라.”(It.77)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천상에 태어나면, 인간의 경우와는 달리 부처님의 가르침에 거의 귀를 기우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마치 부자들이나 권력자들이 쾌락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이유와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나면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과 믿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세상이 괴로움과 즐거움이 번갈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야 윤회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불선업에 대한 과보 괴로운 느낌으로

 

인간의 희로애락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괴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진리의 흐름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사성제의 길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괴로운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기가 유리함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본질적으로 어떤 것일까?

 

청종도론에 따르면 괴로움에 대하여 “‘고통이라는 것은 괴로운 느낌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것의 이숙으로서의 느낌이다.”(Vism.1.97)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괴로움은 과보로 나타나는 느낌임을 말합니다. 고통은 불선업이 익은 것임을 말합니다. 불선업에 대한 과보가 괴로운 느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괴로운 것을 알았을 때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할 것입니다. 고성제로 사성제의 시작입니다.

 

괴로움은 괴로움이 무엇인지 아는 것부터 해법이 있습니다. 괴롭다는 것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원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일까? 너무나 명백합니다. 초전법륜경에서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라 하여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이라 했습니다. 원인을 알았으니 답은 나온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서 팔정도를 닦아야 합니다. 정법이 살아 있는 인간세계에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윤회계를 탈출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2018-11-22

담마다사(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