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법(如法)한 죽음을 위하여
붉은 벽돌집 선원
유튜브 강좌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I스님은 “세상이 변하지 않고 영원히 그대로 있는 것이라면 출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 했습니다. 세상이 변하기 때문에 출가 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제행무상이라 하여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변하는 것 그것 하나 때문에 출가했을까? 그러나 말을 자세히 뜯어 보면 ‘죽음’과 관련 있습니다.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재 I스님은 크게 성공한 것 같습니다. 여법한 가람은 정법을 찾는 자들에게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정견이 바로 선 스님에게 사람들이 몰려 든 것은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춘천 외곽에 인도에서 가져 온 붉은 벽돌로 커다란 선원을 지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애써 현실과 타협하며
어렸을 적에 죽음이라는 말은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모든 것이 허무해지고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다만 애써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살려 하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현재 하는 일에 열중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죽음 앞에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예외가 없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인류의 사대성인 이라는 사람조차도 죽음을 비켜 갈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큰 족적을 남긴 영웅호걸도 도력이 높은 스님도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듯 보였습니다.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서는 아무것도 의미 없다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때 그런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애써 현실과 타협하며 여기까지 살아 왔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태어나면 죽어야만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죽음과 함께 하는 세상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죽어야 하나?’라며 고민한다면 현실의 삶에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종교가 바로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맛지마니까야 ‘랏타빨라의 경’(M82)에서 랏타빨라가 그랬습니다.
랏타빨라의 경을 보면 랏타빨라의 출가이유서가 있습니다. 세속적인 쾌락에 탐닉하며 살아 가던 랏타빨라가 어느 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합니다. 경에 따르면 네 가지 출가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은 불안정하여 사라진다.(Upanīyati loko addhuvo)”“이 세상은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Attāṇo loko anabhissaro)”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Assako loko sabbaṃ pahāya gamanīya)” “이 세상은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Ūno loko atitto taṇhādāso)”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랏타빨라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출가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죽음의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살아도 의미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랏타빨라는 네 가지 출가이유를 들어 출가 했는데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과 같습니다.
랏타빨라가 꼬라비야 정원을 걷고 휴식을 취할 때 꼬라비야왕이 발견했습니다. 꼬라비야왕은 평소 랏타빨라존자를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랏타빨라는 젊고 건강하고 재산도 많고 친지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출가한 것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네 가지 출가이유에 대하여 네 가지 상실로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 가지 상실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늙음으로 인한 상실
첫번째, 늙음으로 인한 상실입니다. 늙음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됩니다. 늙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짐이 될 뿐입니다. 이럴 때 하는 말이 ‘나도 출가한번 해볼까?’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노년출가는 쉽지 않습니다. 앙굿따라니까야 ‘노년의 출가의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노년의 출가자가 가르침을 따르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가르친 것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 설법을 하기 어렵다. 계율을 준수하기 어렵다.”라 하여 다섯 가지 노년 출가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이가 젊은 랏타빨라가 출가한 것에 대하여 왕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나 존자 랏타빨라는 지금 나이가 젊고 청년으로서 머리가 칠흑같고 젊음의 축복으로 가득 찬 인생의 초년기에 있습니다. 존자 랏타빨라에게는 그 늙음으로 인한 상실이 없습니다. 존자 랏타빨라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기에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습니까?”(M82)
머리가 ‘칠흑같이 검다’라는 표현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수행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상윳따니까야 ‘싸밋디의 경’에서는 “수행승이여, 당신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 받았으니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누리지 않고 출가 했습니다. 수행승이여,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S1.20)라고 표현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보통사람이 보기에 온갖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젊은 나이에 출가한 것은 도무지 이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출가하고 싶다면 나이가 들어 노년에 출가해도 될 것입니다. 젊어서는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정말 출가한다면 늙어서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테라가타에 따르면 기녀와 젊은 수행자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녀는 수행승에게 “젊어서 그대는 출가했다. 나의 가르침을 따르시오.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시오. 내가 재산을 주겠소. 정말 그대에게 약속하겠소. 아니면, 내가 불을 가져오겠소.”(Thag.461)라고 유혹합니다.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몸을 파는 기녀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더구나 기녀는 불 앞에서 불의 맹세를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늙어서 둘이서 지팡이에 의지하게 될 때, 둘이서 함께 출가하면, 두 곳에서 행운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것입니다.”(Thag.462)라며 노년출가를 이야기합니다.
세상사람들은 성자를 존경하기도 하지만 또 세상사람들은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일종의 시험에 들게 하기도 합니다. 기녀가 그런 케이스입니다. 성자를 유혹하는 기녀는 악마의 속삭임과 같습니다. 그러나 잘 배운 젊은 수행자는 “세존께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 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크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세존께서 말씀 하셨습니다.”(S1.20)라고 말할 것입니다.
부처님도 감각적 욕망의 쾌락에서 재난을 보고 출가 했습니다. 랏타빨라 역시 마찬가지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묶임에서 위험을 보고 왕이여, 나는 출가를 택했습니다.”(M82)라 했습니다. 그래서 랏타빨라는 첫번째 출가이유에 대하여 “이 세상은 불안정하여 사라진다.(Upanīyati loko addhuvo)”(M82)라 했습니다. 늙고 노쇠하고 고령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어 출가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상실
두번째, 질병으로 인한 상실입니다. 몸이 아프면 괴롭습니다. 병도 병 나름입니다. 감기처럼 시간 지나면 낫는 병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복불능의 중병일 때 죽음으로 이끌 것입니다.
중병에 걸렸을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일을 할 수 없어서 재산을 늘릴 수도 없고 학업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중병에 걸린 자가 마지막 수단으로 산중에 가서 ‘자연인’처럼 살거나 출가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랏타빨라는 젊고 건강한 나이에 출가했습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꼬라비야 왕은 랏타빨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존자 랏타빨라는 지금 병이 없고, 질환이 없고, 소화를 잘 시키고, 몸이 너무 차거나 너무 뜨겁지도 않습니다. 존자 랏타빨라에게는 그 질병으로 인한 상실이 없습니다. 존자 랏타빨라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기에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습니까?”(M82)
흔히 출가했다고 하면 ‘사연이 있는 듯하다.’라고 말합니다. 실연을 당했다거나, 재산을 상실했다거나, 친지의 죽음을 목격했다거나 등을 말합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병 때문에 출가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출가시켜서는 안될 사람의 유형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다섯 가지 질병으로 인한 출가입니다. 즉, 나병, 종기, 습진, 폐병, 간질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병을 가진 자가 승단에 들어 가는 것에 대하여 “거기서 수행승들이 보살펴 줄 것이다. 지바까 꾸마라밧짜는 치료해 줄 것이다.”(Vin.I.72)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질병을 가진 자들의 출가를 금했습니다. 질병을 목적으로 출가한 자들은 병이 나으면 환속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자는 건강의 고마움을 잘 모릅니다. 젊고 건강한 자가 젊음과 건강을 남용한다면 그것은 자신만만한 교만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젊음의 교만이고 건강의 교만입니다. 그런데 젊음의 교만은 늙어지면 무너지고, 건강의 교만은 질병에 걸렸을 때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특히 건강의 교만을 가진 자에게 “건강한 시절의 교만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버려지거나 약해진다.”(A5.57)라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나는 질병에 종속되었으며 질병을 벗어날 수 없다.”(A5.57)라고 자주 관찰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랏타빨라는 질병으로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랏타빨라의 출가이유 두번째 이유 “이 세상은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Attāṇo loko anabhissaro)”(M82)라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랏타빨라가 중병에 걸리지 않았어도 출가한 것은 삼계 어느 곳에서도 나의 안전을 보호해 주고 위로해 주는 곳이 없었음을 말합니다. 고통을 나누어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산의 상실
세번째, 재산의 상실입니다. 랏타빨라가 재산이 없어서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경에 따르면 랏타빨라는 꾸루의 툴라꽃티따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여럿 아내들도 있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랏타빨라가 출가한 것에 대하여 꼬라비야 왕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나 존자 랏타빨라는 툴라꼿티따에서 가장 훌륭한 가문의 아들입니다. 존자 랏타빨라에게는 그 재산으로 인한 상실은 없습니다. 존자 랏타빨라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기에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습니까?”(M82)
한번 형성된 재산은 그대로 있을까? 재산을 잘 운용한다면 증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산은 내버려 두면 점차 줄어 듭니다. 경에서는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부유하고 재산이 많고 재물이 많아도 차츰 그 재산은 줄어듭니다.”라 했습니다. 마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은행잔고가 텅텅 비는 것과 같습니다.
저 세상으로 갈 때 재산을 가지고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재산형성 과정에서 지은 업을 가져 갑니다. 이는 랏타빨라가 읊은 게송에서 “상속자가 그 재산을 가지고 가고 사람은 그 행위를 따라서 저 세상으로 가니”(M82)라는 말로도 알 수 있습니다.
랏타빨라의 출가이유 세번째를 보면 “이 세상은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Assako loko sabbaṃ pahāya gamanīya).”라고 했습니다. 랏타빨라는 재산이 상실되어 출가한 것이 아니라 지은 행위대로 가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출가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친지로 인한 상실
네번째, 친지로 인한 상실입니다. 세월이 감에 따라 하나 둘 떠나 갑니다. 불과몇 달전에 함께 했던 사람이 중병으로 세상을 떠 났을 때 언젠가 나도 저렇게 떠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친지들이 하나 둘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세상을 멀리 떠나 깊은 산중에서 살고 싶은 욕망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왕은 랏타빨라에게 이렇게 물어 봅니다.
“그러나 존자 랏타빨라는 툴라꼿티따에서 가장 많은 친구, 친지, 친척을 갖고 있습니다. 존자 랏타빨라에게는 이러한 친지로 인한 상실이 없습니다. 존자 랏타빨라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기에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습니까?”(M82)
랏타빨라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아내들도 많았습니다. 더구나 친지와 친척도 많았습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서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위치에 있었던 랏타빨라가 출가를 결행 했을 때 혹시 친지의 죽음에 따른 것이 아닌지 물어 본 것입니다. 그러나 랏타빨라는 친지의 상실로 출가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상태에서 출가한 것입니다.
언젠가 죽을 수 밖에 없다면 이 세상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불만족한 세상이 됩니다. 영원한 삶을 추구하거나 정반대로 단멸하기 원하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한편으로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는 다름 아닌 갈애에 따른 것입니다. 초전법륜경 집성제에 따르면 감각적 욕망의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이에 해당됩니다.
랏타빨라의 출가이유 네 번째는 “이 세상은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Ūno loko atitto taṇhādāso)”라는 말입니다. 랏타빨라는 사람들이‘이익과 욕망을 찾아 이것 저것을 탐하는 것’을 보고 출가를 결심한 것입니다.
랏타빨라의 네 가지 출가이유
랏타빨라에게는 네 가지 출가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첫번째 진리라 하여 “이 세상은 불안정하여 사라진다”라 했는데, 늙고 노쇠하고 고령이 되는 것
을 보고 출가 했습니다. 두번째 진리라 하여 “이 세상은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라 했는데, 고통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을 보고 출가 했습니다. 세번째 진리는 “이 세상은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라 했는데, 저 세상으로 갈 때 지은 행위대로 가는 것을 보고 출가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번째 진리는 “이 세상은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라 했는데, 이익과 욕망을 찾아 이것 저것을 탐하는 것을 보고 출가했습니다. 이렇게 출가이유가 분명한 자에게 흔들림은 없습니다. 랏타빨라는 열심히 정진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여법(如法)한 죽음을 위하여
죽음은 두렵고 애써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은 배고프면 밥을 먹습니다. 의과대학생이 시체해부실에서 식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죽음보다 감각적 욕망이 우선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음은 나와 무관하고 저 멀리 있는 것이고 나에게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고 죽음은 불쾌한 것이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 늙어 감에 따라, 병들어 감에 따라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는 것을 보면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직감하게 됩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결국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라면 죽음 앞에 너무나 무력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죽지 않는 방법을 생각해내게 되었습니다. 영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중론에서처럼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법적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삶도 생각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 ‘죽음이란 무엇일까?’라고 골똘히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럼 삶은 무엇일까?’라며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삶을 전제로 한 것이고, 또한 삶은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죽음의 문제는 곧 삶의 문제가 됩니다. 따라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말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말과 같게 됩니다.
테라가타에 “여법(如法)한 죽음이, 여법하지 못한 삶보다 낫다.”(Thag.670)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여기서 ‘여법한(dhammena)’ 죽음은 악을 행하지 않고 가르침으로 인한 죽음을 말합니다. 가르침대로 살다 죽는 것이 ‘여법한 죽음’임을 말합니다. 그러한 죽음은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아서 여법하고 천상계에 도달하거나 열반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현자들이 칭찬하는 죽음입니다.
여법하지 못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여법한 죽음이 낫습니다. 여법하게 살다 죽으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그 세계는 이제까지 한번도 본적도 접한 적도 없는 세계일 것입니다. 가르침대로 살다 죽는 자에는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죽음과 만나고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도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에 얻어맞아 누웠으나
현명한 자는 죽음과 만나도 두려움이 없습니다.”(M82)
2018-10-2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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