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깜냥(感量)으로 이야기하면 사견(邪見)
“인간은 죽으면 그냥 죽습니다. 죽을 뿐입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 이리저리 말을 붙여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은 자유지만 모두가 믿음에 기초한 추론이고 짐작일 뿐 쓸데 없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밥먹을 때 오로지 밥먹고 잠잘 때는오로지 잠을 자며 죽음의 인연이 도래하면 그대로 죽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으로 알고 있습니다.” 페이스북 댓글입니다. 불자들 중에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형적인 단멸론적 허무주의 견해입니다.
부처님은 허무주의를 설했을까?
한국불자들 중에 허무주의적 견해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대승불교의 공사상 영향이라 보여집니다. 모든 것이 ‘공(空)하다’고 합니다. 심지어 공한 것도 공한 것이 되어 “공, 공, 공,…”이 되어 버립니다. 공한 것이 되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도 공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부처님 가르침도 부정합니다. 공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처님이 설한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가르침이 부정됩니다. 연기법도 부정되고 사성제마저 부정됩니다. 모든 것이 부정되고 모든 것이 없는 것이 되고, 모든 것이 아닌 것이라 합니다. 공의 논리로 불교를 잘못 해석하면 허무주의자가 됩니다. 부처님은 과연 허무주의를 설했을까?
태생적 자만을 가진 바라문들은
앙굿따라니까야 ‘베란자의 경’을 보면, 바라문들이 부처님을 비난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유는 대우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는 바라문들은 “존자 고따마는 늙고 연로하고 나이가 들고 만년에 이르러 노령에 달한 바라문에게 인사하지 않고 일어서서 맞이 하지 않고 자리에 초대하지 않습니다.”(A8.11)라고 비난합니다.
부처님 당시 바라문들은 태생적으로 상층계급이었습니다. 그 결과 바라문들에게는 태생적 자만이 있었습니다. 바라문들은 항상 자리를 양보 받아야 하고 상석에 앉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태생적 자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행위에 따라 바라문도 되고 농부도 되고 도둑도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바라문들에게 부처님은 “여래가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서 맞이하고 자리에 초대한다면, 그의 머리가 부수어질 것입니다.”(A8.11)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단멸은
바라문들 입장에서 본다면 부처님은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일까 바라문들은 맹비난합니다. 베란자의 경에 따르면 여덟 가지 항목을 들어 비난합니다. 이를 나열해 보면 “존자 고따마께서는 맛이 없습니다.” 로부터 시작하여 즐김을 설하고, 무작을 설하고, 단멸을 설하고, 혐오를 설하고, 제거를 설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모두 오해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 중에 단멸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라문이여, 어떠한 이유로 나에 대하여 ‘수행자 고따마는 단멸을 설한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말하는 이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단멸을 설하고 여러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의 단멸을 설합니다. 바라문이여, 어떠한 이유로 나에게 ‘수행자 고따마는 단멸을 설한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그렇게 말하는 이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A3.110
단멸에 대하여 웃체다와다(ucchedavāda)라 합니다. 누구나‘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단멸론에 대하여 대부분 사람들은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나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 따르면 일곱 가지 단멸이 있습니다. 인간, 욕계천상, 색계천상, 무색계의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천의 단멸을 말합니다. 이런 세계에 태어나 죽는 것에 대하여 “바로 그 자아가 몸이 파괴되어 단멸하면 사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D1)라고 합니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기독교의 천국도 단멸론의 범주안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 태어나면 아무것도 없다라는 입장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바라문들에게 단멸론자로 오해받았습니다. 열반에 들면 마치 불꽃이 꺼진 것처럼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견해는 오늘날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을 이야기했을 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나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단멸을 설하고 여러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의 단멸을 설합니다.”(A8.11)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행위에 대한 과보가 남아 있는 한 단멸하고 싶어도 단멸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업과 업의 과보를 설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초기경전 도처에 실려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과거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었던 세존들도 업을 설하고 업의 과보를 설하고 정진을 설하였다.”(A3.135)라 했습니다. 과거의 부처님뿐만 아니라 미래의 부처님, 그리고 현세의 부처님이 공통적으로 설한 것은 업과 업의 과보임을 말합니다. 이는 윤회하는 삶을 말합니다. 업보가 남아 있는 한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작론자로서 부처님은
불교인들 중에도 단멸론자들이 많습니다. 몸이 파괴되어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아론을 들어 단멸론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연기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봅니다. 조건발생하는 것을 보면 단멸할 수가 없고, 조건 소멸하는 것을 보면 영원론이 발 붙일 수 없습니다.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 하지 못함으로 인한 무지의 소산으로 봅니다.
단멸론자는 업도 없고 업에 대한 과보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것을 무작설(無作說: akiriya)이라 합니다. 반면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하는 것을 ‘작론’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업과 업의 과보를 설했기 때문에 작론자(作論者: kiriyavādin)라 합니다. 작론자로서 부처님이 열반을 설했을 때는 윤회의 원인이 되는 오염원, 즉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뿌리 뽑힌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오염원이 소멸되면 윤회의 원인이 되는 땔감이 사라져서 등불이 꺼진 것처럼 열반에 들것이라 합니다.
현법열반론자가 되기 쉬운 이유
어느 누구도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고 하여 내생과 윤회를 부정한다면 ‘현법열반론자(現法涅槃論者)’가 되기 쉽습니다. 자아를 가진 자가 현세에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법열반론은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살아서 즐겁게 살다 가면 그뿐이라 합니다. 이와 같은 현법열반론은 가짜열반이고 유사열반이라 할 것입니다.
업과 업의 작용을 부정하면 무작론자라 합니다. 대표적 무작론자가 단멸론자입니다. 행위에 대한 과보를 부정했을 때 굳이 청정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수행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인생이지만 살아 있을 때 즐겁게 살다 죽으면 됩니다. 놀랍게도 불교인들에게 이와 같은 단멸론자들이 많습니다. 가르침을 모르는 무지한 자들로 스스로 한계를 드러내는 자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가 많다고 하여 어른이 아닙니다. 나이가 많다고 하여 지혜로운 자가 아닙니다. 나이가 어려도 세상의 이치를 아는 자가 장로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나이 든 노령의 바라문들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것은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부처님이 비록 바라문들 보다 나이가 적었지만 부처님은 최상자였습니다. 최상자로서의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라문이여, 예를 들어 한 마리의 암탉이 있는데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나 계란을 올바로 품고 올바로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시킬 때, 어떤 병아리가 병아리들 가운데 첫 번째로 발톱이나 부리의 끝으로 알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알껍질을 깨고 나온다면, 그 병아리를 손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손아래라고 할 수 있습니까?”(A8.11)
여러 개의 알이 있습니다. 하루나 이틀 또는 그 이상 먼저 나온 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알을 품을 때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데는 순서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이가 많다고 하여 모두 어른이라 볼 수 없습니다.
먼저 태어났지만 깨달음에 있어서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 ‘깐다라야나의 경’에 따르면 “바라문이여, 태어난 이래 여든 살, 아흔 살, 백 살의 노인이라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속에서 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고뇌에 불타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사념에 삼켜지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한다면, 그를 어리석은 장로라고 합니다.”(A2.37)라 했습니다.
나이가 어려도 세상의 이치를 안다면 그가 어른이고 장로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검은 머리를 하고 꽃다운 청춘이고 초년의 젊음을 지니고 나이 어린 청년이라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속에서 살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고뇌에 불타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된 사념에 삼켜지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를 슬기로운 장로라고 합니다.”(A2.37)라 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함을 말합니다.
자신의 깜냥(感量)으로 이야기하면 사견(邪見)
법구경에 “머리가 희다고 해서 그가 장로는 아니다. 단지 나이가 들었으나 헛되이 늙은이라 불리운다.”(Dhp260) 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고령의 바라문들도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나중에 난 알이라도 알껍질을 먼저 깨고 나온 병아리가 손위가 됩니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태어나자 마자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자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자이다.”(D14)라고 선언했습니다. 부처님은 탄생게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세상의 최상자가 되었습니다.
최상자로서 부처님 말씀은 진리 그 자체입니다. 불자들은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의지해야 합니다. 특히 가르침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S22.43)라고 특별히 주문했습니다.
불자들이 가르침에 의지해야지 다른 것에 의지하면 단멸론자와 같은 외도가 됩니다. 가르침에 의지 하지 않고 자신의 깜냥(感量)으로 판단하려 한다면 모두 개인적 견해가 되어 버립니다. 어느 누구도 개인적 견해에 의지하고 귀의하고 피난처로 삼지 않습니다. 불자라면 당연히 가르침이 실려 있는 초기경전에 의지해야 합니다. 초기경전을 근거로 말 했을 때 정견(正見)이 되고, 자신의 깜냥으로 이야기하면 사견(邪見)이 됩니다.
2018-10-0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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