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저는 한사람이 남아도 지도하겠습니다.”숫자에 집착하지 않는 어느 노법사(老法師)

담마다사 이병욱 2018. 12. 4. 12:52

 

저는 한사람이 남아도 지도하겠습니다.”숫자에 집착하지 않는 어느 노법사(老法師)

 

 

길거리에서 무명의 가수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 부르고 있습니다. 모금함이 놓여 있습니다. 심장병 어린이 치료에 쓰기 위한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체만체 지나칩니다. 고작 서너 명이 서서 들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체육관 라이브 콘서트 하는 것처럼 있는 힘을 다해 열창합니다.

 

그 한 명의 관객을 위하여 혼신을 다했어야 하는데

 

최근 페이스북에서 감명 깊은 글을 읽었습니다. 제목은 어느 무명 여가수를 보고 와서 쓰는 글입니다. 섬진강에서 사는 최혜범님이 쓴 글입니다.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무명 여가수를 보고 와서 쓰는 글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누구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지역에서 활동하는 어느 무명 여가수가 산골마을 군민회관에서 콘서트를 한다기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지인들과 함께 갔었다.

 

그녀에 대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있었지만, 호불호를 떠나 공연장에 찾아가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는 것도,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개인적인 지론을 실천하는 차원이기도 하였다.

 

가서본 결과는 실망도 대 실망이었다. 산골마을 공연문화가 그렇듯, 무명 여가수 공연에 시골사람들의 반응이 없을 거라는 짐작은 하고 갔었지만, 커다란 군민회관 공연장에 앉은 관람객이라곤 나와 함께 갔던 일행들을 포함하여 손가락 발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였는데, 내가 실망한 것은 관객 수가 아니고, 바로 무대의 주인인 무명 여가수였다.

 

관객이 적은 것은 농촌사람들이 일에 지치는 농번기 탓도 있었지만, 애초에 공연을 기획한 사람들이, 무명 여가수를 과대 포장하고, 몇 백 명을 수용하는 대형 공연장인 군민회관을 잡은 것이 실수였다.

 

그러나 정말 해서는 안 될 큰 실수를 한 것은 무명 여가수였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오기를 기다리며 공연시간을 늦춰 시작된 무명 여가수의 콘서트는 형편없다는 평조차 아까운 것으로 최악이었다.

 

유명 무명을 떠나 명색이 가수라면, 단 한 명의 관객일지라도, 자신의 노래를 들으려고 찾아준 그 한 명의 관객을 위하여 혼신을 다했어야 하는데, 그것이 예능인의 자세이고 프로인 것인데, 공연에 앞서 관객들이 많이 오지 않아 실망스럽다는 멘트로 시작된 그녀의 노래들은 하나같이 김빠진 맥주였다.

 

한마디로 노래의 흥은 고사하고 성의도 없이 내지르는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이상할 지경이서, 더는 못 듣겠다는 일행들과 도중에 자리를 뜨고 말았는데, 오늘 어떤 장소에서 그녀를 보았다, 정확히는 어느 가게에 들어온 그녀를 본 것이다.

 

오래전 군민회관에서 그녀의 노랠 들은 이후, 아무리 지척에서 공연을 한다 해도, 그 여가수가 나온다면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오늘 우연히 그녀를 보니 옛 기억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예로부터 전하는 말에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아니하면 바라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 있고, 지 설움에 지가 운다는 말이 있는데, 스스로 자신의 노래에 미치지 못하는 가수의 노래를 누가 들어줄 것인가?

 

때로는 만 명의 사람들보다 단 한 사람이 더 소중한 경우가 있고, 그 소중한 한 사람을 위하여 스스로 혼신을 다하는 것이 사람이 사는 일들인데, 하물며 명색이 가수가 관객이 적다고 사람들이 자신을 몰라준다며 노래를 성의 없이 부른다면 그걸 어찌 가수라 하겠는가.

 

가수는 자신의 흥에 자신이 미쳐야 하고, 그런 후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는 단 한 사람을 위하여 스스로 미치며 혼신을 다할 때, 비로소 만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노래에 미치는 것임을, 이제라도 그녀가 깨달아 스스로 미쳐서 노래하는 가수가 되기를 바란다.

 

소설(小雪)의 섬진강에서

2018 12 2일 박혜범 씀

 

 

최혜범님이 쓴 글을 보면 무명가수의 실망스런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명의 관객을 위하여 혼신을 다했어야 하는데라며 아쉬워 합니다. 관중이 적다 하여 대실망하여 대충 설렁설렁 노래 불렀을 때 이를 지켜 보는 사람은 괴로울 것입니다. 마치 대충대충 경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라이브카페가 있습니다. 무명가수는 손님이 많건 적건 간에 혼신의 힘을 다 해 부릅니다. 설령 단 한명을 앞에 놓고 노래 부를지라도 최선을 다 했을 때 만명, 십만명 앞에서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유명가수가 있습니다. 그는 체육관에서 주로 공연합니다. 어쩌다 한번 공연하면 인터넷 예매는 몇 분만에 동이 날 정도입니다. 그런데 체육관에서는 일체 촬영을 할 수 없습니다. 디지털카메라는 물론 스마트폰도 맡겨야 합니다. 고액의 입장료 지불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만일 그가 몇 명 있는 데서 혼신의 힘을 다 해 노래 부를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신날 것입니다. 청중이 많을 때 연사는 저절로 흥분이 되어 힘껏 고양될 것입니다. 그런데 몇 명 모이지 않았을 때 실망스런 멘트를 하며 대충 설렁설렁 넘어가고자 한다면 앉아 있는 사람에 대한 모독이 될 것입니다.

 

저는 한사람이 남아도 지도하겠습니다.”

 

어느 노법사가 있습니다. 재작년 노법사에게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 받았습니다. 가을 한철 세 달 가량 진행되었습니다. 매주 한번 열렸는데 첫날은 꽤 많이 왔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줄어 들어 중반쯤 접어 들 때는 두 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법사는 첫날 강연 때 저는 한사람이 남아도 지도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노법사는 두 명 또는 세 명 앞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준비한 법문자료를 나누어 주고 한시간 가량 알려 주었습니다. 이어서 좌선과 경행, 인터뷰를 모두 소화했습니다. 만일 한사람이 남았어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회향하는 날 최후까지 남은 세 사람은 노법사에게 감사하는 삼배의 큰 절을 올렸습니다

 

배움에 있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가장 빠른 것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강연에서 있어서 청중은 숫자에 불과합니다. 청중이 구름처럼 많다고 하여 신바람이 나서 강연을 더 잘하고, 몇 명 없다고 하여 맥빠지게 강연한다면 앞서 언급된 성의 없이 부르는 무명가수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한사람을 위해 설법한 부처님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한명을 앞에 두고 알려 주는 장면이 많습니다. 대부호의 아들 야사가 쾌락에 탐닉하고서도 , 괴롭다. ! 고통이다.”라며 괴로워 했습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야사를 앞에 놓고 야싸여, 여기에는 괴로움이 없고, 여기에는 고통이 없습니다. 야싸여, 오십시오! 앉으십시오! 내가 그대에게 가르침을 설하겠습니다.”(Vin.I.15)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야사 한사람을 위해 법을 설했습니다. 부처님은 야사에게 차제설법(次第說法)’을 설했습니다. 보시와 지계, 그리고 하늘나라 이야기와 같이 쉬운 가르침부터 시작하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여읨과 욕망의 여읨에서 오는 공덕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어느 정도 지혜가 익었을 때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즉 사성제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영산회상(靈山會上)을 보면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어느 정도 숫자가 차지 않으면 설법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대승경전과 비교됩니다. 대승경전에서 부처님이 단 사람을 앞에 놓고 법을 설했다는 장면은 보기 힘듭니다. 대승경전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대중을 앞에 놓고 법을 설했다는 장면이 많이 보입니다.

 

법화경에 영산회상(靈山會上)장면이 있습니다. 법화경 서품을 보면 부처님 께서는 왕사성의 기사굴산 가운데서 큰 비구 대중 1 2천인과 함께 계셨다.”로 시작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학무학자가 2천인, 마하파사제 비구니는 그의 권속 6천인과 함께 있었고, 보살마하살은 8만인이라 합니다. 이 밖에도 하늘사람 등 수많은 존재가 함께 있었습니다.

 

법화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영산에서 법을 설했습니다. 땅은 물론 하늘, 허공에도 대중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대중이 모여 환희 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부처님의 백호에서 광명이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의 광명은 이제까지 한번도 빛이 들어 간 적이 없는 아비지옥에 이릅니다. 그리고 일만세계가 진동합니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은 이런 조건이 되었을 때 설법합니다.

 

생사의 기로에 처해 있는 학인에게

 

법을 설하는데 있어서 대중이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급적 대중이 많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한사람이라도 법에 대하여 갈망한다면 한사람을 대상으로 법을 설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숫따니빠따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숫따니빠따에 학인 우빠씨바의 질문에 대한 경’(Sn.5.7)이 있습니다. 학인 우빠씨바는 부처님에게 싸끼야시여,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저는 커다란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없습니다. 제가 의지해서 이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있도록 의지처를 가르쳐 주십시오. 널리 보는 눈을 지닌 님이여.”(Stn.1069)라고 말했습니다.

 

학인 우빠씨바는 기로에 처해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죽느냐 사느냐에 대한 것인지 모릅니다. 만일 부처님에게서 해법을 얻지 못하면 폭류에 휩쓸려 떠 내려 가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폭류를 건널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물어 봅니다.

 

폭류를 거센 흐름또는 거센 물살이라고 합니다. 저 언덕, 피안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거센 물살을 반드시 건너가야 합니다. 이러한 폭류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독사의 뱀에 대한 비유의 경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넓은 물이라는 것은 네가지의 거센 물결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거센 흐름, 존재의 거센 흐름, 견해의 거센 흐름, 무명의 거센 흐름 을 말한다.”(S35.238)라 했습니다.

 

폭류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 존재, 견해, 무명의 폭류를 말합니다. 이러한 네 가지 폭류를 건너야 저 언덕에 우뚝 서 있는 자가 됩니다. 이처럼 네 가지 폭류를 건너지 않고서는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욕망에 빠져 버리고, 존재에 집착하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가르침을 몰랐을 때 폭류에 휩쓸려 떠내려 가고 말 것입니다.

 

우빠씨바는 생사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이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있도록 의지처를 가르쳐 주십시오.”(Stn.1069)라 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우빠씨바 한사람을 위해 설법을 해 줍니다. 부처님은 우빠씨바여, 새김을 확립하여 아무것도 없는 경지를 지각하면서, 나아가 없다에 의존하여 거센 흐름을 건너십시오.”라며 알려 줍니다. 이어서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착에서 벗어나 감각적 욕망의 폭류를 건널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빠씨바는 학인으로 어느 정도 공부가 된 사람입니다. 처음 입문하는 사람과 달라서 한마디 해 주면 알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생사의 기로에 처해 있던 우빠씨바는 부처님의 짧은 설법에서 모든 의문이 풀렸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인터뷰시간에

 

길거리의 무명가수는 사람이 많건 적건 간에 최선을 다합니다. 라이브카페의 무명가수 역시 손님이 있건 없건 간에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담마를 전하는 법사 역시 단 한사람의 수강자에게도 정성을 다해 알려 줍니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자는 스승에게 수행중에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하여 보고 합니다. 이와 같은 장면에 대하여 책에서는 그의 얼굴 표정이 온화하고 은은하며 깨끗하다. 그는 스승을 향해서 공손하고 부드럽게 인사를 할 것이다. 또한 스승에게 예의가 바르고 조용하게 보고 한다. 이는 매우 훌륭한 일이다.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의 수준에서 생멸의 지혜로 올라선 것이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일대일 대면하고 있습니다. 제자의 얼굴 표정은 온화하고 은은하고 감관이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제자는 자신이 느낀 것을 스승에게 예의를 갖추어 조용하게 보고합니다. 스승은 제자가 생멸의 지혜단계(udayabbayañāna)’에 이르게 된 것을 알게 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눈밝은 사람 한두명만 있어도

 

대중이 많다고 하여 모두 다 알아 듣는 것은 아닙니다. 숫자가 많다고 하여 흥이 나서 강연이 잘되고,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아 실망한다면 훌륭한 강사는 아닙니다. 대중이 많다고 하여 모두 다 집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서 눈밝은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관중이 적다고 실망하여 대충 부르는 무명가수가 있는가 하면, 사람이 있건 없건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르는 무명가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청중이 많아야 힘이 나는 강사가 있는가 하면 청중이 있건 없건 최선을 다하는 강사가 있습니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눈밝은 사람은 드뭅니다. 설령 그가 낮은 단계에 있다면 쉬운 가르침부터 알려 주면 됩니다. 단한사람이 남더라도 지도하겠다는 노법사의 말을 떠 올려 봅니다.

 

 

2018-12-04

담마다사(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