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 돼지, 하이에나처럼 살순 없다, 사람이 수행해야 하는 이유
어저께는 강행군했습니다. 대부분 쉬는 토요일임에도 이른 아침부터 자정에 이르기까지 세 군데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오전에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이라는 외우기 힘들고 긴 이름을 가진 곳에서 추계 불교학회 세미나에 갔습니다. 오후에는 정평법회와 정평송년회에 참석했습니다.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김진태선생이 진행하는 위빠사나 수업에 참석 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거의 자정이 다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일요일 일찍 일어나 사무실에 부리나케 달려가 이 글을 씁니다. 전날의 기억을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잠을 자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기 때문에 그 기운으로 좋은 생각이 떠 올랐을 때 붙잡아 두기 위해서입니다. 일요일 오전 담마와나선원 탁발법회를 앞두고 마치 속도전 벌이듯이 자판을 두들깁니다.
스승이 된다는 것은
어제 저녁 위빠사나 수업은 여러 모로 유익했습니다. 김진태선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법문에서부터 좌선과 경행까지 지도했습니다. 김진태선생 특유의 유머와 독설은 유쾌하고 통쾌하고 시원했습니다. 사람들은 김진태 교수의 걸쭉한 이야기에 때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수행과 관련된 체험을 이야기할 때는 진지하게 경청하기도 합니다.
김진태선생은 약 1시간 30분 가량의 법문에서 수행과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물론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있었습니다. 김진태선생에 따르면 수행의 나라 미얀마에 오간 것이 약 20년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교적 부처님의 원음과 수행방법이 잘 전승되어 온 미얀마에서 해법을 찾은 것입니다.
우리 불교용어 중에 회향(廻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불교에서 자기가 닦은 선근공덕을 다른 사람이나 자기의 불과(佛果)로 돌려 함께 하는 일’입니다.
김진태선생이 주말 늦은 밤에 지도를 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회향이라 봅니다. 자신이 이룬 성과를 함께 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자비의 마음이라 볼 수도 있지만 바라밀행을 실천하는 마음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미얀마에 가서 배운 것에 대하여 “남의 스승이 되려는 마음으로 배웠습니다.”라 했습니다.
스승이 되려면 많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남에게 알려 줄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자신의 수행이 먼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일까 구도자들은 이 스승 저 스승 찾아 다니며 배웁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배운 것을 남에게도 알려 준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배운 것을 자신에게 그친다면 독각승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연기법을 깨달아 부처가 되었지만 설법할 수 없는 연각승을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설법했습니다. 그것은 사아승지십만겁을 보살로서 바라밀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바라밀공덕의 힘으로 부처가 되어 설법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스승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원력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십바라밀일 것입니다.
이전찰나를 기억하는 것
수행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입니다. 부처님은 두 가지 수행법을 모두 강조했습니다. 마음을 집중해야 법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사마타이고 법을 볼 수 있는 것이 위빠사나입니다. 그렇다면 법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를 신, 수, 심, 법 이렇게 네 가지를 관찰 하는 것에 대하여 사념처수행이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띠’해야 하는데, 김진태선생은 사띠에 대하여 ‘이전찰나를 기억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바로 이전 찰나를 알아차려야 사띠가 유지됨을 말합니다.
사념처 수행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것은 실재를 보기 위함입니다. 사마타는 개념을 대상으로 하지만 위빠사나는 실재를 보는 수행이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사념처수행을 하면 오온과 십이처에서 생멸하는 실재를 관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수행은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만 고정하여 집중하는 사마타와 다른 것입니다.
평좌(平坐)하는 방법에 대하여
김진태선생은 법문이 끝난 후에 실재를 관찰하기 위해서 좌선과 행선하는 방법에 대하여 알려 주었습니다. 일종의 앉는 방법과 걷는 방법에 대한 실습시간이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앉는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김진태선생에 따르면 바르게 앉아야 오래 버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앉는 방법을 터득하는데 수 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김진태선생이 권장하는 방법은 ‘평좌(平坐)’입니다. 본래 결과부좌가 이상적이지만 일반적으로 수행처에서는 평좌라 합니다.
앉을 때는 엉덩이 항문과 낭심 중간 부위가 바닥에 닿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앉아야 머리 회음부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일직선으로 곧게 펴진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한쪽 발을 구부려 낭심에 바싹 붙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앉는데 있어서 이 방법이 핵심일 것입니다. 실제로 해 보니 매우 편안 했습니다.
발을 낭심 부위에 바싹 붙이니 허리가 펴지고 자세가 자연스럽게 바르게 됩니다. 나머지 한쪽발은 가볍게 붙이면 됩니다. 앉을 때는 방석을 하나 더 사용하여 엉덩이에 대라고 했습니다. 높이는 약 5센티미터가 좋다고 합니다. 이런 자세로 앉았을 때 양쪽의 다리가 바닥에 평평하게 붙어지게 됩니다. 이런 자세를 평좌라 합니다.
경행하면 다섯 가지 공덕이
좌선 못지 않게 경행도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처에서는 좌선 한시간에 경행한시간입니다. 경행을 하면 여러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상기현상이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시간 좌선에 한시간 경행 했을 때 여러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앙굿따라니니까야‘경행공덕에 대한 경(A5.29)’에 따르면 부처님은 경행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경행의 공덕이 있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긴 여행을 견디게 하고, 정근을 견디게 하고, 건강해지고,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본 것을 완전히 소화시키고,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경행의 공덕이 있다.”(A5.29)
부처님은 경행에도 공덕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득이라는 말보다 공덕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경행이 단지 몸을 푸는 정도에 지나지 않다면 공덕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경행공덕에 대하여 1)긴 여행을 견디게 하는 것, 2)정근을 견디게 하는 것, 3)건강해지는 것, 4)완전히 소화시키는 것, 5)집중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경행합니다. 그러나 무어니 해도 경행의 가장 큰 이점은 집중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라 했습니다.
경행을 하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어느 수행이든지 집중을 필요로 합니다. 반드시 앉아 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위빠사나수행처에서는 좌선과 경행을 동등하게 취급합니다. 경행도 강력한 집중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경행하면서 어떻게 집중을 유지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서에서는 “앉으면, 서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상이 사라진다. 누우면, 앉아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인상이 사라진다. 경행하면,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즉, 경행할 때의 집중은 앉아 있는 것보다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되고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Mrp.III.236)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경행이 좌선보다는 집중이 덜 하지만 그래도 좌선보다 나은 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좌선은 움직임 없이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전오식을 차단하면서 마음의 문과 열어 놓습니다. 그러나 경행은 자신의 움직이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대를 관찰하게 됩니다. 발바닥 감촉으로 딱딱하거나 부드러움을 느낀다면 지대를 알아차리는 것이고, 움직이거나 방향전환한다면 풍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뜨겁거나 차갑거나 열이 나는 것은 화대입니다. 우리 몸이 집적 되어 있는 것은 수대에 따른 것입니다. 이렇게 경행은 사대를 알아차리는 수행인데, 이는 물질을 알아 차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경행을 하면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 가장 첫번째 지혜인 ‘정신과 물질을 아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경행을 하면 얻어지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과 물질을 아는 지혜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입니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첫번째와 두번째 해당됩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경행이라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가장 기초가 되는 지혜를 계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행을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설령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이날 김진태 선생은 경행하는 방법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경행하는 방법에 대하여
경행은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행하는 방법을 배워야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 없이 경행을 하고 경행에 대한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김진태선생이 설명한 경행은 그야말로 대단히 유용했습니다. 그것은 십수년간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이라 봅니다. 먼저 발을 떼기 입니다.
한쪽 발을 들어서 놓을 때 보통 세 단계로 합니다. 발을 떼어서 들어서 놓음입니다. 이때 발을 뗄때에는 뒷굼치부터 듭니다. 앞꿈치가 바닥에 닿아 있는 상태에서 발을 뗍니다. 발을 떼어 옮길 때는 ‘수평이동’입니다. 수평이동하여 발을 성큼 디딜 때는 앞뒷금치와 뒷굼치가 동시가 바닥에 닿아야 합니다. 이렇게 발을 ‘1)떼어서 2)들어서 3)놓음’이라는 세 단계로 진행할 때 마음이 발에 가 있어야 합니다.
김진태선생에 따르면 경행을 하게 되면 경행뿐만 아니라 머무는 수행도 함께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행주좌와에서 행과 주(住)를 말합니다. 여기서 행은 경행을 말하고 주는 경행하다 멈춘 상태를 말합니다.
경행하다 멈춘상태가 주입니다. 이때 눈을 감습니다. 눈을 감고서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듯이 훑어 내립니다. 이는 마음을 머리끝에서부터 두어 차츰 얼굴, 가슴, 배, 발바닥에 이르기 따지 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스캔작업을 세 번 하라고 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다시 위에서 아래로 느낌을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 방향전환을 합니다.
경행을 하다보면 방향전환하게 됩니다. 한번에 돌 수 없으므로 세 번에 나누어 돌아야 합니다. 이때 발은 들어서 놓음이라는 두 단계입니다. 다 돌았으면 눈 앞을 봅니다. 보통 자신의 키만큼의 거리입니다. 이때 바닥이 보일 때 단지 ‘보임’이라고 해야 합니다.
방향전환을 하여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나아가기 전에 차수한 손의 방향을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손을 앞으로 하여 차수했다면 돌아서 갈 때는 뒤로 차수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돌 때 마다 차수한 손을 앞과 뒤로 바꾸어 줍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알아차리기 위해서입니다. 방향전환할 때도 한번은 왼쪽으로 돌았다면 다음 번에는 오른쪽으로 도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모두 알아차려서 걷는다면 경행한시간은 지루할 만큼 긴 시간은 아닐 것입니다.
김진태선생은 경행하는 방법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마치 훈련소 실습조교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모두 진지한 자세로 경청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장면을 놓치기 싫어서일까 스마트폰 동영상으로 촬영했습니다.
부처님도 경행했다
위빠사나수행처에서는 좌선과 경행은 필수입니다. 좌선만 중시하고 경행을 등한시한다는 것은 상상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도 경행공덕을 말씀 했듯이 수행처에서는 경행은 필수 입니다. 이와 같은 경행은 부처님도 즐겨했습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이라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A3.16)라 했습니다. 경행을 하여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또한 경행은 졸릴 때도 매우 유용합니다. 앙굿따라니까야 ‘졸림의 경’에서는 “그대는 앞과 뒤를 지각하면서 감관을 안으로 향하게 하여, 정신을 밖으로 흩어지게 하지 않고 경행한다.”(A7.61)라 했습니다. 이와 같이 경행공덕이 있습니다.
개나 돼지, 하이에나처럼 살순 없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순 없습니다. 밥만 먹고 산다면 축생의 삶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육도윤회하는 세계가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볼 수 있는 세계는 인간과 축생입니다. 그런 축생은 괴로운 곳입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악행을 하면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A7.74)라는 정형구로 표현됩니다.. 이때 괴로운 곳은 축생을 말합니다. 즐거움 보다는 괴로움이 월등하게 많은 곳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대부분 축생으로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축생처럼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로지 먹는 것에만 관심 보인다면 축생의 삶과 다를 바 없습니다. 개나 돼지의 경우 주인이 주는 밥만 먹고 삽니다. 먹는 것은 보장 되지만 그대신 주인의 처분에 따라야 합니다. 야생의 동물은 늘 굶주려 있습니다. 먹이를 찾아 늘 두리번거립니다. 사람처럼 축적할 수 없기 때문에 기회 될 때마다 먹습니다. 약한 것은 강한 것의 먹이가 되는 약육강식의 동물세계는 괴로운 곳임에 틀림 없습니다.
사람은 먹고 사는 것에 있어서는 동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동물처럼 살면 동물로 태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라 봅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에게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에 대하여 이 세상을 수호 하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오로지 먹는 것에만 관심 보이는 개나 돼지, 그리고 약육강식의 하이에나처럼 살순 없습니다. 늦은 밤까지 수행하는 이유라 생각합니다.
2018-12-16
담마다사(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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