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현존(現存)을 주장하는 어느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담마다사 이병욱 2019. 3. 9. 10:04

 

현존(現存)을 주장하는 어느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이보게 저승 갈 때 무얼 가지고 가지?”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 임종의 순간에 어떤 생각이 떠 오를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떠 오른다고 한다. 일생을 살면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것이 떠올라, 그 인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도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고 한다. 임종에 이른 자는 손가락 하나 자신의 힘으로 까닥할 수 없고 눈꺼풀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은 업을 가지고 저승에 가는 것이다. 그것이 살인과 같은 악업일 수도 있고 명상수행과 같은 선업일 수도 있다. 그 동안 애착을 가졌던 재물은 하나도 가져 가지 못한다. 재물을 모으는 과정에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업을 가져간다.

 

매일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는다. 마치 부활하듯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오늘 아침을 맞는 것은 어제가 있기 때문이다. 어제 잘 살았다면 오늘 아침은 몸과 마음이 편안할 것이다. 누군가 잠든 채로 죽어 버렸으면라고 말할 정도라면 삶이 괴로운 것이다. 오늘이 괴로우면 내일도 괴롭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오늘 행복하다면 내일도 행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번 생을 잘 산 사람은 다음 생도 잘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기뻐하니 이 세상에서도 기뻐하고 저 세상에서도 기뻐한다. 자신의 업의 청정함을 보고 기뻐하고 그리고 환희한다.”(Dhp.16)라 했다.

 

이 세상이 있으면 저 세상도

 

이 세상이 있으면 저 세상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는 연기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만약 다른 세상이 있고 선행과 악행의 과보가 있다면”(A3.65)이라 하여 저 세상을 이야기 했다. 부처님은 또 한편으로 만약 다른 세상이 없고 선행과 악행의 과보가 없다면”(A3.65)이라 하여 저 세상이 없을 수도 있다고 했다. 만약 저 세상이 있다면 선악의 과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막행막식하는 단멸론자에게는 재앙이 될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없다면 선악의 과보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막행막식하는 단멸론자에게는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은 알 수 있지만 저 세상은 알 수 없다. 이 세상은 나의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어서 알 수 있지만, 저 세상은 나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저 세상이 없다고 볼 수 없다. 나의 눈과 귀 등 감각으로 인지 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없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열대과일을 한번도 보지도 맛보지도 못했지만 지구 어디엔가는 있는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종족을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바다 깊은 심해에 가 본적이 없지만 생명체가 있을 수 있다. 저 먼 우주에도 내가 알 수 없는 생명체가 있을 수 있다. 나의 감각에 포착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기 마련이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도 있다. 이 세상이 있으면 저 세상이 있기 마련이다.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이 세상도 있지만 감각적으로 인지 할 수 없는 저 세상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저 세상도 없고 선악의 과보도 없다고 부정한다면 그는 반반의 확률에 내기를 거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저 세상이 있으면 악처에 떨어질 것이고, 저 세상이 없다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반반의 확률보다는 백프로 확률에 내기를 거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듯이, 이 세상이 있으므로 저 세상도 있다고 보아 선업공덕을 쌓는다면 그는 양세상에서 승리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한다. ‘내가 선을 지었다라고 환희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한다.”(Dhp.18)라 한 것이다.

 

현존(現存)을 주장하는 어느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종교인이라면 이 세상과 저 세상 두 세상이 있다고 보는 것이 대단히 유리하다. 저 세상이 있는지는 죽어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하지만, 두 세상이 있어서 선악의 과보를 받는다고 본다면 확률 백프로에 도전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물론 저 세상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도 선하게 살 수 있다. 이는 만약 다른 세상이 없고 선행과 악행의 과보가 없다면, ‘나는 세상에 현세에 원한을 여의고 폭력을 여의고 고뇌없이 행복하게 자신을 수호한다.’는 그것이 그가 얻는 두 번째 안식입니다.”(A3.65)라고 하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은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에게도 볼 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스티븐 배철러이다.

 

스티븐 배철러의 어느 불교무신론자의 고백을 읽었다.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열아홉살 되던 해에 삶의 따분함으로 인하여 일단의 히피무리들과 함께 동쪽으로 여행을 했는데 70년대 초반 다람살라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승려로서 6년을 보내고 한국 송광사에서 구산스님의 지도하에 3년을 보냈다. 그는 송광사에 있을 때 구산스님 어록을 영문으로 옮기는 일을 서양 비구니스님과 함께 했는데, 이 일을 인연으로 하여 둘은 나중에 결혼 하게 되었다. 지금은 프랑스에서 재가불자로서 삶을 살고 있다.

 




스티븐 배철러는 책의 제목에 자신에 대하여 불교무신론자라 했다. 그러나 책을 읽어 보면 불가지론자에 가깝다. 사후의 삶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고 말을 하는 자를 말한다. 그것은 그가 티벳불교의 환생을 믿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 본다. 그는 자신의 감각으로 포착된 것만 믿는다. 오로지 지금 현존하는 것만이 의미 있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대체 왜 아무것도 없기보다는 뭔가가 있는 것일까?”(81p)라고 의문했다. 이는 그가 다람살라에서 어느 날 숙소로 가는 길에 갑자기 모든 것이 완전히 낯선 느낌이 강력하게 솟구쳐 걸음을 멈추었다.”라고 표현한 것에서 시작된다. 이와 같은 낯선 느낌에 대하여 삶의 바다에서 솟아 오른 거대한 파도의 꼭대기로 올려진 것 같았다고 하는데 이런 느낌에 대하여 그것은 뭔가 아무것도 아니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로운가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떠오르게 만들었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깨달음에 기연이 있다고 한다. 테라가타 주석에 따르면 어느 장로는 문지방에 넘어져서 일어나려고 하는 찰나에 깨달았다고 한다. 어느 수행자는 커다란 나무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 배철러 역시 기연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가 문득 깨달은 것은 현존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도대체 왜 아무것도 없기보다는 뭔가가 있는 것일까?”라고 의문했는데 이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전율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존에 대한 의문이 불교의 업보사상 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배철러는 한국 송광사에서 보낸 3년이 자신의 승려생활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이뭣고?’알 수 없는 의문 때문이었을 것이다. 티벳불교에서는 환생, 업보 등을 중시하여 질문보다는 답을 우선시하고 있지만, 한국의 선불교에서는 답 보다는 질문에 우선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깔라마의 경에서 한구절을 예로 들어

 

배철러는 무신론자이자 불가지론자이다. 그는 업보와 환생을 인정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는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앙굿따라니까야 깔라마의 경에서 한구절을 예로 들고 있다. 앞서 언급된 만약 다른 세상이 없고 선행과 악행의 과보가 없다면에 대한 것이다. 이 구문과 관련하여 그는 내세가 없고 선행이나 악행의 결실이 없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래도 나는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 내 자신을 증오와 악에서 벗어나고 안전하고 행복한 상태로 있게끔 할 것입니다.”(148p)라고 했다. 내세와 윤회가 없어도 충분히 착하고 건전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 중에 일부분만 가져 온 것이다. 깔라마의 경에서 부처님은 네 가지 경우의 수를 말했는데, 그 중의 하나만 가져 와서 어쩌면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현존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전통이나 믿음을 중시하기 보다는 어떤 생각이 제대로인지 시험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환생과 업의 형이상학을 고집하기보다는 이 세상이 정말로 유일한 것 일수도 있다.”라고 했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현존하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배철러의 현존에 대한 이야기는 티벳불교의 환생이라는 교리에 실망해서 나온 것이다. 물질과 동떨어진 마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있어서 이 생이 끝난 뒤에 다른 생으로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기 힘들다는 것을 말한다. 배철러가 말하는 현존에 대한 이야기는 테라와다불교의 사띠에 더 가깝다. 알아차림 명상을 했을 때 아는 마음만 있는 것이 이를 말한다. 새소리를 듣고 있다면 새소리를 듣는-내가 있을 뿐이었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존에 대하여 하이데거의 세계--존재(being-in-the-world)’로 설명했다. 이에 대하여 남들과 공유하는 이 유동적이고ㅡ 분리할 수 없으며, 인과적인 현실구조속으로 내가 불가분하게 엮여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83p)라고 말했다. 몸으로부터 분리된 마음 또는 영혼이 자유롭게 떠다니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배철러는 불가지론자이다. 내세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는 삶에 의미를 두고 있다. 그래서일까 나의 행위는 내가 죽은 뒤 계속 오랫동안 반향을 일으키고 결실을 맺을 수 있지만 내가 남아서 그것을 목격하지는 못할 것이다.”(83p)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불가지론적 입장은 과학적 무신론자들에게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자신의 감각으로 인지 되지 않은 것이나 과학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배철러의 경우 알 수 없다라는 불가지론적 입장이다,

 

어느 누구도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기 마련이다. 이 세상이 있으면 당연히 저 세상이 있을 것이다. 설령 저 세상이 나의 감각적 인지에 포착되지 않을지라도 연기의 법칙에 따르면 틀림 없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현존을 말하는 불가지론자들은 오로지 이 세상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저 세상이 있는 것에 대하여 반반의 내기를 하는 것 보다는 저 세상이 있다고 믿는 것이 백프로의 완전한 승률이 되기 때문에 더 낫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논파할 수 없다고 했다. 어느 무신론자이자 불가지론자의 말도 타당하긴 하지만 그래도 부처님 말씀만 못한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된 뒤의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그러한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하여 한 쪽만을 충족시키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버리고 있다.”(M60.10)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있다고 주장하는 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칭찬받고 있다. 만약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행운을 받는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칭찬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여, 양쪽으로 충족하며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버린다.”(M60.13)

 

 

2019-03-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