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기

사람과 마주하는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19. 3. 26. 11:32

 

사람과 마주하는 것은

 

 

책을 하나 읽고 있다. 아신 빤딧짜 스님이 지은 ‘11일간의 특별한 수업이다. 2004년 불교교양대학 도반이 선물한 책이다. 재작년 송년회 할 때 한권씩 법보시한 책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싸인(署名)이 있는 책이다.

 

책을 펼치면 동글동글한 미얀마 글씨와 함께 한글로 아신 빤딧짜라는 글씨가 써 있다. 영어로는 ‘17 DEC 2017’ 라고 적혀 있다. 도반이 스님에게 2017 12 17일날 수 십권을 싸인 받아 온 것이다. 그러나 책을 받아만 놓았을 뿐 한번도 읽어 보지 않았다.

 

 


 

노랑 형광메모리펜으로 줄치면서

 

빤딧짜 스님의 책을 읽고 있다. 그것은 3 28일 오전 일찍 친견날자가 잡혔기 때문이다. 김도이 선생이 중간에 역할을 한 것이다. 미얀마 집중수행이 끝나고 김도이 선생 집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 때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친견한다고 하여 얼굴만 보러 갈 수는 없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선물로 받은 책이다. 책 한권 정도는 읽고 가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서 읽기로 했다. 그런데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을 읽어 내기가 쉽지 않다. 단순하게 위빠사나 수행하는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리에 대한 것 등 테라와다불교에대한 모든 것이 총망라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을 읽을 때는 노랑 형광메모리펜으로 줄 치며 읽는다. 볼펜 등 펜을 사용하면 낙서가 되기 쉽다. 보기에도 좋지 않고 예의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노랑 형광메모리를 사용하면 기억하기도 쉽고 나중에 다시 볼 때 복습이 되기도 한다. 경전을 읽을 때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 이렇게 한줄 한줄 읽어 가다 보니 온통 노랑 메모리 천지가 된다.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황색 메모리 펜으로 덧칠한다.

 

노랑 메모리칠이 많다는 것은 기억할 것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꼭 새겨 두고 싶은 내용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놀란 것은 어떻게 외국인 수행자가 이렇게 한글로 잘 표현 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빤딧짜 스님은 한국어로 법문도 잘 하지만 책을 읽어 보면 한국어 표현력도 매우 뛰어난 것 같다.

 

일반적 의미로 본 사띠

 

책을 읽으면서 매우 공감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사띠(sati)에 대한 것이다. 평소 생각하던 것과 맞아 떨어짐을 알게 되었다. 사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른 사띠란 불--승 삼보와 선업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선업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선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일만 생각하고 좋은 일만 하려고 하는 것, 생각날 때마다 좋은 행동, 좋은 말, 좋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것이 바른 사띠입니다. 법을 잊어 버리지 않는 자, 항상 좋은 생각하고 좋은 말하고 좋은 행동 하고, 내가 원하는 좋은 결과를 위해서 그것에 필요한 것을 계속 만들어 가는 것, 즉 일반적으로 말하면 선업을 잊지 않음이 바른 사띠입니다.”(11일간의 특별한 수업, 180-181p)

 

 

빤짓짜 스님은 일반적 의미에서 사띠는 선업을 잊지 않음이라 했다. 선업을 지으려면 가장 먼저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외우면 더 좋을 것이다.

 

사실 모든 학문은 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산수를 잘 하려면 구구단을 외워야 하고, 수학을 잘 하려면 공식을 외워야 한다. 영어를 잘 하려면 단어와 문장을 외워야 한다. 모든 학문이 다 그렇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가르침 역시 외워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필기구나 녹음기가 없었기 때문에 잘 귀 기울여 들어야 했을 것이다.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한 기억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해야 한다. 기억한 것을 계속 되새기는 것, 이것이 바른 사띠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빤딧짜스님은 바른 사띠에 대하여 법을 잊어 버리지 않는 자라 했다.

 

사띠가 법을 기억하는 것이라는 의미는 초기경전에도 보인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anussarati anuvitakketi), 그 때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가 시작한다.(S45:3)”라는 문구로도 알 수 있다.

 

사띠라는 말이 본래 기억 (memory)’의 의미인데,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당연히 가르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인드풀니스와 마음챙김, 사띠(sati) 번역어에 대한 재검토를’(2017-05-2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수행의 의미로 본 사띠

 

사띠는 제일의 의미는 기억에 있다. 가르침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일반론적으로 보았을 때 사띠의 의미라 볼 수 있다. 수행의 의미로 본다면 역시 기억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빤딧짜 스님은 수행중에도 수행의 대상을 잊지 않는 것이 사띠입니다. 호흡을 관찰할 때 호흡을 잊지 않으면 그것이 사띠가 있는 것이고, 배의 움직임을 괸찰하는 사람이 배가 부르고 꺼질 때 그것을 잊지 않으면 그것이 사띠입니다.”(181p)라고 표현 해 놓았기 때문이다.

 

사띠라는 말인 일반론적으로는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고, 수행론적으로는 대상을 잊지 않음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띠에 대하여 우리말로 어떤 표현이 적당할까? 이에 대하여 빤딧짜 스님은 외국인으로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한 책들이 많이 있고, 사띠를 지혜와 혼동하여 쓴 경우도 많이 보았습니다. 외국인인 입장에서 보자면 알아차림은 바른 견해 쪽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사띠는 잊지 않음, 조심, 주의 이런 의미와 가깝습니다. 사띠는 마음속에 있는 대상을 분명하게 해주는 것뿐이지 , 이것이 따뜻하네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아는 것은 사띠와 집중이 도와줘서 지혜가 아는 것입니다.”(182p)

 

 

사띠에 대하여 알아차림으로 본다는 것은 문제가 있음을 말한다. 사띠의 본래 역할은 대상에 대하여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임에도 이를 알아차림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띠의 영역을 벗어난 것임을 말한다.

 

대상을 아는 것과 알아차리는 것과는 다르다. 대상을 아는 것은 사띠이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삼빠잔나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재성 선생은 빠알리 니까야에서 정형구로 나오는 사띠마삼빠자노(satimā sampajāno)’에 대하여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라고 번역했다.

 

사띠(sati)에 대하여 새김을 확립하는 것으로, 그리고 삼빠자나(sampajāna)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는 것으로 번역한 것은 타당하다. 이와 같은 사띠에 대하여 빤딧짜 스님은 사띠는 마음속에 있는 대상을 분명하게 만들고, 마음이 대상에 딱 붙어 집중할 수 있도록 대상을 기억하며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183p)라고 말했다. 여기까지가 사띠가 하는 일이다. 그 다음은 지혜가 일을 하는 것이다.

 

행선하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다. 발을 들어 올릴 때 아는 것은 사띠에 해당된다. 발을 바닥에 대었을 때 , 따뜻하구나라든가, ‘, 차갑구나’, 또는 딱딱하거나 부드러움 사대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은 지혜의 영역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아는 것은 지혜이다.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무아인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올바로(sam) 분명하게 꿰뚫어 아는 것 (pajānāti)이 삼빠자나(sampajāna)라 볼 수 있다. 이것이 알아차림이라 볼 수 있다.

 

삼빠자나는 사띠에 이어서 파악된다. 그래서 수행에 있어서는 항상 사띠마삼빠자노(satimā sampajāno)’라 하여 페어()로 사용된다. 이는 바른 기억에 이어 바른 집중에 따른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바른 노력에 이어 바른 기억이 있고, 바른 기억에 이어 바른 집중이 있는 것이다. 이는 팔정도에서 올바른 노력(sammāvāyāma: 正精進), 올바른 기억(sammāsati: 正念), 올바른 집중(sammāsamādhi:正定)이라는 정온(定溫)에 해당된다.

 

빤딧짜 스님은 책에서 소리가 다르면 뜻이 달라지지요.”라 했다. 한역 반야(般若)라는 말은 빤야(pañña)를 음사한 것이긴 하지만 소리가 다르기 때문에 뜻도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발음이 다름으로 인하여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것도 소리가 다르기 때문에 의미도 달라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람과 마주하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 사람 전체를 만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대화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과 말하는 것과 같다. 수행자와 만나서 이야기한다면 그 수행자의 인생뿐만 아니라, 그 수행자가 속한 전통에 대하여 아는 것과 같다.

 

미얀마 출신 외국인 빤딧짜 스님은 한국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책을 읽어 보면 대단히 심오한 내용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빤딧짜 스님 개인의 공부와 체험에 따른 것이라 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스님이 속한 교단의 전통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종종 미얀마 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면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받을 때가 있다. 이제까지 모르고 살고 있었던 것들이 법문집을 통해서 드러난 것이다. 마치 초기경전과 주석을 읽으면 가르침의 넓이와 깊이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야도의 법문집은 철저하게 빠알리 삼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견해를 말하기 보다는 전통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한국의 불교전통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빤딧짜스님의 책 ‘11일간의 특별한 수업을 읽어 보면 놀라운 내용으로 가득하다. 기억하기 위해 노랑메모리칠을 하고, 더 강조하기 위해서는 주황색 메모리로 덧칠하기도 한다. 과연 이와 같은 놀라운 내용은 어디서 왔을까? 스님의 체험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테라와다 전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외국인 미얀마 스님을 마주 한다는 것은 해당 종단의 전통과 마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19-03-26

담마다사 이병욱